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 항쟁의기관차〉 탄핵과 항쟁, 이승만정권의 운명

이승만은 1925 임정(상해임시정부)에서 이미 탄핵된적이 있다. 1919.9 임정출범당시 대통령으로 선출됐으나 상해에 있지않았고 실제 역할도 하지않았다. 거기에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를 간청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채호등이 크게 비판하며 불만이 고조됐다. 총리직을 맡았던 이동휘는 <위임통치>안에 대한 대책마련과 대통령이 상해에 없을때 행정결재권을 국무총리에 위임하자는 안을 요구했으나 이승만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이승만은 임시의정원에서 탄핵됐다. 그랬던 자가 해방이후 미국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해 코리아를 전쟁으로 몰아가고 남코리아를 특무대·반공청년단체·정치깡패들의 활무대로 만들어 <부산정치파동>·<사사오입>등 온갖 비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권력을 유지했다. 이승만정권과 지주들이 차지한 국회는 농민들의 염원이 담긴 농지개혁도 망쳐놨다. 미국의 원조에 의해 버티던 <원조경제>는 파탄났다. 3.15부정선거반대투쟁으로 시작된 4.19항쟁은 김주열열사사건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4.18 고려대학생들이 국회의사당앞에서 연좌시위후 귀교하다가 정치깡패의 습격으로 수십명이 부상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선거부정과 파쇼폭압을 규탄하는 시위는 독재타도로 전환됐다. 4.19 지금의 대통령실에 해당하는 경무대와 중앙청앞에 대학생2만여명이 집결했다. 여기에 경찰이 무차별총격을 가해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당했다. 이승만정권에 대한 분노는 어느하나의 사건때문이 아니라 정권의 권력남용과 부정부패, 경제위기와 민생파탄등 총체적문제로 인한것이었다. 이기붕은 자기아들(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넣고 권력실세로 군림하면서 권력남용과 부정부패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이들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가짜이강석사건>이라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4.19항쟁으로 위기에 몰린 이승만은 당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며 상황을 모면하려했고 매카나기주남미대사에게 야당소속 부통령인 장면의 지시에 의해 벌어진일이라고 항변했다. 매카나기와의 만남이후 4.26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이승만은 탄핵돼야 마땅했으나 장면은 책임회피에 급급했고 국회는 민의를 대변하지못했다. 이승만사임이후 당시 법령에 의거해 외무장관인 허정이 수석국무위원자격으로 대통령권한대행이 됐다. 허정은 성명서를 발표해 관련자처벌을 약속했으나 이기붕처벌은 거부했다. 허정은 당시 이기붕의 망명을 도와줄것까지 마음먹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이 저지른 위헌·위법사안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책임을 묻지않았다. 허정은 4.28 매카나기를 초청해 미국과 밀접하게 전적으로 협조하겠다며 <모든적절한방법으로> 자신을 지지하고 도와줄것을 요청했다. 진보세력의 정치진출이 활발해지자 허정은 매카나기에게 다음국회에서는 상당한 세력이 <반미감정을표출하고주한미군철수를요구하며남북한정부간협상을제안할>것같다는 우려를 밝혔다. 자유당일각에서 이승만을 되살리려는 흐름이 보이면서 정국불안이 확산되자 미국은 이승만의 망명을 선택했다. 한편 4.19정국에서 야권인사인 장면이 모호한 입장을 취했는데 장면은 남코리아CIA분실책임자 실바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있던것으로 알려졌다. 민중은 항쟁으로 바로잡으려했으나 정치권은 배후에서 미국이 조종하는 정치협잡의 장이었다. 임정때에도 가능했던 탄핵이 대리정권하에서는 이뤄지지못했다. 정국은 또다른 항쟁으로 나아갔고 대리통치세력을 군사쿠데타로 바꾸지않으면 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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