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8.15 우리민족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미완의 해방이었기에 완전한 해방인 독립을 위해 온민족이 투쟁에 나섰다. 1945.12 모스크바3상회의는 소·미·영 외세가 우리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회의나 다름없었다. 당시 미국의 루즈벨트는 코리아인은 자치능력이 없다며 40~50년정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소련의 스탈린은 코리아인의 자치능력을 인정, 5년후견제안을 제시했고 영국이 지지하면서 스탈린의 합리적안이 채택됐다. 그러나 미국은 코리아에 대한 침략야욕으로 결국 1946.3 코리아임시정부수립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소·미공동위첫회의와 1947 소·미공동위를 파탄내며 코리아문제를 사실상 미국의 거수기인 유엔으로 넘겼다. 유엔은 1947.11 남만의 단독선거를 결정, 1948.5.10 단독선거를 확정했다. 이런 정세하에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모든 애국역량의 단합이 절박하게 요구됐다. 단선단정반대투쟁은 크게 두축으로 진행됐다. 하나는 남북연석회의개최를 통한 평화적인 통일정부수립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민중들의 비평화적인 무장투쟁방법이었다. 남북연석회의는 1947.10.3 북민전(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중앙위의장단회의의 제안으로 1948.4 남북56개정당·사회단체대표695명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됐다. 회의에서는 단선단정반대·통일정부수립의 결의를 담은 <조선정치정세에대한결정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소미양국에 외국군대철거촉구, 남단독선거반대투쟁전국위원회조직과 구국투쟁을 호소하는 격문을 발표했다. 특히 5.2 쑥섬협의회(연석회의지도부들간협의회)에서는 남북총선거실시와 통일정부수립등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논의됐다. 이시기 민중항쟁도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제주민중항쟁과 여순군인봉기는 해방이후 이남에서 진행된 최초의 무장항쟁으로 역사에 기록돼있다. 1947.3.1 시작된 제주항쟁은 1948.4.3 무장투쟁으로 전화했고 1954.9.21까지 7년6개월에 걸쳐 완강하게 진행됐다. 제주항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제주도를 <붉은섬>으로 규정하고 이승만세력을 앞세워 대대적인 토벌과 학살을 자행했다. 1948.10 제주민중항쟁진압명령을 받은 여수주둔국방경비대14연대소속군인들은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명의로 호소문을 발표했다. <모든애국동포들이여!우리는우리형제를죽이는것을거부하고제주도파병을거부한다.우리는민족의이익과행복을위해싸우는진정한민중의군대가되려고봉기했다.>고 밝히고 <동족상잔결사반대>·<미군즉시철퇴>등을 요구했다. 여순군인봉기는 며칠만에 벌교·보성·고흥·광양·구례·곡성등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10.20 여수에서는 약3만명의 군중이 모여 <여수인민위원회에의한정권장악>을 선언하며 <친일파민족반역자경찰관등을철저히소탕>·<무상몰수무상분배의토지개혁실시>등을 결의했다. 미군과 이승만정권은 10.21 여수·순천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박격포·장갑차·경비정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 일제시대 만주국육군상위 김백일과 간도특설대장교 백선엽이 진압작전의 책임을 맡으며 10.27 수천명의 민중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저항세력들은 1948 2.7 구국투쟁, 4.3 제주항쟁, 10 여순군인봉기후 조선인민유격대를 창설하고 이승만정권에 반대해 투쟁했다. 이에 이승만정권은 일제가 만든 <치안유지법>에 기초해 1948.12.1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민중탄압의 도구로 사용했다. 미완의 해방을 통일정부수립으로 완성하기 위한 우리민족의 투쟁은 또한번 전쟁의 시련을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