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 항쟁의기관차〉 〈제2의코리아전〉기도에 맞선 북의 강대강대응 

미제국주의는 1953정전이후로도 <제2의코리아전>을 다그치며 1960년대말~1970년대초, 이전과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전쟁책동을 강화해나갔다. 태평양전쟁시기부터 미제의 대코리아정책은 몇차례 변화했다. 일제해방이후에는 <신탁통치>방법으로, 그이후에는 전쟁의 방법을 시도하다가 1960말부터는 <2개코리아>정책인 <닉슨주의>를 선포했다. <2개코리아>정책은 미제가 무력으로 코리아전역을 식민지화할수 없다는것을 자인한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제는 세계제패를 위해 전략적재편성을 허용하고 남대리정권이 <북진통일>·<승공통일>을 실현할수 있도록 코리아의 분단상태를 유지시키는것이 초점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도로 박정희군사파쇼정권을 통해 <유신>독재체제를 조작하며 파쇼폭압을 강화했다. 1960년대말 미제국주의는 정치·경제·군사등 사회전분야에서 심각한 위기로 내몰렸다. 특히 방대한 병력·무장과 막대한 군사비를 쏟아부은 베트남전에서 고전하며 내부모순이 격화됐다. 닉슨 스스로도 2차세계대전이후 미국이 코리아전과 베트남전에서 25만명이 넘는 부상자와 50만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을뿐이라며 자신들이 궁지에 빠졌음을 시인했다. 북은 1960년대말부터 1970년대중반까지 미제의 군사적공세에 맞서 강력하게 대응했다. 1968.1.23 푸에블로호사건은 원산앞바다까지 침입한 미정찰함이 군사적위협을 가하면서 벌어진 사건으로 북은 미제국주의자들의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대응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듬해 1969.4.15 미해군소속 EC121정찰기가 북영공에 불법침입해 소련과 북 사이의 전파정보수집활동등 적대행위로 조선인민군비행대에 의해 격추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소련은 미제와의 협상에 타협했지만 북은 <강대강>으로 단호하게 대응했다. 1976.8.18 <판문점사건>은 미국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일어났다. 미국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사전논의 없이 미루나무를 벌목한다며 북을 자극, 전쟁을 획책했다. F4·F111·B52폭격기, 미드웨이항공모함등을 동원하는 대규모무력시위와 전투준비태세<데프콘3>가 발령됐다. 이에 북은 대규모소개작전과 선제기습타격준비를 갖추면서 전면전태세에 돌입했다. 미제는 김일성주석의 훈계발언을 유감표명으로 둔갑시키며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전쟁도발책동을 접었다. <제2의코리아전>을 예고하던 충격적인 북미간대결은 북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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