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입장에서 1950.6 코리아전쟁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조선은 미국이 침략무력을 투입하기전에 남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않으면 안됐다. 반면 <한국>군은 미군이 들어올때까지 시간을 끌어야했다. 김일성수상은, 우리는 미제가 조선전선에 저들의 침략무력을 대대적으로 투입하기전에 신속한 기동과 연속적인 타격으로 적들을 철저히 소탕하고 공화국남반부를 완전히 해방하여야합니다, 이것이 현단계에 있어서의 우리당의 전략적방침입니다라고 밝혔다. 높은 기동과 연속타격, 신속한 우회기동과 포위섬멸전등을 기본전법으로 주타격방향을 전선서부로 정하고 인민군주력부대들로 신속히 서울해방작전을 벌리도록 했으며 인민군부대들은 개성과 의정부를 해방하고 빠른 속도로 진격해 전쟁개시3일만인 6.28 서울을 <해방>했다. 서울해방은 남반부의 넓은 지역을 짧은 기간에 해방할수 있는 유리한 국면을 열어놓았다고 평가됐다. 보조타격부대가 서울을 남단으로 우회기동해 포위섬멸하는데서 완전히 성공하지못했다. 이승만이 서울을 빠져나갔으며 제한적타격에 머물게 된셈이다. 인민군부대들은 연속적인 타격을 가하면서 인천·수원을 해방하고 오산일대에서 미24사단의 선견대를 소멸하며 전전선에 걸쳐 <한국>군과 미군을 37°선이남으로 몰아냈다. 인민군부대들은 대전 동남쪽으로 우회기동해 포위하고 7.20 총공격으로 넘어가 미24사단·<한국>군패잔부대들을 격멸하고 군사전략상거점인 대전을 해방했다. 인민군부대들은 보병과 포병의 협동작전을 강화하고 대담하게 산길과 산릉선을 타고 산악전과 야간전을 능숙하게 벌려 우회포위소멸하면서 남으로 진격했다. 9.13~15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군이 코리아반도의 허리를 가르고 들어오자 전쟁2계단으로 넘어가면서 전쟁의 목표가 달라졌다. 김일성수상은 1달안에 전쟁이 마무리될것으로 봤으나 조선인민군이 미군과 <한국>군측의 낙동강<최종방어선>을 돌파하기까지 약2달이 걸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미군은 개전초기인 6.26 B29전략폭격기를 비롯한 수십대의 최신형전투기와 폭격기를 동원해 38°선이북지역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7.7 유엔의 결의를 받아 16개국을 끌어들여 유엔군을 조작했다. 조선은 통일정부수립을 목표로, 후과를 최소화한 국지전을 전망했으나 전쟁은 미국과 그꼭두각시 이승만이 코리아반도를 집어삼키려는 전면전으로 전화됐다.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중국의 참전도 불가피하게 됐다. 첨단무력이 동원되는 현대전에서 전쟁의 후과를 최소화하는것은 적을 빠르게 제압하는것뿐이다. 보병과 포병의 협동작전의 1950년대 3일, <72시간>이 아니라 2020년대 3시간, 3분, 3초다. 코리아반도의 제한적영토내에서 포를 기본으로 하는 전략이다. 김일성주석은 서울해방전투의 시가전에서 인명피해를 우려해 포를 사용하지않도록 했다고 하는데 포의 사거리제한을 없애고 소형화·다종화하며 정밀화·지능화를 통해 정확성을 높인다면 포는 현대전의 신속한 우회기동과 연속타격, 포위섬멸의 가장 효율적인 공격수단이 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