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 항쟁의기관차〉 민주주의를 실현한 독재정치

프랑스는 1302 필리프4세가 교황과의 분쟁에서 자기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각신분의 대표들을 소집한 3부회(귀족·성직자·평민)의 역사가 있다. 3부회의 주요기능은 국왕의 세금징수에 대한 동의였다. 3부회는 1614 이후 175년간 열리지않다가 1789 세금징수문제로 국왕 루이16세에 의해 다시 소집됐다. 평민대표인 부르주아들이 머릿수에 따른 표결을 주장하면서 3부회는 사실상 해산됐고 <프랑스혁명>으로 이어진다. 18세기후반 절대왕권제의 지지자였던 귀족들의 대부분도 재정적곤란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농민을 더욱 착취했으며 농촌을 거의 황폐화시켰다. 견직물공업의 중심지였던 리옹에서는 직조공들의 파업이 연이어 일어났다. 찰스1세의 처형을 경험했던 영국의 정치철학자 홉스와 로크등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루소와 볼테르등으로 이어져 프랑스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당시사회제도(구체제·앙시앙헤짐)에 대한 반발심이 퍼져갔다. 1789 프랑스혁명에서 왕당파와 국민회의파간, 국민회의파내의 대상공업부르주아의 이익을 옹호한 지홍당파(우익)와 소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한 자코뱅파(좌익)가 대립했다. 1792 프랑스혁명은 프랑스혁명에 반대한 오스트리아-프로이센동맹과의 혁명전쟁으로 전화됐다. 지홍당파는 반혁명폭동의 배후인 전제세력을 전쟁으로 청산할수 있다고 봤다. 호베스피에흐는 전쟁을 반대했다. 8.10 적과 내통하는것으로 여겨졌던 루이16세국왕일가는 유폐됐다. 9.20 혁명군은 전투에서 승리하며 프로이센군을 국경밖으로 밀어냈다. 의용병의 대다수는 상퀼로트라고 불리는 무산계급의 하층민이었다. 자코뱅파는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국민공회가 소집되고 공화정이 선포됐다. 국민공회는 입법의회를 해산하고 재산과 소득에 상관없이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진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로 구성됐다. 국민공회에서 다수는 무소속의 농민들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수가 많은 지홍당파가 권력을 장악했다. 루이16세는 혁명재판에 회부돼 1793.1 처형됐다. 6.2 혁명에 대한 입장이 확고했던 자코뱅파가 지홍당파를 추방하고 권력을 장 악했다. 1794.2.4 국민공회는 식민지를 포함한 전지역의 노예제폐지를 결의했다. 7.27 혁명이 계속되는것을 반대한 세력은 호베스피에흐를 탄핵하고 7.28 처형한다. 1795 국민공회는 총재정부를 수립한후 해산됐다. 프랑스의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일시적이었지만 보통선거권과 노예제폐지등 부르주아민주주의원칙에 가장 부합했다. 혁명은 호베스피에흐의 독재로 완성됐고 그가 처형된후에는 혁명도 끝났다. 그의 혁명적관점과 불굴의정신, 도덕적청렴성으로 그는 <부패하지않는(l’Incorruptiblel)>이라고 불렸다. 부르주아민주주의정치는 새로운 시대를 열며 전세계에 전반적으로 구현됐지만 정치·경제적차별을 없애지못했으며 계급구조를 바꾸는 혁명은 독재 없이 불가능하다는것을 확인시켜준다. 이는 지도이념과 사회계급적지반을 가진 당에 의해서 수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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