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 항쟁의기관차〉 북침핵전쟁책동에 맞선 북의 핵개발

1953.7.27 정전이후 형식상으로는 1954부터 미군철수가 본격화됐지만 동시에 유엔사령부주관으로 포커스렌즈훈련이 시작됐다. 형식은 유엔사주관군사연습이지만 사실상 미남합동군사연습이었다. 매년 진행된 합동군사연습은 미남간 정치상황, 남북관계, 국제정세등에 따라 명칭과 내용·규모·성격이 계속 달라졌다. <포커스렌즈>(1954~68), <포커스레티나>(1969~70), <프리덤볼트>(1971~75), <팀스피리트>(1976~93)로 계속 바뀌었지만 미가 기획·지휘하고 거기에 <한국군>이 참가한다는 본질은 바뀌지않았다. 1969 베트남에서의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 미는 아시아에서 군비지출을 줄여야했고 36만명이던 주남미군을 6만명으로 감축했다. 대신 신속기동성을 강조하는 훈련으로 남의 대리정권을 안심시키려했다. 1973 공세적인 성격의 <전진방어>개념을 도입했다. 북의 공격이 있을경우 미B52가 북을 24시간 폭격함으로써 서울진입을 막고 개성을 점령, 9일만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이었다. 1975 북베트남의 승리로 베트남전이 끝나고 북이 대남공세를 강화하자 미남의 불안감이 커졌다. 이에 역대최대규모의 북침핵전쟁연습<팀스피리트>를 1976.6 처음 실시했다. 유엔사해체에 대한 유엔결의가 채택되자 1978 <한미연합사>를 창설해 <팀스피리트>연습주관을 유엔사에서 <한미연합사>로 이관했다. 1976 <팀스피리트>연습이 시작된 배경에는 1975.8 헬싱키선언도 있었다. 이선언으로 유럽에서 더이상 대규모군사훈련을 할수 없게 되자 미국은 남코리아를 대체훈련지로 선택하고 냉전시기 20만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한 세계최대군사기동연습을 벌였다. 연습에는 연합해상작전·야전기동훈련·연합상륙작전·공수낙하훈련은 물론 핵폭격모의훈련까지 포함됐다. 특히 1960년대말부터 70년대초까지도 북은 핵무기를 개발하지않았다. 반면 미국은 1958.1.29 남에 핵무기반입을 공식선언하면서 주남미군을 북침핵선제타격무력으로 전환시키고 남을 1000여개의 핵무기가 배비된 극동최대의 핵전쟁화약고로, 위험천만한 북침핵전초기지로 만들었다. 1960년대말 미국은 8종의 전술핵무기 약950발을 주남미군기지에 집중배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은 핵이야말로 평화를 지키는 자위력, 민족해방을 위한 동력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1982 영변지역에서 수십차례의 고폭실험을 한 흔적이 미정찰위성에 의해 발견됐다. 1982.6.12 삼지연에서 열린 조선노동당중앙군사위회의에서 김정일후계자의 영군체계가 확립됐다. 김일성주석은 회의에서 김정일후계자의 유일적영군체계를 공식화하며 <1930년대나1950년대와는달리군사과학기술이고도로발전한시대인것만큼현시대의발전추세와군사사업에정통하고무비의담력과천재적예지,세련된영군술을겸비한김정일동지의영군체계를새로운높은단계에서세우는것이너무도당연>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에는 1970년대 핵·미사일기술개발에서 김정일후계자의 업적이 반영된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김정일후계자는 1991.12.24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1993.4.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방위원장으로 추대됐다. 1992 IAEA핵사찰협상, 남북고위급회담으로 <팀스피리트>군사연습은 일시중단됐으나 1993 재개됐다. 북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했고 나흘뒤인 3.12 NPT(핵확산금지조약)탈퇴를 선언하며 북미사이의 강대강대결은 핵대결로 전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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