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7 항쟁의기관차〉 조국해방전쟁승리와 사회주의로의 전진

1945.8.20 김일성주석은 건당·건국·건군노선을 천명하고 10.10 북조선공산당중앙조직위원회를 건설하면서 혁명의 참모부인 당을 창건하는 문제부터 해결했다. 1946 민주개혁을 실시했다. 1947 사회주의에로의 과도기에 들어갔다. 인민민주주의정권수립후 일제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혁명으로 중요산업을 국유화하며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인민정권노선아래 친일파·봉건지주를 제외한 전체주민들을 인민위원회로 결속시켰다. 미제의 코리아남반부점령으로인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문제는 복잡해졌다. 북에서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철저히 수행하는 한편 미제와의 전쟁을 내다보고 해방직후부터 자위적무장력을 갖추기 위한 병기공장을 건설할 계획을 제시하고 1947.2.8 조선인민군을 창건했다. 미제의 침략적대외정책에 따라 코리아전이 결국 발발했고 조선은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을 상대로 하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전략전술적우위와 인민군대의 결사항전으로 전쟁주도권을 쥐었다. 북반부의 <혁명기지>를 지키면서 정전협정을 관철했다. 전쟁으로 온나라가 폐허가 된 조건에서 미제는 조선이 100년이 걸려도 다시 일어서지못할것이라고 단언했지만 조선은 보란듯이 전후복구건설의 3개년인민경제계획을 빠르게 성과적으로 완수했다. 조선은 스스로 <우리의국가사회제도는전체인민의정치사상적통일을정치적지반으로하고사회주의적생산관계와자립적민족경제를경제적기초로하고있다>고 밝히고있다. 전후복구건설시기 김일성주석은 자립적민족경제건설노선인 중공업우선경공업·농업동시발전노선을 제시하고 견지했다. 조선은 소련을 비롯한 여러사회주의나라들과 교류하면서도 자기나라의 자원과 자체의 기술에 철저히 의거했다. 사상에서의 주체확립을 위한 투쟁이 중요했다. 항일대전을 조선민족자체의 힘으로 수행했듯이 독립국가건설도 나라의 실정과 민중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수행하겠다는 김일성주석의 의지는 1955.12.28 <사상사업에서교조주의와형식주의를퇴치하고주체를확립할데대하여>의 연설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이시기 소련에서 스탈린서거후 흐루시쵸프가 권력을 찬탈했다. 1956.2 소련공산당20차대회에서 <평화적공존>·<평화적이행>을 주장하고 <스탈린격하>책동을 악랄하게 감행했다. 소련의 수정주의적변질과 사회주의원칙성을 둘러싼 중국·소련간 갈등은 국제공동주의진영내 내부모순을 증폭시켰다. 조선은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의 원칙을 철저히 세워나갔다. 1956.4 조선노동당3차대회에서 전후복구건설을 일단락짓고 사회주의기초건설완성을 위한 5개년인민경제계획의 과업과 방도를 밝혔다. 12월전원회의에서 <증산하고절약하여5개년계획을기한전에넘쳐완수하자!>는 전투적구호를 제시했다. 1956~58 자원성에 기초한 사회주의적생산관계개조실시로 계급적차별을 초래하는 사적소유형태를 정리했다. 강선노동계급을 필두로 1959.3 천리마작업반운동을 발기했고 온나라가 천리마의 기세로 들끓었다. 1956부터 14년간 사회주의공업화를 완수했다. 한편 1962 쿠바미사일위기를 계기로 제시된 당의 경제국방건설병진노선에 따라 사회주의공업화에서 경제건설과 함께 국방건설은 결코 소홀히 되지않았으며 오히려 앞섰다고 평가된다. 전쟁이후 평화를 위한 최선의 노력과 별개로 무장력강화는 언제나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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