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는 1848 부르주아혁명이 실패했지만 프랑크푸르트국민의회와 프랑크푸르트헌법등 입헌군주제형태의 개혁이 진행됐다. 1862 독일제국은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선임했으며 비스마르크는 철혈정책을 추진했다. 1863 라살주의자들의 독일노동자협회가 결성됐다. 1864 맑스의 국제노동자협회가 영국런던에서 발족했다. 1865 인터내셔널독일지부가 설립됐으며 1869 독일최초의 대중정당으로 사회민주노동자당이 결성됐다. 1871 부르주아들이 융케르트(봉건귀족)들과 타협해 통일독일을 수립하면서 독일제국의 제국의회가 설치되고 반동지배계급의 정당으로 보수당·제국당·국민자유당이 나왔다. 사회민주노동자당은 1875 고타강령을 채택하면서 사회주의노동자당으로 개칭했다. 독일제국은 1878 <사회주의자탄압법>을 통과시켜 이들을 불법화했다. 1890 <사회주의자탄압법>이 폐지되자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민주당을 결성 해 합법적활동을 벌여나갔다. 이는 개량화의 결정적계기로 작용했다.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했지만 기회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 철저히 혁명적이지않았고 그들과 사상적뿐아니라 조직적으로도 결별해야한다는것을 이해하지못했다. 독일사민당은 1차세계대전에 제국주의독일의 전쟁예산을 승인하면서 자국부르주아정부에 들어가고 제국주의전쟁을 옹호했다. 그들은 전세계노동계급의 이해관계가 같다는 사상을 부정하고 말았다. 전쟁의 발발과 함께 공산주의적당들간의 연계는 끊어지고 2인터내셔널은 존재를 마쳤다. 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은 1차대전후 그들의 <인터내셔널>을 조직하고 반혁명적활동을 이어갔다. 1915 사민당내에 원칙적인 공산주의자들은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하고 임시전쟁예산승인을 반대한 당원들은 독립사회민주당으로 분당했다. 1918 혁명분위기의 고조에 독일황제는 <의회제군주제>를 명시한 헌법개정을 하지만 혁명의 발발을 막을수 없었다. 황제는 망명하고 제국의 총리는 총리직을 사민당의 에버트에게 넘겼다. 스파르타쿠스단은 혁명적원칙을 고수하며 독일공산당을 창당한다. 1919.1 봉기가 시작됐으나 1.15 사민당의 에버트정권은 리프크네히트·룩셈부르크등을 학살하며 혁명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29 상대적과잉생산공황을 계기로 진보와 극우 양측의 야당인 공산당과 나치당에 대한 지지가 상승한다. 제1당이 사민당에서 나치당으로 넘어가자 총리에 취임한 히틀러는 곧 나치당1당독재체제의 수립에 돌입한다. 1933 히틀러가 총리에 취임한 후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발생하자 공산당탄압의 빌미로 삼는다. 그직후 치러진 총선에 공산당의원들 일부는 체포된 상태였다. 사민당은 집권과 동시에 혁명세력탄압으로 반동적본질을 드러냈고 극우파시스트당도 공산당탄압으로 집권을 공고화했다. 2차대전이후 독일은 연합군의 군정치하에 동서독으로 나뉘어졌다. 서독에서는 공산당활동이 금지되고 사민당은 1959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실용주의적국민정당>으로 전환을 밝히는 고데스베르크강령을 채택한다. 1990년대에는 소련붕괴 등과 함께 신자유주의화되는 흐름에서 사민당이 <신중간(Neue Mitte)>을 천명하며 우익화되고 2007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민당내 좌파세력이 떨어져나와 좌파당을 결성한다. 독일은 맑스·엥겔스의 조국으로 노동계급의 혁명사상과 혁명적당건설의 진원지였지만 사상논쟁의 주전장이 되면서 개량화의 최전선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