〈2023.8 항쟁의기관차〉 8.15범민족대회사수를 위한 가열한 투쟁의 여름 

6월항쟁을 주도했던 청년학생들은 1987.8 결성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중심으로 조국통일운동을 가열하게 벌였다. 1961 <가자북으로!오라남으로!만나자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외치며 조국통일투쟁을 전개한 청년학생·민중들의 투쟁은 1989 활발한 민족민주운동진영의 방북투쟁으로 이어졌다. 전대협대표 임수경은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를 목적으로, 민통련대표 문익환목사는 김일성주석이 제의한 <남북정치협상회의>에 대한 화답으로 방북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신부는 판문점을 통한 임수경의 남측귀환동행을 위해 방북했다. 정부간 상층교류가 막혀있던 상황에서 파쇼적탄압을 무릅쓴 방북투쟁은 하층민족통일전선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하층민족통일전선형성의 중요성은 이미 1970년대부터 제기됐다. 남북은 1972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3대원칙을 담은 7.4남북공동성명을 합의하고 발표했으나 박정희정권은 이를 배신하고 반북과 파쇼의 길로 전환했다. 우리민족은 상층민족통일전선은 하층민족통일전선에 기초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은 8.15를 맞아 1990년대부터 매해 범민족대회를 개최했다. 특히 한총련(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은 반통일세력의 탄압에 맞서 범민족대회사수투쟁을 완강하게 벌였다. 1차범민족대회는 해방45돌이 되는 1990.8.15에 열렸다. 남통일운동세력은 정권의 탄압으로 대회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남북해외3자의 공동결의문을 발표하며 3자연대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했다. 1990.11.20 남북해외3자연대체인 범민련이 결성됐고 이후 남북해외각지역본부가 조직됐다. 범민련결성과 범민족대회는 조국통일운동사에서 획기적인 전변이었다. 1990년대 조국통일운동은 외적으로는 파쇼탄압에 맞선 범민족대회사수투쟁이었고, 내적으로는 통일운동진영내 기회주의와의 사상투쟁을 동반했다. 1999 10차범민족대회는 범민족대회10년역사에서 원칙적인 통일운동세력이 비로소 통일운동의 중심에 확고히 선 뜻깊은 대회였다. 당시 한총련은 황혜로대표를 남북청년학생회담10주년행사에 파견했다. 2000 6.15공동선언시대에 들어서면서 하층민족통일전선운동은 6.15공동위(6.15공동선언실천민족공동위원회)로 중심축을 옮기게 됐다. 범민련은 2018 4.27판문점선언·9월평양선언이후 반미투쟁의 대중적확산을 주장하며 올해까지 매해 조국통일촉진대회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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