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전의 시작
2023.10.7 팔레스타인 하마스가 <알아크사홍수>작전을 개시했다. 이날 오전6시30분경 하마스는 기습적으로 이스라엘남부방향으로 로케트포5000발을 발사했다. 하마스는 <우리는점령세력의범죄를끝내기로했다.책임을지지않는그들의광란은이제끝났다.>고 선언했다. 하마스는 로케트포공격과 동시에 무장대원을 침투시켜 작전초반 이스라엘군인50여명과 다수민간인을 생포했다. 당일오전 베냐민네타냐후이스라엘총리는 영상성명을 통해 <우리는전쟁중이고싸워서이길것>이라며 이번 교전을 <전쟁>으로 규정했다. 이스라엘경찰측은 팔레스타인무장대원최소60명이 이스라엘내 14개지역침투·최소7곳교전중이라고 파악했다.
전쟁개시 하루만에 레바논 헤즈볼라가 참전했다. <하마스의대규모공중·해상·지상공격에연대한다>고 선언한 헤즈볼라는 레바논·시리아와 접경한 골란고원의 이스라엘점령지 셰바팜스에 여러발의 로케트와 박격포를 발사했고 11일에는 이스라엘 아랍-알아람쉬마을북쪽을 향해 대전차정밀미사일2발을 발사했다.
세계각국의 입장이 극명하게 갈렸다. 이란 라힘사파비고문은 <팔레스타인과예루살렘이해방될때까지이들편에설것>, 아랍연맹(AL)은 <폭력적이고극단적인이스라엘의정책은지역안정을위협하는시한폭탄>이라고 반이스라엘입장을 밝혔다. 무엇보다 최근까지 이스라엘과의 관계정상화를 추진하던 사우디(사우디아라비아)가 <우리는팔레스타인인들의정당한권리박탈,팔레스타인을향한조직적도발반복으로상황이폭발할위험이있음을거듭경고해왔다>며 이스라엘을 거세게 비판했다. 한편 블라지미르푸틴러대통령은 <중동에서미국의실패를보여주는분명한사례>라고 지적했다. 튀르키예 레제프타이이프에르도안대통령도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전폭적지원에 대해 <가자지구의대량학살만불러올뿐>이라고 날을 세웠다.
미국이 이스라엘과 확고하게 한패를 자처하고있다. 바이든<정부>는 <테러공격에는어떤정당성도있을수없다>·<군사력에는군사력으로,정보에는정보로,외교에는외교로미국은이스라엘이필요로하는모든것을확보하도록할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은 9일에도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와의 공동성명을 통해 <이스라엘에대한변함없는단합된지지와하마스와그들의끔찍한테러행위에대한우리의분명한비난을표명한다>며 팔레스타인해방전쟁을 시작한 하마스의 무장공격을 일관되게 <테러>로 매도했다.
이스라엘의 대학살극
팔레스타인전은 새로운 중동전으로 확전됐다. 확전의 주요계기는 이스라엘의 지상군투입과 알아흘리아랍병원폭발참사다.
10.12 이스라엘은 유엔측에 가자지구전체주민230만명중 110만명을 24시간내 남부지역으로 이동시킬것을 통보했다.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북부 가자시티의 주민들에게 <24시간내대피촉구>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하마스측은 <우리내부전선을타격하고시민을축출하기위해심리전술에집중하고있다>고 규탄했다.
이스라엘이 말하는 <대피>의 본질은 민간인강제이주명령으로써 국제형사재판소의 조사대상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국제적십자위원회도 <이스라엘이가자지구포위공격을통해식량,물,전기를끊은상황에서주민들에게집을떠나라고명령한것은국제인도법위반>이라고 비판했다. WHO(세계보건기구)는 <대피>명령이 중환자에 대한 <사형선고>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13일 가자지구남쪽방면도로 살라알딘·알라시드를 이스라엘이 포격해 70여명이 숨지고 200여명이 크게 다쳤다. 이스라엘이 <안전한대피로>를 확약한것과 정반대로 남쪽으로 이동하던 민간인들은 이스라엘군의 무차별공습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살아서 남부의 이집트국경인근에 닿아도 국경이 막혀 피난처를 찾지못했다.
지상군투입을 예고하며 발표한 <대피>성명의 본질이 대학살예고라는것은 가자시티에 위치한 알아흘리아랍병원의 폭발참사를 통해 확인된다. 이스라엘현지언론에 따르면 알아흘리병원이 폭발한 시점은 17일 20시30분경이다. 참사원인을 이슬람지하드에 뒤집어씌우려는 이스라엘·미국의 음해모략은 아랍민중을 비롯한 세계인들을 격분시키고있다. 이란측은 <가자지구병원에서팔레스타인부상자들위로떨어진미국·이스라엘폭탄의화염이곧시오니스트를집어삼킬것>이라고 강도높게 규탄했고 헤즈볼라는 <내일을적에대한분노의날로삼자>고 투쟁을 촉구했다. 사우디와 이집트도 이스라엘규탄성명을 발표했다. 10.18 미<대통령> 바이든은 이스라엘방문과 요르단·예멘·이집트수반과의 4자정상회담을 앞두고있었는데, 요르단의 일방적인 회담취소로 4자회담은 결렬됐다.
민간인500명이상이 학살된 대참사인 알아흘리병원폭파가 이스라엘의 만행이라는 증거가 속속 밝혀지고있다. 영런던대부속기관<포렌식아키텍처>·<인권과환경옹호를위한오디오자료조사>비영리단체<이어샷>등은 이스라엘군이 통제하는 가자북동쪽에서 포탄이 발사됐다고 분석했다. 영방송 채널4는 참사현장에 파인 작은 웅덩이등을 분석해 공중확산탄사용가능성을 제기했고 이스라엘측의 하마스대원대화감청자료는 완전히 <조작된것>이라고 폭로했다. 네타냐후의 디지털보좌관 하냐냐나프탈리는 참사직후 18일새벽 X에 <이스라엘공군이가자지구의한병원에있는하마스테러리스트들의기지를타격>·<많은테러리스트들이죽었다>고 남겼다가 바로 삭제한후 <(이스라엘군은)병원을폭격하지않는다>고 게시했다. WHO가 참사직후 성명을 통해 이스라엘이 전쟁발발후 알아흘리참사전까지 가자지구의료시설에 51건이상의 공격을 가했다고 지적한 사실은 나프탈리의 말이 거짓이라는것을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민간인을 <테러리스트>로 모략하며 <살상대상>으로 주장하고있다. 10.21 이스라엘군은 <누구든가자지구북쪽을떠나와디강남쪽으로이동하지않는자는테러조직의공범으로간주될수있다>며 민간인학살에 대한 명분을 조작했다. 이스라엘당국의 극악무도함은 전쟁개시후 18일간 가자지구에서 아동만 무려 2360명이 참혹하게 사망한것을 통해 증명된다.
새로운 중동전쟁으로 전환
병원참사로 인해 중동민심이 대폭발하며 전쟁양상이 급변했다. 10.21 헤즈볼라는 스스로 <전투의중심에있다>고 선포했다. 앞서 14일 이란 호세인아미르압돌라히안외무장관은 <이스라엘이가자지구지상공격을이행하면이란은이에대응할수밖에없다>, 헤즈볼라측과 회동후 기자회견에서 <헤즈볼라가가담하면전쟁이다른지역으로확대될수있고,이로인해이스라엘은거대한지진을겪게될것>이라고 밝히며 참전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15일 미언론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란의 이슬람혁명수비대가 시리아에 배치한 병력을 이스라엘국경과 가까운쪽으로 옮기고있다고 보도했다.
한편 이스라엘과 미정부가 팔레스타인전을 중동전으로 확대시키고있다. 이스라엘은 병원참사가 있기전 15일 서쪽지중해방면 시리아알레포국제공항을 공습했고 참사후 하마스지도부제거를 위한 암살전담부대 <닐리>를 긴급편성했으며 레바논·팔레스타인서안지구까지 공중전대상을 넓히면서 전쟁을 주변나라로 확전시켰다.
한편 미국의 전쟁확대책동은 개전과 동시에 시작됐다. 미해군 제럴드포드항공모함전단을 동지중해에 이동배치하고 중동내 미전투기배치를 강화하는 한편 탄약을 신속하게 지원하며 전쟁개입을 본격화한 미정부는 이후 드와이트아이젠하워항모전단을 추가배치하고 155mm탄약·아이언돔미사일방어체계용탄약·정밀유도탄등의 제공을 확약하며 확전을 부추겼다. 무엇보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지상공격시작과 미군개입을 참전의 근거로 삼겠다고 분명히 경고했음에도 바이든<정부>는 미해병대·해군총2000명으로 구성된 신속대응부대를 이스라엘에 파병했고 대이슬람관련작전에 참여했던 장군급미군을 급파하며 전쟁에 직접개입했다.
정치적으로도 미제침략세력이 아랍민중의 분노를 부추기며 확전을 불러오고있다. 바이든은 하마스의 공격을 <테러>로 모략하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가자지구원조관련 결의안을 <이스라엘의자위권>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며 팔레스타인민중의 고립·압살을 부추기고있다.
병원참사이후 중동·북아프리카등 아랍·이슬람권중심으로 반이스라엘·반미시위가 격화됐으며 18일 주이라크미군기지를 겨냥한 2건의 드론공격시도도 발생하며 전쟁은 매우 격렬해지고있다. 한편 20일 하마스 이스마일하니예정치지도자는 전세계아랍인들·무슬림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리며 팔레스타인지지시위에 나설것과 주변국가아랍인들에게 이스라엘국경을 향해 행진해 달라고 호소했다.
레바논주재하마스정치국장 아흐메드압둘하디는 <기습공격을헤즈볼라에게사전통보하지는않았지만지속적으로협력하고있다>·
<헤즈볼라가북쪽에서이스라엘을상대로대규모전쟁을준비하고있다>고 밝혔다. 미언론 뉴욕타임스는 이스라엘 남쪽 예멘후티반군, 동쪽 시리아·이라크무장조직, 북쪽 레바논헤즈볼라가 협력해 이스라엘을 향한 총공세가능성을 보도했고 이란매체는 <이스라엘이가자폭격을중단하지않으면며칠안에작전이개시될수있다>고 언급했다.
이번 전쟁을 2년간 준비했다는 하마스고위급인사의 발언과 중동반미무장투쟁세력의 종파(종교분파)를 초월한 단결은 팔레스타인민중과 아랍민중들의 전쟁관점을 확인시켜준다. 미제침략세력의 중동분열·지배책동, 이스라엘시오니즘의 침략·강탈만행을 딛고 단결한 팔레스타인민중과 이슬람민중들이 자유와 해방을 위한 결정적투쟁에 나서고있다.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종파 수니파·시아파간 분열과 군사적공세는 중동지역갈등의 표면적이유로 자주 거론된다. 종파의 형성은 632 시작됐다. 무함마드는 610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전도를 시작한뒤 메카의 집권자들에게 탄압을 받자 622 메디나로 이주(헤지라·이슬람력원년)했고, 군대를 키워 630 메카를 정복하고 2년후 후계를 정하지않은채 운명했다.
혈족은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이븐아비탈리브가 유일했다. 이슬람공동체(움마)를 지도할 <칼리프>를 누가 맡을것인가를 두고 계파가 나뉘게 되는데, 무함마드를 잘 알고 공동체를 다스릴수 있는 인품·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칼리프를 세우자는쪽이 수니(규례를따름)파를 형성했다. 다른쪽으로 무함마드혈족이 마땅히 칼리프가 돼야한다는 세력이 <시아투알리(알리의파)>를 형성했는데, 이것이 시아(추종자)파의 원조다. 수니파의 뜻대로 무함마드의 친구·장인인 아부바크르가 초대칼리프가 됐고 이후 24년동안 수니파의 방식대로 3명의 칼리프가 선출됐다.
3대 우스만이븐아판이 암살된뒤 알리가 4대칼리프로 추대된다. 시아파입장에서 알리는 첫이맘(통솔자)이었는데, 알리가 재위5년만에 암살당하고 곧이어 장남은 독살, 차남은 전사한다. 특히 차남 후세인은 사우디에서 이라크 칼리바(현카르발라)까지 피신을 갔는데 수니파의 군대에 의해 살해된것으로 알려져있다. 시아파는 후세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매년 1.10 5일간 후세인을 기리는 <아쉬라>의식을 한다.
수니파·시아파간 첨예한 갈등이 1400여년간 계속됐다는 일각의 주장과 달리 실제 일반무슬림들사이에서는 종파간 통혼이 가능하고 같은 모스크(사원)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볼정도로 친근한 관계다. 여러종파로 나뉘는 다른 종교들과 다르지않다.
정치적으로도 대립·갈등이 심각하지않았다는것은 1979 아프간(아프가니스탄)전쟁당시 조직된 <무자헤딘>을 통해 단적으로 확인된다. <무자헤딘>은 아프간전쟁에서의 소련패배를 목적으로 미국·사우디·파키스탄이 합작해 만든 조직이다. 당시 미국이 30억달러자금·스팅어등첨단무기, 사우디가 30억달러이상의 자금, 파키스탄이 군사훈련을 맡아 이슬람무장조직을 키웠다. <무자헤딘>내에는 다양한 파벌이 결합됐지만 크게는 수니파이슬람동맹 <페샤와르7>과 시아파이슬람동맹 <테헤란8>로 나눌수 있다. <무자헤딘>은 아프간전쟁후 미국의 용병노릇을 했지만 이슬람원리주의를 고수하고있었기에 소련·공산주의만 반대한것이 아니라 미국에게도 적대적이었다.
현재 시아파는 이란과 헤즈볼라등을 장악하고있고 사우디·터키정권과 하마스, 알카에다·탈레반·ISIS(이라크·샴이슬람국가)는 수니파가 장악한것으로 알려져있다. 시리아정권은 시아파의 분파인 알라위파다. 아프간탈레반은 2021.8.15 수도 카불등 아프간전역을 장악하며 미국의 대아프간정책이 완전실패했음을 드러냈다. 한편 2011 시리아내전을 발판으로 비대해진, 극단적이슬람무장세력 ISIS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정보기관에 의해 조작됐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2013말 서방측이 지원하는 반군자유시리아군(FSA)사령관중 1명이자 ISIS성원인 사담알자말에 따르면 FSA군사평의회에는 미국·영국·프랑스정보기관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2011 시리아내전에서 반군이 승리할것이라는 제국주의세력의 기대와 달리 2013 내전의 교착상태는 확고해졌고, ISIS는 반군중 최강세력으로 부상했다.
미제침략세력의 분열·지배책동
수니파·시아파간 작은 갈등이 대결과 내전으로 증폭된 근원은 미제침략세력이다. 2001 9.11군사자작테러이후 <테러와의전쟁>을 선포하고 이라크내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거짓명분을 내세워 미국은 2003 이라크를 침략했다. 그후 2005부터 이라크내 수니파·시아파간 갈등이 격화돼 국제사회에 종파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됐다.
조지부시미정부는 이라크침공50여일만에 <임무완수>를 선언하고 민주적, 경제적으로 발전한 국가를 세울것을 공언하며 기존의 수니파정부와 군대를 해체해 직접 정부를 꾸리려했고 대규모병력을 파병해 이라크를 점령했다. 그결과 이라크는 정치적혼란에 더해 미국의 식민지약탈정책으로 경제위기·민생파탄이 심화됐다. 이라크민중들의 미군철거·미군점령반대투쟁이 거세게 일어났고 수니파·시아파는 반미전선을 형성했다.
이에 미국은 종파간분열을 본격적으로 획책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시아파인사들에게만 정부구성을 허용하고 수니파저항세력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대표적예가 2004 수니파저항세력거점을 파괴하기 위한 팔루자대학살이다. 민간인사망자가 없다는 미군의 주장과는 달리 미군공격직후 600명이상이 사망했고 1200명이상이 부상당했다. 미국은 수니파가 보이콧을 선언했음에도 선거를 강행하며 수니파를 완전히 배제시켰고 종파별로 예산을 차등배분해 종파분쟁을 계속 부추겼다. 이라크전쟁후 4년간 공식적으로 이라크민중200만명이 이라크를 떠났으며 미국은 비무장민간인학살, 감옥수감자에 대한 고문·학대·살해를 공공연히 감행했다. 한편 수니파를 분열시키기 위해 수니파일부를 매수하는 책략을 실행했는데, 그결과 이슬람근본주의를 따르는 <이라크이슬람국가(ISI)>가 탄생했다. ISI는 2011 색깔혁명인 <아랍의봄>을 계기로 2013.4 시리아로 활동영역을 넓힌뒤 <이라크·샴이슬람국가(ISIS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ISIL)>로 변모했다.
종파갈등을 내세운 제국주의침략책동은 시리아내전으로도 확인된다. 미국은 계획적으로 2007 분쟁을 일으켰고 4년뒤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됐다. 위키리크스가 2007 폭로한 주시리아미대사관의 전문에는 시리아내전계획이 자세히 나오는데 요지는 시리아정부전복방법으로 수니파·시아파사이의 <종교적증오심>을 이용한다는것이었다. 2011 미·영·프는 튀르키예를 거쳐 이슬람극단주의자들에게 무기를 지급했고 이들은 2012까지 시리아내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엄청난 무기가 지급될수 있었던것은 미CIA(중앙정보국)가 비밀무기고를 시리아국경안곳곳에 뒀기에 가능했다. 이<팀버씨커모어>작전은 버락오바마미대통령의 승인하에 이뤄졌다. 2014부터 CIA가 시리아반군(FSA)을 직접지휘하고있으며 미정부는 반군5000명양성계획을 세웠다.
중동의 분열원인이 종파간 갈등이라면 종파별입장이 동일해야한다. 이라크내에서는 이라크전쟁이후 미군에 의해 <2등국민>으로 전락한 수니파가 반미, 미군에 의해 권력을 장악한 시아파일부가 친미였으며, 시리아는 정권성향에 따라 시아파는 반미, 반정부군을 구성한 수니파는 친미다. 오늘날 새로운 중동전쟁에서 시아파인 이란·시리아·헤즈볼라가 수니파인 하마스와 굳건히 단결하고있다는 사실은 제국주의분열책동이 결코 오래갈수 없다는것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지배
팔레스타인민중과 이스라엘간 갈등을 두세력간 갈등, 문명의 충돌로 보는것은 지극히 제국주의적인 관점이다. 본질은 이스라엘시오니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지배다.
1917 영정부의 외교정책방향이 담긴 <밸푸어선언>이 등장한다. 영외무성은 금융자본가 월터로스차일드에게 <국왕폐하의정부는팔레스타인에유대인을위한조국을수립하는것에대해호의를가지고살펴보기로했다>는 내용으로 서신을 보냈다. 이같은 사실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국가>를 세우는데 영제국주의와 시오니스트가 결탁했다는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17.12 영국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한뒤 밸푸어선언의 보도를 금지했고 20여년간 팔레스타인자체신문발간을 불허하며 정보를 통제했다. 이후 밸푸어선언의 존재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발간된 신문을 통해 유입·확산됐다.
한편 밸푸어선언이 있기전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발호됐던 시오니즘운동과 관련해 몇몇의 선각자들은 그위험성을 경고했다. 1914 지식인 이사알이사는 신문<필라스틴>의 사설에서 <이팔레스타인땅에서시오니즘의물결에밀려사라질위협에직면한민족…자신의본거지에서쫓겨날위협에처한민족>이라고 경고했다. 이같은 위기는 유대인이주로도 드러났다. 1909~14 유대인이민자4만명이 팔레스타인땅에 도착해 일부를 제외하고 정착했고 시오니스트들은 부재지주의 땅을 사들여 식민촌52곳을 만들었으며 식민촌에 인접한 팔레스타인소작농의 땅을 빼앗았다.
1929 유대인정착촌과 아랍마을·남부를 연결하는 철도노선이 개통되며 노선전체를 따라 유대인정착민들이 영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지역패권장악에 골몰했다.
영제국주의와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민중의 투쟁은 시위·파업·폭동으로 폭발해 1920~29까지 여러차례 대규모의 격렬한 투쟁이 전개됐고 1930년대초에는 교육을 받은 하층중간계층을 중심으로 전투적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의 전횡은 1922 국제연맹에 의해 뒷받침됐다. 국제연맹은 팔레스타인위임통치령을 반포해 영국의 식민통치를 공식화했다. 위임통치령은 밸푸어선언의 약속을 크게 확대했다. 위임통치령은 국제연맹규약22조 <일부공동체에대해서는독립국가로서의존재를임시적으로인정할수있다>를 명시했다. 본질은 팔레스타인땅의 유대인들에게만 권리가 인정된다는것이다. 위임통치령의 전문에는 유대인만이 팔레스타인과 역사적연관성이 있는것으로 서술됐다. 28개조항중 7개항은 <민족적본거지정책>실행을 위해 시오니즘운동에 특권과 편의를 확대한다는 내용이었다. 4조는 유대인기구에 준정부지위를 부여했고 6조에서 <유대인들이이땅에빽빽하게정착하도록>장려할것을 명시했다.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정치적살해의뿌리>로 평가되는 위임통치령이 팔레스타인에 강제적으로 적용·집행됐다. 팔레스타인에는 영국위임통치정부와 함께 사실상 시오니즘행정체제가 탄생하게 된다.
영제국주의의 비호하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1차세계대전종전시점에 6%를 차지하던 유대인은 1926경 약18%로 확대됐다. 유대인들을 인위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정착시키려는게 제국주의정책이었다는것은 여러모로 확인됐다. 밸푸어는 1905 러시아짜르에게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영국에 들어오는것을 막는 외국인법을 제정했고 1933 독일나치가 권력을 잡고 유대인공동체를 탄압하자 미·영등 제국주의나라들은 차별적인 이민법을 제정하며 유대인유입을 막았다. 팔레스타인말고는 갈데가 없던 유대인들은 1935 한해동안에만 6만명 넘게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왔다. 이배후에는 독일나치정부와 시오니즘세력이 결탁한 <이전협정>이 있다. 이협정에 의해 독일유대인들은 총1억달러의 자산을 가지고 팔레스타인에 들어올수 있었다. 1939 유대인인구는 팔레스타인인구의 30%를 넘어섰다.
1936 팔레스타인중간정당인 이스티클랄당당원들이 전국각지에서 6개월간의 총파업을 시작했다. 총파업은 1936~39 대봉기로 발전했다. 영제국주의·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의 재력가·엘리트를 내세워 아랍고등위원회를 조작해 투쟁을 무마하려고 책동했다. 한편 영왕립위원회는 1937.7 식민지를 분리해 영토의 17%에 유대국가를 형성하고 이지역의 200만팔레스타인민중을 추방할것을 제안했다. 83%는 영국이 직접통치하거나 영국에 예속된 트란스요르단왕국의 아미르압둘라에게 양도할 계획이었다. 이방침을 전해들은 팔레스타인민중은 더욱 격분했고 1937.10 무장봉기가 전국을 휩쓸었다. 2년후 영국은 대대적인 무력사용으로 봉기를 진압했고, 그결과 성인남성인구의 10%가 사망·부상·투옥·망명되면서 팔레스타인민중의 투쟁역량은 급격히 약화된다. 한편 무장봉기기간 시오니스트들은 영국으로부터 대량의 무기와 광범한 훈련을 받으며 군사력을 강화한다.
1948 이스라엘에 의해 팔레스타인민중1만5000명이 학살되고 수십만명이 추방·이주당한다. <나크바(재앙)>의 시작이다. 1944 윈스턴처칠영국총리의 지지하에 영국군의 유대인대대가 구성돼 시오니스트들은 이미 상당수준의 전투경험·기술을 갖고있었다. 반면 팔레스타인인은 많은 지도자들이 망명·구금상태였고 정치세력은 4분5열됐으며 전투경험이 거의 없었다. 한편 이스라엘이 세워진후 시오니즘은 미국의 중동패권장악의 요체가 됐다. 시오니스트들은 내외적으로 강력한 반면 아랍신생독립국들인 이라크·트란스요르단·이집트·시리아·레바논은 취약한데다 분열돼있었다. 특히 이스라엘과 국경을 같이하는 트란스요르단은 최대한 넓은 팔레스타인지역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시오니스트와 결탁하며 팔레스타인민중들을 배신했다.
1947.11 유엔총회에서 <팔레스타인분할>내용의 결의안181호가 통과됐고 1948.5.14 세계시오니즘단체경영이사·팔레스타인유대인기구대통령 다비드벤구리온은 <에레츠이스라엘에서유대국가를수립하고이스라엘국가로한다>고 발표하며 이스라엘이 <건국>됐다. 이스라엘이 된 지역의 팔레스타인민중80%가 토지와 재산을 잃고 쫓겨났으며 130만팔레스타인인중 최소72만명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영국의 팔레스타인위임통치령영토의 78%를 이스라엘이 차지하면서 팔레스타인민중16만명가량이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게 됐다.
1947.11.30 영국군이 최종철수하고 다음해 5.14 이스라엘이 수립되는 기간 시오니즘준군사조직은 팔레스타인민중과 아랍지원병을 학살·제거했다. 1948봄 전국차원의 시오니즘공세(플랜달렛)로 <나크바>는 정점에 달했다. 이스라엘은 아랍양대도시 야파·하이파, 서예루살렘아랍인구역을 비롯해 수많은 도시·소읍·마을을 정복하고 주민들을 내쫓았다. 1947 분할안에서 아랍국가지역으로 지정된곳이었던 야파는 시오니즘군대의 침략으로 주민6만명이 대부분 쫓겨났다. 1948봄 대량학살이 곳곳에서 발생하자 사람들은 스스로 도망가기도 했다. 1947~48봄 <나크바>1단계에서 30만팔레스타인인들이 추방·이주당했으며 2단계에선 40만팔레스타인인들이 요르단·시리아·레바논·요르단강서안·가자등지로 피신했다. 팔레스타인민중들은 주변국에서 팔레스타인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투쟁을 계속 이어갔다.
<나크바>이후 팔레스타인은 1000여년만에 주인이 바뀌었다. 시오니즘을 <국시>로 내세운 이스라엘은 지금도 스스로 <신>에게 선택받은 <유대인국가>라고 자부한다. 역사는 시오니스트들의 주장은 거짓이며 철저히 만들어진 <신화>임을 입증한다.
거짓에 기초한 시오니즘
유대교도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산을 종교적성지로 갈망하며 세상이 종말할때 이곳에서 유대인들의 집단적귀환이 이뤄진다고 믿는다. 성서에 따르면 시온산은 구약시대 솔로몬의 성전이 있던곳이며 아브라함이 장자를 제물로 바쳤던 성전산(모리아산)은 시온산동쪽끝에 위치해있다. 시온산은 신약시대 예루살렘성·골고다언덕·십자가의길등 예수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곳이다. 예루살렘성벽이 있고 시온성으로도 불리는데 이성안에는 솔로몬이 지은것으로 구전된 <하나님의성전>이 있어, 유대인들에게 영적고향과 같은곳이다.
시오니즘은 1800년대 모제스헤스에 의해 세속적시오니즘으로 변모한다. 헤스는 <이스라엘의땅>을 유대인이 귀환할 이상적지역으로 상정했다. 1880년대 러시아유대인의사 레온필스케르는 유대인이 탄압받는 이유에 대해 <자신의조국이없기때문>이라고 설파했다. 필스케르는 1870년대 시작된 <시온을사랑하는사람들>에서 지도자로 추대된다. 이조직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으로의 조직적이주를 최초로 시작했다.
1895.1 독일스파이혐의를 받은 유대계장교 알프레드드레퓌스의 징계면직절차가 시작됐다. 이를 지켜보던 <신자유언론>파리주재기자 테오도어헤르츨은 유대인국가수립외에 유대인문제해결의 대안이 없다고 확신했다. 시오니즘은 종교적시오니즘에서 세속적시오니즘을 거쳐 헤르츨에 의해 정치적시오니즘으로 전환됐다. 2년뒤 스위스바젤에서 유럽12개국·미국·알제리·팔레스타인에서 온 204명의 유대인대표가 세계시오니스트총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헤르츨은 유대인의 집단적, 조직적 이주로 유대국가기초를 닦고 국제적승인노력을 펼쳐야한다고 주창했다.
시오니즘을 유대인들이 모두 환영했던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시오니즘은 반유대주의의 이면일뿐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유대사학자·빈수석랍비 모리츠귀데만은 <대포와총검을장착한유대교는다윗과골리앗의역할을뒤집어서우스꽝스러운모순을자아낼것>이라고 예측했다. 동유럽유대교랍비들은 1900 <시오니스트방법에반대하고정의를옹호하는빛의책>에서 <우리성스러운스승들의전설에서,<민족주의>라는단어의언급을찾을수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또 근대유대인사상가 모제스멘델스존은 <성지가결코조국이될수없다>며 <시온으로돌아가자>는 시오니즘의 기치를 부정했다. 개혁파유대교는 예배에서 시온으로의 귀환을 시사하는 모든 언급을 없애고 시오니즘을 완전히 부정했다. 1895 팔레스타인에 이주한 유대인언어학자 이츠하크엡스타인은 <아랍인에대한우리의태도>가 <모든다른것을압도하는하나의문제>라고 규정했다.
시오니즘은 거짓을 기반으로 하고있다. 시오니즘을 국시로 세워진 이스라엘이 역사서이자 팔레스타인점령의 역사적정통성으로 삼고있는 히브리성경의 내용은 발굴작업을 통해 거짓으로 판명됐다.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약속했고 모세가 이스라엘인을 이끌고 방랑한끝에 후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정복했고 다윗·솔로몬이 이스라엘통일왕국을 건설했다는것이 성경의 관련내용의 골자다. 이스라엘은 기독교의 성부·성자·성령에 성서·민족·땅을 대응시켜 <3위1체론>을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2000.7 뉴욕타임스는 <역사로서의성서,새로운고고학적시험에서낙제>기사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고고학연구소장 핑켈스타인의 고고학적주장인 성서의 허구를 보도했다. 핑켈스타인은 이스라엘이 기존가나안부족에서 기원했으며 모세의 엑소더스(출애굽기), 여호수아의 가나안땅정복은 허구라고 단언했다. 시나이반도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다스린 다윗·솔로몬의 이스라엘통일왕국과 예루살렘의 영화(榮華)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다윗왕국은 팔레스타인남부산악지대 부족국가군장정도라고 고고학적으로 증명했다. 솔로몬시대의것으로 알려진 성전(통곡의벽)은 1~16세기 3번에 걸쳐 건축됐고 솔로몬이 처700명·첩300명과 살았다는 왕궁도 없는것으로 확인됐다.
2000년전 가나안땅에서 추방된 민족의 후손이라는 유대인들의 정신적뿌리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도 허구다. 66~73 1차유대로마전쟁당시 로마인들의 황제숭배사상이 본격화되자,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이 동화를 거부했고 그리스계로마인과 유대인의 충돌로 전쟁이 시작됐다. 이때 탄압에 의해 본격적으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가 이뤄졌고 이들의 후손이 전세계에 퍼진 1400만유대인이라는것이 시오니스트들의 주장이다.
추방에 대한 사료는 66 유대교계파인 열심당(Zealot)의 반란에 참가했던 역사가 플라비우스요세푸스의 문헌이 유일하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포위후 대학살에서 110만명이 죽고 9만7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다른 도시들에서도 몇천명이 더 살해됐다고 추산했다. 이숫자는 과장됐다는것이 중론이다. 요세푸스는 갈릴리에 300만이 거주했다고 썼는데, 고고학적조사에 따르면 기원전8세기 갈릴리를 포함한 가나안땅전체에 약46만명이 거주했다. 뿐만아니라 AD2C 로마제국이 가장 번영을 누렸을때 수도로마의 인구는 근대의 중간급광역시인구에 불과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유다지역의 작은 왕국에 100만단위의 대도시가 있을리 없다는 의미다. 추산컨데 당시 예루살렘거주민수는 대략 6만~7만정도일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여러기록에도 유다지역에서의 추방은 언급되지않으며 대규모피난사태에 대한 역사적흔적도 밝혀진게 없다. 뿐만아니라 2~3세기 랍비문헌에 쓰인 <galut>는 <강제추방>의 의미보다 정치적<정복>의 의미로 쓰였다. 유대인의 전세계적분포는 추방에 의한것이 아니라 개종에 의한것이라는게 중론이다.
과거 팔레스타인땅에서 유대인이 사라진것은 324 팔레스타인이 기독교의 보호령이 되면서 팔레스타인인다수가 개종했고 이후 7세기경 이슬람교가 이땅을 정복하고 이슬람포교정책으로 세금면제를 내세워 유대인이 이슬람교로 개종한 결과다. 3개종교가 구약을 공유하고있고 생계문제가 중요한 당시 민중들입장에서 유대교만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1950년대 이스라엘초대총리 벤구리온은 시오니즘역사학자·교육부장관 벤시온디누르, 근본주의성서해석가 예헤츠켈카우프만, 이스라엘대통령 이츠하크벤츠비, 3대대통령이 되는 잘만샤자르등과 정례히브리성경모임을 갖고 성서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이념·여론·교육을 결정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10계명을 받았을때부터 유대민족은 항상 존재했으며 현재이스라엘이 유대민족의 직접적, 배타적 후손이라는 확신은 시오니즘에 의해 신화가 역사로 전변된 거짓이다.
아슈케나짐과 세파르딤
현대유대인은 크게 <독일>을 의미하는 아슈케나짐, <스페인>을 의미하는 세파르딤으로 나뉜다. 명칭에서 확인되듯 전자는 동유럽·독일방면을 뿌리로 하고 후자는 이베리아반도를 뿌리로 하고있다. 그외 리비아동쪽에서 아프가니스탄서쪽에 걸쳐 미즈라히(<동쪽>), 아프가니스탄동쪽에서 인도방면으로 베네(<이스라엘자녀들>), 사우디·예멘·에티오피아방면에 베타(<이스라엘가문>)가 있다. 20세기 전세계유대인인구중80%는 아슈케나짐이다. 아슈케나짐은 미유대인의 절대다수를 이루고있다.
아슈케나짐은 650~950 존재한 하자르국이 멸망하면서 동부유럽중심으로 확산돼 형성됐다. 하자르국은 투르크계유목민이 세운 나라였는데 9세기중반 기독교·이슬람교를 믿는 주변국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두종교와 성서를 같이 하는 유대교를 국교로 선택했고 독자적문자가 없어 유대교의 문자인 히브리어를 사용했다. 이후 비잔틴제국과 동맹관계였던 키예프국은 하자르가 <버림받은자들의종교>인 유대교로 개종했고 무슬림이 증가하고있다며 공격해 멸망시켰다. 그러면서 하자르의 유대교인들은 주변지역으로 흩어지게 됐다.
세파르딤은 아랍인·베르베르인·유럽인의 후손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서아시아·북아프리카·남유럽에서 최초의 유대공동체들이 출현했을때부터 12세기까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다. 헬레니즘시대 최초의 일신교국가인 하스몬왕조(BC142~63)제사장들은 아프리카북부지역의 주민들을 유대교로 개종시켰고, 711 이지역에 거주하며 유대교를 신봉하던 베르베르인과 아랍인들이 스페인남서부를 정복하면서 유대교가 전파된다. 이슬람교는 타종교를 포용하되 세금만 부과하는 정책을 실시해 상대적으로 이슬람교와 유대교는 평화롭게 공존했다. 이후 1400년대말 기독교를 국교로 한 스페인은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을 색출하며 개종을 거부하는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들을 추방했다. 이들이 이주하면서 세파르딤을 형성했다. 한편 아슈케나짐은 독일어방언 이디시어를, 세파르딤은 유대포르투갈어 리디노어를 사용했다.
중세에서 근대까지 유대인들은 게토에 거주했다. 중세말 유대인들이 스스로 자치구역을 요청해 게토가 형성됐다. 16세기종교개혁에 대항해 로마가톨릭교회·합스부르크왕가등이 반종교개혁을 감행하며 유대인들의 게토는 <집단격리구역>으로 전락했다. 게토의 유대인에게는 기독교가 경멸하는 직업만 허용돼 서부·중부유럽유대인중 3/4은 노점상·행상·대금업에 종사했지만 소수유대인들은 금융업자로 성공해 <궁중유대인>으로 자리잡으며 막강한 특권집단을 이뤘다. 게토의 유대인들이 비천한 신세였던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대다수를 이룬 농노의 신세를 보면 유대인만 유별나게 고통받았던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도시의 기독교도주민보다 권리가 제한됐지만 농노에 비해 의무가 적었다. 농노들은 가축우리같은 집에 거주하며 농토에 묶여 종일 고된 노동을 했고 갖가지 세금납부에 시달렸으며 군역에도 종사한데다 왕·영주가 독점하는 식료품을 구매해야했다. 유대인은 농노에 비해 세금이 적었고 무엇보다 군역이 면제됐으며 농노의 노예적처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자유를 보장받았다.
한편 18세기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덴가세게토의 담장에는 <1775세족식목요일,2살의지몬이살해됐다>는 문구와 함께 9개단도가 꽂혀있는 어린아이의 주검을 형상화한 조각이 놓여있었다. 유대인이 제례의식으로 쓰려고 죽였다는 트렌트마을의 지몬사건을 형상화한것이다. 이사례는 당시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인식과 분노를 보여준다.
한편 러시아에서 유대인수는 1800 100만명을 넘기 시작해 1887 550만명으로 급속히 늘었다. 러시아전역에 퍼져있던 유대인들이 아슈케나짐공동체에 합류하면서 급증한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제정러시아는 반정부민심을 호도하기 위해 유대인에 대한 물리적박해인 <포그롬>을 조장했다. 포그롬은 1917 러시아혁명때까지 계속됐고 이로인해 아슈케나짐은 러시아·동유럽에서 서유럽·미국을 향해 대대적으로 이주했다. 이는 전유럽적으로 반유대주의가 격화되고 반작용으로 시오니즘도 본격화됐다.
아슈케나짐은 시오니즘을 조작·확산했으며 이스라엘<건국>의 주력이 됐다. 아슈케나짐이자 시오니스트들은 이디시어·리디노어를 <이민족의언어>로 규정하고 이를 일상에서 쓰는것을 <민족타락>의 징조라고 낙인했다. 이들은 <교회의언어>인 히브리어를 현대화해 <민족의언어>로 설정하고 이스라엘의 국어로 지정했다. 이스라엘은 이디시어신문·잡지발행을 금지하며 언어말살정책을 폈다. 세파르딤의 리디노어는 이디시어보다 더욱 철저히, 폭력적으로 배제됐다. 무엇보다 세파르딤에 대한 단일화정책이 매우 폭력적으로 감행됐다. 세파르딤역사는 이스라엘교육과정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일부 세파르딤의 갓난아기를 빼앗아 <선진적>유럽출신의 시오니스트들에게 입양시키는 <2세동화작전>까지 감행됐다. 이스라엘지배층은 세파르딤이 과거 아랍민족과 평화적으로 공존했다는 역사적기억을 완전히 말살하려고했다.
반유대주의와 시오니즘, 동전의 양면
16세기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근본주의적신앙·종파가 생겼다. 개신교근본주의적신앙은 성서의 예루살렘회복, 예루살렘에 제3성전건설이 예수재림의 조건이라고 주창했다. 시오니즘등장 의 배경중 하나기도 한 이주장은 개신교로 개종하지않는 유대인에 대한 비난과 저주를 함께 담고있다. 종교개혁을 시작한 마르틴루터는 <유대인과그들의거짓말>에서 개종하지않는 유대인을 비난했고 장칼뱅의 후계자 테오도뤼스베자는 세상이 종말할때 유대인은 기독교로 개종하며 그중심무대는 팔레스타인이 될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시오니즘이자 종말론적근본주의신앙은 미국에서 복음주의신앙으로 발전했다. 이를 운동차원으로 끌어올린 윌리엄블랙스톤은 1871 자신의 저서에서 <유대인의팔레스타인귀환을시작으로현세에서예수의왕국이실현된다>고 주창했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귀환하면 기독교도들이 하늘로 오르고 불신자와 유대인만 남으며,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중동을 장악해 유대인에게 숭배를 강요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세계적군사복합동맹을 주도한다는것이다. 이때 유대인1/3이 기독교로 개종해 구원받고 나머지는 살해되며 예수는 승천한 기독교도인들과 재림해 아마겟돈에서 적그리스도를 처단하고 현세에 왕국을 건설한다고 설파했다. 유대인2/3가 팔레스타인땅에서 죽을것이라는 블랙스톤의 주장은 기독교시오니즘이 반유대주의와 같다는것을 보여준다. 실제 블랙스톤은 19세기말 러시아·동유럽에서 벌어진 포그롬이 <유대인조국>건설에 필요하다고 여겼고 1891 미금융자본·재벌·정치인등413명의 서명을 받아 유대인의 팔레스타인귀환과 국가건설을 미국이 지지할것을 청원하는 <블랙스톤메모리얼>을 주도했다.
팔레스타인내 <유대인국가>건설이 반유대주의의 이면이라는 비판은 초기부터 계속 제기돼왔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신자들이 메카와 예루살렘에 국가를 건설하려하지않듯, 유대인들도 처음에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려는 전통은 없었다. 19세기 들어 팔레스타인내 유대국가건설이 대두되고 이것이 조직적으로 추진되자 유대교내에서의 비판이 제기됨과 동시에 러시아사회주의혁명당간부이자 유대인인 일리야루바노비치는 <아랍인도정확히똑같은역사적권리를가졌다>·<유대인이국제적약탈자의보호아래뒷거래와부패한외교음모를이용해서평화로운아랍인이자신의권리를수호하게한다면,불행한일이될것>이라고 예측했다.
시오니즘과 반유대주의 결탁의 결정판은 시오니즘과 나치즘의 결탁이다. 1933 아돌프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시오니즘연맹은 히틀러에게 <유대인의어려운처지는무엇보다도그들의비정상적인직업분포와고유한전통에뿌리를내리지못한정신적,도덕적결함때문>·<(유대인의독일내에서의)불매운동은본질적으로비시오니즘적>·<(독일을상대로)싸우는것이아니라확신을심어주고그발전을돕기원하기때문>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보냈다. 이문서는 나치의 유대인학살을 결정지은 문서로 평가된다.
시오니스트들이 주창하는 <고대유대인혈통>은 대를 이어 땅을 생존수단으로 삼아온 팔레스타인무슬림농민 팔라힌이 더 가깝다. 핵심적인 시오니스트들은 1918 <과거와현재이스라엘의땅>에서 <팔라힌은7세기<이스라엘의땅>과시리아를차지한아랍정복자의후예가아니다.유대인농민은다른농민과마찬가지로자신들의땅에서쉽게떨어져나가지않았다.>고 강조했다. 19세기 팔레스타인에 온 시오니스트들이 초반에 이들을 유대인과 혈연적으로 동족이라고 생각하며 유대국가건설에서 동반자로 여긴 이유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모든유대인들은저들만의기원을가진민족에속한다>는 나치의 반유대주의관점을 그대로 따르며 <고대유대인의후손> 팔레스타인인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반유대주의>책동에 집중하고있다.
미제중동패권전략과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세워진후 미국은 중동패권장악을 목적으로 이스라엘에 군사·물질적재원을 막대하게 투입했고, 이스라엘의 주변국에 대한 침략과 팔레스타인민중학살을 조장했다.
2차세계대전이후 1948.5 당시 미국·유엔의 주된 사안중 하나는 팔레스타인문제였다. 이미 팔레스타인에서는 시오니스트의 아랍민중약탈이 심화됐고 유대인인구비중이 급증한데다 미국내 유대인들이 <유대인나라건설>을 강요하고있었기에 그렇다. 1947.11.29 유엔총회에서 <팔레스타인분할안>이 제시됐으나 미정부가 이방안을 거부했고 <유엔에의한당분간의신탁통치안>을 내세우며 유엔에 이문제를 떠넘기려고했다. 1948.3 공식적으로 <신탁통치안>을 찬성한 해리트루먼미대통령은 그해 5.14저녁 갑자기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14일 18시01분에 팔레스타인이 <유대국가수립>을 선언한지 11분후에 감행된 신속한 조치였다. 아랍민중은 유대인을 탄압하지않았고, 팔레스타인민중은 2차세계대전에 참전하지않았으며 제국주의에 의한 피해지역임에도 미제국주의의 <친시오니즘>책동에 의해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1956 2차중동전쟁때까지 중동내에서 영국·프랑스가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이후 미국이 중동패권을 장악했는데, 그중심에는 이스라엘이 있다. 1951 이스라엘유력일간지 <하레츠>는 <이스라엘은경비견이돼야한다>·<아랍국가가미국과영국의희망을분명히거스른다면이스라엘은그런아랍국가에대한공세정책을도맡게될것>·<이스라엘을이용해그런국가들을혼내줄수있을것>이라며 이스라엘이 미국의 중동패권장악의 도구라는것을 자인했다. 1958 미국가안전보장회의(NSC)비망록에는 <논리적귀결은중동에서유일한친서방강국인이스라엘을지원하는것>이라고 기록됐다. 1967 3차중동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이스라엘을 완전한 우방으로 확신했다. 이집트 나세르정권을 굴복시키며 제국주의침략세력의 아랍패권이 강화됐고 이스라엘은 요르단서안지방을 포함한 막대한 영토를 새로 장악했다. 미국무부는 <2차세계대전이래로투자한돈과노력에비춰볼때>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그어떤동맹국·우방보다도미국을위해더많은일을했다>고 평가했다. 3차중동전쟁이후 미국은 4여년간 약15억달러상당의 침략무기를 투입했다. 이는 20년동안 투입한것보다 10배이상 많은 액수였다. 미산군복합체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하고, 이스라엘시오니즘은 이무기로 아랍민중들을 학살하며 새로운 무기의 성능을 <실험>했다.
1982 레바논침략당시 이스라엘은 스스로 세계3위의 군사강국이라고 자랑했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는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미국·소련·중국에 이어 4위라고 평가했다. 당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대이스라엘원조는 이스라엘주민1인당1000달러로 세계최고수준이었다. 1978~82 이스라엘은 미국방부해외원조의 48%, 미경제원조총액의 35%를 받았다. 1980 로널드레이건은 첫대통령선거후 기자회견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강력한군사력을갖춘이스라엘이없었다면우리가직접나서야했을것>이라며 이스라엘<지원>정책의 제국주의적의도를 드러냈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유엔안보리결의를 거부하며 번번이 무산시켰다. 이같은 미국의 정치적편향은 2023.10.18 가자지구내 인도주의적지원을 위해 분쟁의 일시중단을 촉구하는 유엔안보리결의안이 미국의 거부권행사로 부결된것으로 드러난다.
한편 아랍민중들의 분노와 팔레스타인민중의 저항이 거세지자 이를 미봉하기 위한 책동으로 미제침략세력과 이스라엘시오니즘이 나서서 추진한 개량주의책동이 1993 오슬로협정체결이다. 이협정이후 팔레스타인해방투쟁의 조류는 크게 변화한다.
하마스와 파타
1964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구성된다. 그핵심에는 1959 정치단체로 조직돼 1965 당으로 발전한 <파타>가 있다. 1982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다. 주목적은 PLO를 제거하고 팔레스타인내부상황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국방장관 아리알샤론은 전쟁계획단계에서부터 PLO를 레바논에서 축출하는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았다. PLO를 군사적으로 파괴하고 레바논에서 그힘을 제거하면 요르단강서안·가자지구·동예루살렘등 점령지에서 팔레스타인민족주의의 힘도 끝장날것이며, 이지역에 대한 통제와 병합이 손쉬울것이라고 내다봤다. 레바논공식통계에 따르면 1982.6~10 대부분 민간인인 팔레스타인인·레바논인1만9000여명이 사망하고 3만명이 다쳤다. 10주전쟁이 끝난뒤에도 이스라엘의 민간인학살은 계속됐다. 이스라엘의 대대적공습과 학살은 레바논단체·민중들이 PLO에 등을 돌리게 된 객관적요인으로 작용했다. 1982.7 PLO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무장세력을 철수하겠다고 확약하며 11개조계획을 제시했다. 그중 핵심은 PLO가 떠날경우 사실상 무방비상태가 될 팔레스타인인과 레바논주민에 대한 국제적안전보장이었다. 전쟁이 끝난뒤 PLO는 레바논수도에서 철수했지만, 주민보호약속을 이행해야할 책임이 있는 다국적군도 같이 철수하면서 민간인들은 무방비상태에 놓였다. 이스라엘은 PLO의 본부가 있던곳이자 PLO동맹세력인 레바논민족운동이 자리한곳인 베이루트서쪽지역을 점령했다.
당초 PLO를 레바논에서 철수시키면서 팔레스타인해방투쟁을 약화시키려했던 이스라엘당국의 목표는 파탄났다. 해방투쟁은 이웃아랍국가들에서 팔레스타인내부로 옮겨졌다. 분노한 팔레스타인민중의 투쟁은 무장항쟁으로 전화돼 1987.12 1차<인티파다>로 폭발했다.
인티파다는 이스라엘의 서안·가자지구점령이 20년동안 감행된뒤에서야 발발했다. 20년간의 파쇼적탄압에 숨죽여있던 팔레스타인민중의 분노가 총폭발하며 발생한 인티파다는 이스라엘측의 엄청난 탄압공세에도 쉽게 약화되지않았다. 1987부터 6년간의 인티파다를 포함해 1996말까지 이스라엘군대·무장정착민이 학살한 팔레스타인인은 공식적으로 1422명이다. 그중 20%이상이 16세이하 미성년자였다. 동기간 이스라엘인175명이 팔레스타인인에게 살해됐는데 그중 86명이 군인·경찰이다. 무자비한 폭력·학살로도 인티파다를 진압하기 힘들다는것이 확인되자 미국과 이스라엘은 정치적<해결>에 나서게 된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인티파다를 무마하기 위해 PLO를 <교섭상대>로 내세웠다. PLO도 이같은 변화가 <기회>라고 여겼다. PLO는 1988.11.15 알제에서 열린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회의에서 팔레스타인독립선언서를 채택했다. 이문서를 통해 PLO는 팔레스타인땅전체에 대한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하며 분할원칙·2개국가해법·평화로운분쟁해결을 받아들였다. 12월 PLO의장 야세르아라파트는 <테러리즘>을 포기했다. 무장을 포기하며 미국·이스라엘에 스스로 굴복한것이다. 한편 미국은 1975의 약속 즉, 이스라엘이 동의하지않는 평화안을 일절 내놓지않겠다는 약속대로 했고 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이스라엘은 유대인정착촌을 마음대로 확대했다. 서안·가자지구민중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갈수 없었고 이스라엘당국은 장벽·보안장애물·검문소등을 개설하며 팔레스타인민중들을 계속 고립·약화시켰다. 1989 이스라엘총리 이츠하크라빈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자치>는 허용하지만 독립국가는 안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입장으로 인해 6년뒤 라빈은 이스라엘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체결된 오슬로협정이 팔레스타인민중에게 유리할리 없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않았지만 PLO는 조국을 식민지배하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했다. 팔레스타인<자치>를 말하지만, 영토·경계선을 비롯해 많은 부분에서의 권리는 전혀 없었다. 이스라엘은 법적으로 온갖 특권이 보장된 동시에 팔레스타인 전영토와 민중을 완벽하게 통제할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됐다.
팔레스타인민중은 오슬로협정으로 오히려 고통이 가중됐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민중통치·관리의 재정적부담과 팔레스타인민중투쟁에 대한 탄압을 팔레스타인<자치>당국에 떠넘길수 있었다. PLO는 오슬로협정을 계기로 팔레스타인민중의 반미·반이스라엘투쟁을 탄압하는 이스라엘시오니스트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1987 인티파다의 성과중 하나는 하마스의 탄생이다. <이슬람저항운동>의 약칭인 하마스는 1987.10 공식창립됐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부정하는 무장투쟁노선을 원칙적으로 고수하며 파타와 완전히 다른 행보를 보였다. 하마스는 조직내 무장조직인 <알카심여단>이 주도하는 반이스라엘무장투쟁만이아니라 팔레스타인민중을 상대로 이슬람식사회복지사업을 하며 대중적지지를 확보하고있다. 파타와 비교해 더욱 원칙적이며 민중적인 하마스의 세력은 강화됐다. 하마스는 <자치>정부의 선거를 부정하다가 2000년대 들어 선거참여로 입장을 바꿨고 2006 총선에서 승리했다. 하마스는 2007.6 파타를 가자에서 추방하고 독점적권력을 확보했다. 이스라엘이 반이스라엘노선을 확고히 견지하며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하마스와 가자지구민중들을 봉쇄·고립·학살하는데 집중하는동안, 서안지구를 장악하고있던 파타는 이를 방관함으로써 이스라엘을 방조하고있다. 하마스는 2006이후 크게 4차례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렀다. 이스라엘의 일상적인 폭력·탄압으로 가자지구에서는 17년동안 공식적으로 5000여명이 사망하고 1만5000명이 부상당했다.
2017 하마스는 1967 3차중동전쟁(6일전쟁)이전의 팔레스타인영역인 가자지구·서안지구·동예루살렘에 임시팔레스타인국가수립을 공식수용했다. 더해 이스라엘영토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전역을 이슬람땅으로 규정하고 유대국가존재를 부정하는 기존헌장을 수정했다. 타격대상도 유대인일반이 아니라 <시오니즘침략자>라고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2023.10.7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공격을 단행한뒤 서안지구에서 파타정부와 그수반 마흐무드압바스에 대한 민심의 분노가 격화되고있다. 특히 10.13 토니블링컨미국무장관과 압바스간 회동이 서안지구주민들을 격분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민심의 향방과 전쟁의 양상은 정의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강에서 바다까지 팔레스타인해방!
항상 그러했듯 이번 전쟁의 주범은 미제침략세력이다. 바이든<정부>는 중국의 1대1로를 분쇄하기 위한 의도로 이탈리아를 1대1로에서 빼오고 IMEC(인도·중동·유럽경제회랑)을 조작하고있다. 미국은 소련붕괴이후 중동유전에서 지중해를 거쳐 서방에 이르는 <동-서경제회랑>을 건설하려는게 오랜 계획이었다. IMEC을 조작하기 위해 중동지역정세를 완화시키는것은 중요했다. 핵심은 아랍의 맹주 사우디와 이스라엘간 관계정상화였다.
한편 사우디는 관광도시자 친환경미래도시 <네옴시티>조성에 주력하고있다. 네옴시티는 중동의 대표적관광도시 두바이를 모델로 하고있으며 서울의 44배에 달하는 신도시다. 거대관광도시를 조성하고있는 사우디입장에서도 중동정세완화가 중요했다. 특히 바이든<정부>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정상화조건으로 사우디에 민간핵프로그램운영지원까지 제안하며 사우디를 견인했다.
아랍의 맹주가 아랍의 적인 이스라엘과 수교를 맺는것은 이스라엘의 억압하에 있는 팔레스타인민중과 다른 아랍국가들이 결코 용인할수 없는 사건이었다. 푸틴은 바이든이 2024.11 대선을 앞두고 외교적치적쌓기를 위해 사우디·이스라엘관계정상화를 무리하게 추진한것에 반발해 하마스가 대규모공격에 들어갔다고 분석했다. 하마스는 사우디·이스라엘간 관계정상화논의가 심화되자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수교논의를 파탄시켰다.
한편 2022.12 네타냐후는 이스라엘극단주의자들과 결탁해 재집권에 성공하며 이스라엘최장기총리에 등극했다. 네타냐후는 이스라엘정착촌확대·팔레스타인인에대한차별적조치를 내세워 충돌을 야기했다. 유엔은 올초부터 9.19까지 이스라엘군대·정착민들에 의해 학살된 팔레스타인인의 수가 227명이나 되고 그중 189명이 서안지구에서 살해됐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은 1월부터 내내 있었으며 여름부터 무력대치수준은 더욱 심각해져 7.3 이스라엘군병력1000여명이 20년만에 최대규모작전을 개시해 팔레스타인인90여명을 사살했다. 한편 이슬람성지인 성전산에 위치한 알아크사사원에 대한 파괴공작도 계속돼 팔레스타인민중을 분개시켰다. 2023.1 이스라엘국가안보장관 벤그비르는 성전산방문을 강행했고 4월 유월절을 앞두고 성전산 알아크사사원내부에서 이스라엘경찰과 무슬림간 유혈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2022 동유럽의 우크라이나, 2023 중동의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전쟁들은 제국주의진영의 <신냉전>전략에 의해 야기된것이다. 하지만 전황은 제국주의진영이 불리해지고있다. 2024 개전가능성이 높은 대만전·남코리아전에서도 미제침략세력이 결코 승리할수 없다는것은 반미자주역량의 강화와 단결을 통해 확인된다. 팔레스타인민중과 단결한 이슬람국가들이 미제침략세력·이스라엘시오니즘의 지배와 약탈에서 벗어나 승리를 쟁취하는것은 정의며 필연이다. 팔레스타인은 75년간의 점령과 지배를 끝장내려는, 강에서 바다까지 자유와 해방을 이뤄내려는 투쟁을 벌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