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은 1차세계대전배상금문제로 화폐발행량을 8.5배 증가시킨 결과 1923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마르크화의 가치는 폭락하고 금융계는 대혼란에 빠졌다. 독일경제가 바닥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확인한 미국정부는 대량의 외국자본을 독일로 흘려보내면서 독일경제는 빠른 회복세를 나타냈다. 샤흐트는 1923 제국은행총재로 취임해 마르크화를 안정화시키는데 역할을 했다. 한편 나치당은 1928.5 총선에서 2.6%(12석)의 최저득표율을 보이는등 군소정당에 불과했다. 1929 세계경제대공황이 터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독일경제 역시 급속도로 하락하기 시작해 실업자가 1930 200만명, 1932 600만명으로 급증하며 가용노동자의 1/3이 실업자로 전락했다. 바이마르공화국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계금융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공산당으로 기우는것을 막아야했고 나치당과 히틀러를 주목하게 된다. 히틀러는 나치당의 경제이론가 페더를 경제·금융스승으로 삼았다. 페더는 <국가는반드시통화공급을장악하는권력을가져야한다>·<중앙은행은절대개인의수중에넘어가서는안되며국유화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이 중앙은행을 장악하게 되면 이자를 비롯한 모든 이익을 국가와 공공의 행복을 위해 사용하는것이 아니라 개인이 소유한다고 봤다. 히틀러는 페더에 의해 모든 문제의 중심에 금융이 있으며 독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진정한 <주재자>가 바로 금융을 통제하는 세력집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으며 1933집권후 페더가 아닌 세계금융자본을 업고있는 샤흐트를 제국은행총재로 임명하고 1934 경제장관으로 세워 막대한 자금을 투자받는다. 샤흐트는 금과 외화보유량이 바닥난 상황에서 금본위제를 탈피해 갖고있는 자산이나 노동력을 기준으로 화폐를 발행하고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대량의 국채를 발행했다. 아우토반과 같은 대규모공공사업을 실시해 고용률을 높이며 확실한 경기부양효과를 이뤄냈다.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수입관세를 올려 수입을 철저히 제한하고 국내생산제조업을 보호했다. 나치정권은 노동조합을 해산시켜 전국통일조합인 <노동전선>을 만들고 기존노조활동을 철저히 탄압하는 한편 1934.1 국민노동통제법을 공포하며 노동자의견을 수렴해 기업과 조정하는 노사를 1원적인 조직으로 만들며 실업문제를 해소해갔다. 독일이 본격적인 재무장에 들어선 1938 군수분야고용이 늘면서 완전고용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실업자수는 50만명이하로 떨어진다. 히틀러가 전쟁을 시작하려고했을때 샤흐트는 이를 반대했다. 히틀러는 샤흐트를 1937.11 경제장관에서 해임하고 1939.1에는 중앙은행장에서도 파면시키며 중앙은행을 국유화했다. 히틀러는 1933~39 6년간 거액의 수익을 미끼로 수많은 자본가들을 유치하며 전쟁을 준비했다. 탐욕에 눈이 먼 이들은 열심히 전쟁무기를 제조했다. 듀폰재단및화학회사, 록펠러재단, 모빌석유회사, 모건재단및산하전화전신회사, 포드자동차, IBM등 60개이상의 미국기업들이 망라됐다. 1937~38 포드(포드자동차)·왓슨(IBM)·무니(GM)에게 히틀러나치의 철십자훈장이 수여됐다. 1940.7.25 훈크경제장관은 마르크를 유럽공동화폐로 하는 <유럽신경제질서>를 발표한다. 케인즈는 이에 대해 <독일이나추축이란말만영국으로바꾼다면단연코훌륭한내용이다.그것은정확하게우리자신이그것을실현시키기위해노력해야한다.>고 극찬했다. <유럽신경제질서>는 나치독일이 연합국에 패하며 실현되지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