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군사쿠데타는 그자체가 반헌법, 위헌이다. 박정희는 4.19항쟁의 결과 탄생한 <2공화국>을 군부의 무력을 동원해 엎고 권력을 쥐었다. 박정희정권의 <경제성장>을 성과로 평가한것은 <일제식민지근대화론>의 또다른 버전이다. 남민중의 희생으로 이기간 남경제는 미·일의 예속경제·하청경제로 재편됐다. 그과정에 정경유착이 이뤄졌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한편 미국은 이승만정권에서 풀지못했던 미일남3각군사동맹의 주요고리가 된 남일관계를 풀려고 했다. 박정희는 1961말 일본을 거쳐 미국을 방문했다. 이는 미국이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전제로 박정희군사정권을 승인했다는것을 보여준다. 1962~63 부정부패<4대의혹사건>, 1966 한국비료사카린밀수사건등은 정권의 적극적인 비호아래 이뤄진 권력형비리들이었다. 미CIA(중앙정보국)의 1966.3.18일자 비밀문서에서는 협정당시 박정희·김종필에게 <일본기업들은1961~65공화당예산의3분의2를제공했고,6개일본기업이한기업당100만달러에서2000만달러까지모두6600만달러를제공했다>고 밝혔다. 1964 남일협정체결은 민심의 반대에 부딪혔다. 박정희정권은 1964.6.3 비상계엄을 선포해 시위를 막았다. 1965 남일협정비준안국회통과직후인 8.26 초헌법적인 위수령을 발동해 도심에 군을 투입했다. 반헌법적인 계엄과 위수령은 1972 <유신>선언에도 반복됐다. 박정희정권은 국회해산·정당및정치활동중지·헌법일부기능중지·비상국무회의작동등 4개항의 비상조치를 선언하고 10.17 오후7시를 기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에 기초해 11.21 <유신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진행됐다. 그1주일뒤에야 대학휴교조치가 풀렸고 12.14 0시를 기해 계엄령도 해제됐다. <유신체제>는 <유신>반대투쟁을 반헌법적인 <긴급조치>로 탄압하며 유지됐다. 독재정권에 대한 반대여론은 점점더 거세졌다. 1978.12.12 총선에서는 박정희친위단체인 <유신정우회>의원77명을 포함해 겨우 과반의석을 유지했지만 민주공화당68명·신민당61명·무소속22명으로 과반수를 확보하지못했다. 득표율은 신민당32.8%, 민주공화당31.7%로 신민당에 밀렸다. 국회를 통한 탄핵은 불가능했지만 거리에서의 반정부투쟁은 무르익었다. 1979.10.16 <유신>반대시위가 부산지역에서 격화되자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시위가 확산된 마산·창원지역에는 10.20 위수령을 발동했다. 계엄이 해제된 10.26 측근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박정희는 김재규가 쏜 총에 피살됐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으로 미대사관·미CIA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10.26 며칠전 김재규는 브루스터CIA남코리아지부장을 면담했고 당일 오후2시 글라이스틴주남미대사를 만난 사실도 알려졌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최악에이른한미관계의개선>을 자신의 거사이유중 하나로 들기도 했다. 1976 <코리아게이트>에서는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미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회유·매수·협박·공작활동들이 폭로돼 미국내 박정희에 대한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박정희는 죽임을 당하지않았더라도 폭발적인 항쟁으로 최후를 맞이했을것이다. 김재규는 그폭발적항쟁을 우려했다. 탄핵은 권력의 통제하에 이뤄지지만 민중항쟁은 그들의 통제밖에 있었다. 당시 성장해가는 민중권력으로부터 기존의 대리정권을 지키는 길은 박정희를 제거하는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