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7 항쟁의기관차〉 항일대전은 민족해방혁명으로

억압이 있는곳에 저항이 있다는 불변의 진리다. 역사적으로 전쟁은 혁명의 결정적계기로 됐다. 1차세계대전의 결과로 최초의 사회주의국가가 출현했고 2차세계대전의 결과로 전세계적범위에서 사회주의민족해방진영이 형성되며 혁명의 대고조기를 이뤄냈다. 조선에서의 인민대중의 본성적요구의 발현은 항일대전의 빛나는 승리로, 주체시대로의 거세찬 전진에서 확인된다. 1860년대 제국주의열강의 조선침략이 시도되면서 갑오농민전쟁·반일의병투쟁등 무장으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은 계속됐지만 1910 <한일합병>을 막지못했다. 일제의 야만적인 파쇼통치아래 벌어진 1919.3.1 거족적항쟁은 노동자·농민기층민중의 민족독립을 위한 강력한 의지의 분출로 기록된다. 이후 조선민족의 무장투쟁준비가 가속화된것은 3.1항쟁당시 무장하지않은 민중의 희생에서 온 뼈저린 교훈이었다. 3.1~5.31 국내에서만 7500여명의 조선인들이 학살됐고 1만60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4만6948명이 체포·투옥됐다. 한편 부르주아민족운동지도자들의 기회주의적변절과 수십개 독립군단체들의 세력다툼은 민족해방의 길을 새롭게 밝혀야할 과제를 남겼다. 길림지역에서 학생운동을 통해 항일투쟁을 전개해오던 김일성주석은 1930 카륜에서의 공청·반제청년동맹지도간부회의에서 항일무장투쟁노선·반일민족해방통일전선노선·자주적당창건노선을 제시했다. 자주를 혁명의 원리로, 혁명방식으로 내세우면서 오직 의식화되고 조직화된 인민대중의 투쟁으로써만 민족해방의 위업을 달성할수 있다는것을 천명했다. 일제의 만주점령이 본격화되고, 조선민족에 대한 2중3중의 파쇼폭압이 계속되는 조건에서 김일성주석은 1931.12 명월구에서의 당·공청간부회의에서 반일인민유격대조직과 유격근거지창설을 결정했다. 이는 유격전을 정규전의 보조적수단으로 보던 기존관념에서 벗어난것이었다. 1932.4.25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했고 이를 1934.3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발전시켰다. 철저히 조선민중의 힘에 의거해 조선의 실정에 맞게 혁명을 수행하면서 압도적열세를 극복하고 일제와의 투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933.3 왕재산회의에서 무장투쟁을 국내로 확대발전시킬 방침을 제시했다. 침략전쟁에는 혁명전쟁으로 맞서겠다는 우리민족의 결심은 1937.6.4 보천보에서의 총성으로 울려퍼졌다. 환호하는 민중앞에서 김일성주석은 <거세차게타번지는저불길은놈들의최후를보여주고있습니다.저불길은우리민족이죽지않고살아있으며날강도일제놈들과싸우면승리할수있다는것을온세상에보여주고있습니다.>라고 연설했다. 이어 구시산전투, 간삼봉전투에서의 대승리로 조선인민혁명군의 전투적위력과 불패성을 다시한번 시위했다. 1939.9 나치독일의 폴란드침공으로 2차세계대전이 본격화됐고, 일본이 나치독일과 추축국을 이루며 소련사회주의세력과 미영제국주의세력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형성된 국제적인 반파쇼전선은 항일전쟁에서 우리민족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김일성주석은 1940.8 소할바령에서 조선인민혁명군군정간부회의를 열고 <조국광복의대사변을준비있게맞이하기위한> 역량보존·정치군사간부육성등 전략전술적방침을 확정했다. 항일전쟁의 최후공격에서 김일성주석은 조선인민혁명군의총공격과 전인민적봉기, 소부대와국내무장봉기조직들의배후연합작전의 조국해방3대노선을 제시했다. 1945.8.9 일제에 대한 최후공격명령을 하달하고 대일전쟁을 개시했다. 8.9 총공격명령직후인 8.15 일제가 항복하며 우리민족은 결국 민족해방을 맞이했지만 미군의 남측강점으로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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