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영국에서는 절대군주제에 기초한 봉건통치배들의 학정이 극도에 달하고 사회적모순이 첨예화되면서 혁명의 계기가 형성됐다. 1640 국왕 찰스1세(재위1625~49)는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국교인 성공회를 강요하는 전쟁을 단행, 전비조달을 목적으로 잉글랜드의회를 소집했지만 반발이 컸다. 전쟁패배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된 찰스1세는 의회를 재소집했으나 의회는 국왕편에 선 귀족들의 처형과 의회의 정기적개회, 의원들의 동의없는 의회해산과 세금징수의 금지를 요구했다. 의회는 이어 프랑스출신의 왕비를 카톨릭신자들의 반란과 연관이 있다며 탄핵을 요구하고 찰스1세의 실정을 비판한 대간주를 채택하는등 국왕을 압박했다. 찰스1세는 자신을 반대한 의원들의 체포를 위해 근위병을 동원하며 반발했고 내전으로 이어졌다. 의회파인 크롬웰(1599~1658)의 철기군에 의해 찰스1세는 패퇴를 면치못했고 결국 체포됐으며 1649 대역죄로 선고받아 처형됐다. 이후 의회는 공화정을 선포했다. 1658 크롬웰의 사망후 공화정은 붕괴됐고 이들을 견제하려던 세력에 의해 프랑스에 도피중이던 찰스2세가 1660 잉글랜드의 군주가 됐다. 1679 의회에서는 찰스2세의 후계자로 동생 제임스2세의 왕위계승문제가 불거졌다. 프랑스인어머니밑에서 카톨릭신자로 자란것이 논란이 됐는데, 그의 왕위계승을 지지한 토리당(Tory Party)은 지주계급으로서 왕권쪽에 섰고 이를 반대한 휘그당(Whig Party)은 귀족과 부유한 중산층으로서 왕권과 대립했다. 1685 제임스2세가 즉위하고 아들을 낳게 되자 두당파간의 대립은 더욱 첨예화됐다. 갈등은 이해 제임스2세의 사위 네덜란드통령 빌럼(윌리엄)3세와 국교회교도였던 딸 메리2세가 즉위하는 <명예혁명>으로 일단락됐다. 이는 양당의 타협의 결과였다. 1714 앤여왕사후 하노버왕가의 조지1세가 휘그당의 지지를 받 아 왕위를 계승했다. 조지1세는 1721 휘그당의 월폴에게 정권을 주고 국정을 맡겼다. 이렇게 첫총리가 나오면서 영국정치의 의원내각제형태가 마련됐다. 영국봉건왕조의 권력분쟁은 종교를 구실로 이뤄졌지만 각각 왕권과 부르주아·신귀족의 각기 다른 사회계급에 기초한 갈등이었다. 이는 중세봉건시대의 정치가 종교에 기반을 둔 군주정치였다는것을 의미하며 새로운 시대로 나갈수밖에 없는 자체의 내부갈등을 보여준다. 그과정에 홉스·로크의 <사회계약론>이 등장했다. 17~18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노동계급이 형성됐다. 토리당은 1834 보수당을, 휘그당은 1859 자유당을 수립했다. 1832 1차선거법의 개정은 귀족과 중산층(부르주아)에는 유리했으나 노동자들에게는 여전히 불리했다. 1838 노동자들은 신구빈법등 반노동자적인 정책을 반대하며 성인남성들에 대한 보통선거와 의원의 재산자격폐지등 6개항으로 구성된 인민헌장(People’s Charter)을 작성하고 이의 제정을 요구하는 정치운동으로 차티스트운동을 벌였다. 노동자들의 정치운동은 1848 혁명에 대한 폭압국면에 들어서면서 억압됐다. 1867·84 2·3차의 선거법개정으로 선거권은 확대됐다. 1884 페이비언협회가 설립되고 1900 노동당이 창당됐다. 1920년대 이르러서는 노동당이 자유당을 제치고 보수당과 양당구도를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