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 항쟁의기관차〉 강대강으로 맞붙은 코리아전

조국통일을 위한 우리민족의 투쟁은 완강하게 이어졌다. 미국의 대리정권인 이승만정권이 들어선 상황에서 1950.6.19 북최고인민회의상임위는 조국전선(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요청을 받아들여 <평화적조국통일추진>을 담은 결정서를 채택했다. 결정서에는 우선 북의 최고인민회의와 남의 <국회>를 단일한 전코리아입법기관으로 통합해 총선거실시·헌법채택, 통일정부를 구성하며 평화적으로 통일하자고 제의했다. 또 남<국회>가 통합에 동의하는경우 1950.6.21 북최고인민회의대표단을 서울에 파견하거나 남<국회>대표단을 평양에 초청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논의할것을 제안했다. 이안은 당시 전민족이 동의할만큼 가장 적극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이었으나 미제와 이승만정권은 이를 묵살했다. 코리아전체를 점령하려는 미제와 친미예속 이승만정권에게는 이미 계획중인 전쟁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실제로 1949 전쟁은 이미 시작된것이나 다름없었다. 남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세력은 1949.7 조선인민유격대를 창설, 정전이후까지 이승만정권반대투쟁을 전개했다. 한편 38선부근에서는 조선인민군과 <한국군>사이의 교전이 날로 격화되고있었다. 1949 한해만도 38선부근에서 2617회의 무장충돌이 일어났다. 미제와 반북호전 이승만정권은 1949 북침계획을 완성한다. 1947 미국은 2차세계대전이후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사회주의혁명과 식민지민족해방운동을 막기 위해 냉전이라는 미명하에 대소봉쇄정책인 <트루먼주의>를 발표했다. 또 1950 발표한 <애치슨라인>에서는 아시아에서 미의 방위선을 일본·필리핀 동쪽으로 한정함으로써 코리아반도를 제외시켰다. 대신 1950초 이승만정권과 주남미군주둔, 군사지휘권에 대한 <미남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했다. 이승만정권은 남측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긴장상태를 격화시키는 동시에 남측군대를 38선주변으로 집결시켰다. 이에 북은 평화통일을 추진하는 한편 일제를 물리치고 세운 나라를 수호하고 미제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무장력을 준비했다. 해방후 새조국건설과정에서 비정규무력인 조선인민혁명군을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으로 개편했다. 북은 7.27 정전협정을 <세계<최강>을자랑하던미제침략자들의치욕스러운패배>로, 미제의 <100여년침략사에서처음으로승리하지못한협정>으로 기록한다. 비록 전쟁승리의 객관적요인인 경제적·군사적수단은 부족했지만 정의의 전쟁인 민족해방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정신력과 일심단결로 승리할수 있었다고 평가하고있다. 북은 일제해방후 바로 평천병기공장을 세우고 첫기관단총을 자체의 힘으로 제작했다. 이는 북의 자력갱생의 상징으로 이후 북은 군사에서 자위의 원칙을 견지하며 자립적국방공업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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