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 항쟁의기관차〉 진정한 공화국으로 가는 길

<위더피플(We the People)>

<주권은국민에게있다>는것은 오늘날 천부인권사상처럼 누구도 침해할수 없는 보편적인 사회적권리로 인식되고있다. 인종·종교·성별등 어떤 차이도 사회적차별의 요인이 되지않는다. 이는 인류역사가 고대노예제, 봉건농노제를 거쳐 민주주의사회로 발전해 오면서 성숙된 가치이자 사상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생과 함께 발전했지만 자본주의와 동일한것은 아니다. 이가치는 불완전하지만 그이전에도 있었고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에도 있다. 2021.1 미국에서 <공화국>과 <제2의독립선언>이라는 말이 회자되고있다. <위더피플(We the People)>, 미국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위더피플은 주권운동의 하나로 미국내에서 일정한 역사를 갖고있다. 위더피플은 우리가 주권자라 는것,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것을 의미한다. 희대의 부정선거논란을 뒤로 하고 조바이든의 대통령취임식이 진행됐다. 바이든정부의 국정운영이 시작되면서 <공화국>이 화두가 되고있다. 공화국은 주권자들이 자신의 대표를 선출하는 정치체제다. 선거제도가 주권자들의 주권을 실현할수 없다고 여겨질때 공화국의 가치는 사라진다.

위더피플, 미국의 건국정신에 새겨진 미국헌법의 첫단어에는 공화국의 의미가 담겨있다. 이가치가 유지되고 실현되기를 바라는 미국민들의 바람이 지각변동을 이뤄낼것인가. 계기는 2020대선이었지만 미국식민지시대 청교도의 기독교정신에서부터 1776 미국독립선언, 1789 미국헌법, <잭슨민주주의>와 링컨의남북전쟁(Civil War), 미연준과 케네디암살등 미국역사주요사건들이 얽혀 미국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미국은 20세기 제국주의유일패권국으로 성장했고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사회주의·민족해방세력에게는 주되는 적국이었으며 자유민주주의국가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다. 2차세계대전에서의 반나치전선의 승리는 사회주의·민족해방세력의 전세계적범위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미국에서 현재 벌어지는 변화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현시대를 가름짓는 중요한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미국은 초대헌법을 절대시해 법조문을 바꾸는 방법으로 개정하지않고 수정헌법을 붙여넣는식으로 시대변화에 맞게 법안을 보완해왔다. 미국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미국인들은보다완벽한연방을형성하고정의를확립하고국내의평온을지키며국방을제공하고일반복지를증진하고우리와자손들에게자유의혜택을누리게하고자하는목적을가지고미국을위해이헌법을제정한다.(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in Order to form a more perfect Union, establish Justice, insure domestic Tranquility, provide for the common defense, promote the general Welfare, and secure the Blessings of Liberty to ourselves and our Posterity, do ordain and establish this Constitution for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식민지시대, 독립전쟁과 건국

유럽식민주의자들이 1492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이후 해적적무역업을 벌여오다가 영국 엘리자베스1세의 위임을 받은 로테이에 의해 1584 노스캐롤라이나해안 로아노크섬에 상륙하고 주변지역을 탐지했으며 근처 지역에 버지니아(엘리자베스1세상징)라고 이름붙였다. 17세기초 제임스 1세명의로 <런던회사>(이후<버지니아회사>)에 북아메리카동해안지역의 식민지배권을 줬다. 특허장을 받은 버지니아회사는 3척의 배에 부를 원했던 200명의 식민주의자들을 태워 버지니아에 파견했다. 이들은 1607 봄 버지니아해안에 도착하고 제임스강가에 제임스타운이라는 거점을 만들어 첫식민지 버지니아를 세웠다. 뒤이어 뉴잉글랜드가 세워졌고 1620 플리머스식민지, 1630 매사추세츠식민지 이어 뉴햄프셔식민지, 1644 로우아일랜드자치식민지, 1662 컨넥티커트자치식민지등을 연이어 건설했다. 영국은 다른 유럽국가들이 원주민을 추방하고 세운 식민지들도 빼앗았다. 네덜란드가 1625 허드슨강 맨하튼섬에 무역거점으로 뉴암스테르담을 만들고 여기를 거점으로 그주변을 포괄한 넓은 식민지 뉴네덜란드를 세웠는데 영국은 1664 함대를 파견해 이지역을 강점하고 영국 찰스2세의 동생 요크공작을 영주로 앉히면서 뉴욕으로 개칭했다. 이즈음 뉴저지식민지도 세워졌다. 1682 펜실베이니아에는 영국퀘이커교도들이 자리를 잡았고 1703 델라웨어, 1729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 1730년대초 조지아식민지가 건설됐다. 미국으로 오는 대신 자유를 얻은 영국의 범죄자들은 조지아에 정착했다. 여기까지가 미국건국당시 헌법에 서명한 13개주다. 플로리다는 1819 스페인으로부터 할양받았으며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는 스페인의 식민지였거나 스페인의 영향하에 있다가 미국·멕시코전쟁후 1848 미국의 영토가 됐다.

영국의 미국식민지는 3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왕령에 의해 지배되는 왕실령식민지다. 왕실령에는 왕이 임명한 주지사(Governor)와 상원의 기능을 하는 카운실(Council)이 있었으며 주지사와 카운실은 왕에 의해 임명됐다. 하원의 기능을 한 어셈블리(Assembly)는 식민지의 자유토지소유자와 노예농장주중에서 매년 선출됐다. 둘째는 영주령이다. 영주령은 영주가 봉건 또는 왕실에 종속된 일반통치권을 부여받아 군주의 지배를 받는다. 세번째유형의 특허식민지는 특허장으로 임명된 정치적법인으로 권한을 받은 사람이 땅을 지배하고 입법권을 가졌다. 이런 지역은 정치적자유가 허용됐으며 특허식민지의 입법부·행정부·사법부에 권한이 나눠진 헌법적계약으로 운영됐다. 영국은 18세기중반에도 오하이오강계곡을 잠재적부의 원천으로 보면서 버지니아오하이오컴퍼니라는 토지투자회사를 설립해 토지허가권과 원주민과의 조약을 담당하게 했다. 오하이오컴퍼니의 활동은 프랑스의 영유권주장으로 영·프전쟁(프렌치인디언전쟁)이 일어나는 계기로 작용했으나 실제는 이지역정착에 성공하지못한채 1776 운영을 마쳤다. 미국민들은 영국의 식민지주민들로서 영국군의 전쟁에 협력하면서 연대의식이 강화됐다. 1754 올버니회의에서 벤자민프랭클린은 <식민지들이개척지방어,식민지확장,원주민문제에공동대응하기위해대회의(Grand Council)에의해통합될필요가있다>고 제안했다. 제안은 조지2세에 의해 거부됐지만 식민지연합의 시작이었다고 할수 있다.

영국은 유럽의 7년전쟁(1756~63)과 북미의 영·프식민지전쟁 (1754~63)으로 전쟁후 재정난에 빠졌고 이를 메우기 위해 미국식민지에 1763선언등 지배권과 조세를 확대·강화했다. 영국군에 의한 <보스턴학살사건>과 새뮤얼애덤스등 <자유의아들들>의 보스턴조직에 의한 <보스턴차사건>이 벌어지고 식민지대표자들로 구성된 1774 필라델피아에서 1차대륙회의 (Continental Congress)가 개최됐다. 회의는 2차대륙회의로 이어졌다. 2차회의에는 12개주(州)외에 퀘벡과 동·서플로리다 등 여러지역에 초대장이 보내졌지만 1차회의 참가지역외에 새로 참가한 지역은 조지아주뿐이었다. 회의의장은 매사추세츠의 존핸콕이 맡았다. 2차대륙회의직전시기 영국군대는 매사추세츠민병대가 숨겨놓은 콩코드의 무기창고를 확보하려하자 렉싱턴·콩코드전투를 벌여 미국독립전쟁이 개시된 상황이었다. 이전투에서 영국군은 패배해 보스턴으로 퇴각하고 식민지군 민병대(패트리어트)는 보스턴포위전을 시작했다. 회의에서는 영국을 상대로 군사동맹을 결성하는것이 주된 의제가 됐고 식민지군대의 총지휘관으로 영·프전쟁에서 지휘관으로 경험이 있던 조지워싱턴이 임명됐다. 화해의 시도로 영국왕에게 보내는 청원서도 채택됐지만 영국왕 조지3세는 받기를 거부했다.

1776 회의에서 독립선언문을 채택했다. 독립선언문은 2차대륙회의의 결의로 프랭클린·존애덤스·토머스제퍼슨을 포함한 5명의대표들에 의해 기초됐다. 독립선언은 계몽주의자들의 자연법과 사회계약론의 사상을 반영하고있다. 생명과 자유, 행복추구권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것은 국민의 권리라고 밝혔다. 독립선언은 존로크의 생명·자유·사적재산권에서 재산권을 행복추구권으로 바꿨는데 이는 개개인의 행복이 다르다는 생각에서다. 미국독립선언문은 1789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인간과시민의권리선언 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et du citoyen)등에 영향을 줬다.

2차회의에서는 1777.11.15 연합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 and Perpetual Union)을 채택했다. 1781.3 13개주의 비준이 완료되면서 대륙회의는 해산됐고 연이어 연합회의가 개최됐다. 1783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전쟁은 끝났다. 연합회의는 외교·군사등에 걸친 권한이 인정됐지만 조세권이 없었으며 13개주는 각주의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하고있었다. 연합회의의 한계, 문제점이 지적되고 연합규약의 개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다. 회의는 곧 헌법을 제정하는것으로 성격이 바꼈다. 미국헌법초안이 만들어졌고 연합회의는 각주에 초안을 보내 비준을 받았다. 각주의 입장이 일치했던것은 아니다. 연방정부의 권한이 강해지는것을 우려하는 주를 설득하기 위해 제임스메디슨은 권리장전을 포함시킬것을 약속했다. 1788.9 연합회의는 미국최초의 대통령선거인단을 구성했고 1789.1.7 대통령선거일을 2.4로 정했다. 미국헌법(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은 1789.3.4 효력이 발생했다. 이날은 대통령의 취임일이기도 했는데 1933 발효된 수정헌법20조에 의거해 취임일을 1.20로 변경했다. 대통령의 당선과 현대통령의 임기만료사이의 기간을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인것으로 알려졌다.

연방정부수립을 옹호한 연방주의자들은 <인디펜던트저널>을 비롯한 뉴욕시의 신문에 연방헌법의 지지를 위한 글을 발표해 헌법의 채택을 위해 활동했다. 이글들을 묶어 <연방주의자 논집(The Federalist Papers)>을 발간했다. 이인쇄물의 글들은 <Publius>라는 동일한 하나의 명의로 발표돼 익명처리됐다. 새로운 헌법은 헌법비준의 주체를 주가 아닌 국민으로 규정했다. 이는 주권을 가진 법적주체가 국민이라는것을 명시한것이다. 이들은 그렇게함으로써 주정부와 대립하지않는 연방정부의 권능을 확립하고자했다. 이들은 파벌에 대해 부정적이었으 며 공화정은 다수의 대표가 서로 경쟁해 한파벌이 전체를 장악하는것을 막아줄것으로 기대했다. 연방정부의 권력을 제한하고 시민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1791.12.15 수정헌법1~10조에 권리장전(United States Bill of Rights)이 포함됐다. 1992까지 총27조의 수정헌법이 채택됐다.

1·2차대륙회의는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됐지만 전쟁과정에서 회의장소가 계속 바뀌면서 독립후 최초의 수도는 뉴욕이 됐다. 1789 워싱턴의 대통령취임식은 당시 연방정부청사로 사용된 뉴욕의 구시청에서 치러졌다. 헌법에는 수도에 대한 규정이 따로 없었지만 1790 의회는 영구적인 미국의 수도를 설치할것을 의결했다. 재무장관 알렉산더해밀턴은 연방정부가 북부주들의 전쟁빚을 넘겨받는 대신 수도를 포토맥강가로 하고 어느주에도 속하지않는것으로 해 모든주의 동의를 얻어냈다. 당시 수도가 되길 원했던 필라델피아의 동의를 얻기 위해 필라델피아를 임시수도로 했다. 1800 연방정부는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으로 옮겨졌다. 이때 워싱턴의 도시인구는 8000명에 불과했다. 영국과의 전쟁당시인 1814 워싱턴은 영국군에 점령당했고 의사당과 백악관을 포함한 많은 정부청사가 불탔다. 소실됐던 정부청사들은 1819 복구됐다. 1871 콜럼비아특별행정구기본법(District of Columbia Organic Act of 1871)에 따라 의회는 오늘날과 같은 구역의 워싱턴DC(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 를 탄생시켰다. 오늘날과 같은 워싱턴DC는 1902 <맥밀란계획>에 의해 디자인됐다. 의회는 워싱턴의 도시관리를 대통령의 권한으로 두었으며 워싱턴시민들에게는 자신을 대표하는 의원이나 대통령을 선거할 권리가 주어지지않았다. 1874 워싱턴DC를 대통령이 임명한 행정관 세사람이 맡도록 법을 개정하면서 워싱턴DC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도시의 대표를 시민의 투표로 선출하지않는 도시가 됐다. 1961 수정헌법23조에 의해 워싱턴 시민이 대통령선거에 투표할수 있게 됐으며 1973 시정부위원 선거도 할수 있게 됐다.

식민지시대의 전통은 성조기에도 남아있다. 13개의 적·백색이번갈아가며 가로로 그어진 바탕에 그리고 왼쪽 위편에 그려진 사각형안에 50개의 백색의 별로 구성돼있다. 13개의 적·백색줄은 미국건국당시 13개의 연방주를 뜻하며 50개의 별은 오늘날 미국의 총연방주의 수를 뜻한다. 13개 주의 적·백색의 가로줄은 동인도회사사기(私旗)의 도안이다. 식민지시대의 식민지불공정무역의 첨병이었으며 독립전쟁발발의 계기였던 <보스턴차사건>의 대상이기도 한 동인도회사의 사기를 그대로 독립전쟁당시 미국독립군의 깃발로 사용했다. 이는 조지워싱턴등 당시 독립전쟁을 이끈 미국지도자들이 지닌 독립정신의 수준을 반영한다. 이는 건국후 미국의 영국에 대한 외교노선에도 드러난다. 미국을 건국한 주류는 영국에서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건너온 이주민의 후손이며 그들자신이 식민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이 단결한것 은 영국의 식민지정책에 대한 반대였던것이지 영국을 부정한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 아니라 독립전쟁이었다.

건국과 내전

건국후 미국은 북미대륙내에 영토확장과 팽창정책을 벌였다. 1783 영국과의 파리조약에서 미국의 영토로 선포한 애팔래치아산맥과 미시시피강사이의 서부, 서북지역에 관심을 돌렸다. 의회는 1784~87 <서부토지처리방법확정을위한법령><오하이오강서북지역통치에관한법령(북서부조례)>을 채택한다. 이른바 <자유의조례>라고 불리는 법이다. 이런 법률을 통해 영토팽창의 근간을 마련했다. 각주의 영유권주장을 기각하고 연방정부가 직접 관리하며 영토내에 새로운 주를 만드는것을 인정했다. 이는 특정주의 권위를 배제하고 영토를 관리하는 전례를 세운것으로 평가된다. 영토확장은 원주민을 이지역에서 추방하거나 학살하면서 토지를 약탈하는 방법으로 이뤄졌다.

유럽국가들이 강점한 지역을 강탈하기 위해 우선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유럽지역에서 전쟁중이던 1803 현미국영토의 1/3에 해당하는 루이지애나를 사들였다. 1810~13 서부플로리다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키고 무력으로 장악했으며 1819 동부플로리다까지 확대했다. 오리건주는 영국과 미국사이의 점령지역의 경계선을 합의하지못하고 양국민들이 여행하고 정착하는것을 허용하는 조약을 맺은 상태에서 미국의 한모피교역회사가 영국의 상사를 합병해 이지역을 대략20년간 다스렸다. 1830~40년대 미국민들의 대이동과 정착이 진행됐다. 이지역을 장악하는데서도 원주민들과의 전쟁과 논쟁이 멈추지않았다. 1848 오리건은 준주가 됐고 오리건시티가 준주의 수도로 됐으며 북부경계는 1853 워싱턴준주가 성립될때 확정됐다. 1859 33번째주로 미연방에 가입했다. 미국은 텍사스를 차지하기 위해 먼저 1836 텍사스가 멕시코로부터 독립해 공화국을 선포하게 했다가 1845 미국의 한개주로 병탄했다. 이로인해 1846 미국과 멕시코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1848.2 조약을 체결하고 미국은 멕시코영토의 절반이상에 달하는 지역을 강탈했다. 1840년대말까지 미국영토는 13개주로부터 48개주로 확대팽창됐다.

미국은 이주민인 식민주의자들이 세운 식민지국가로부터 출발해 사회발전의 정상적인 길을 걸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국가를 수립한 처음부터 침략적인 자본주의국가로 잔인한 자본의 시초축적에 의거해 나라의 발전을 도모했다. 이를 민주주의·자유·인권으로 분식해준것이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었다. 중세봉건의 절대군주제·신분제·종교적지배체제를 타파하는 민주주의혁명은 이들을 새롭고 선진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이들은 민중의 봉기를 두려워했다. 영국혁명의 왕권세력과 신흥부르주아세력의 타협이나 프랑스혁명의<테흐미도흐반동>도 모두 마찬가지였으며 <셰이즈의반란>을 제압한 미국 독립도 다르지않았다. 다만 미국은 돌아갈 왕권이 없었다. 이들에게는 오직 영토팽창뿐이었다. 이들은 미국을 발전시키려면 이민자들을 많이 받아들여 인구를 늘리고 많은 인구를 수용하려면 영토를 확장해야한다고 봤다. 미국 영토의 확장을 기독교의 확대, 미국식자유·민주주의의 확대로 인식했다. 팽창주의자들은 공화국의 자격있는 모든 국민은 전체북미대륙에서 민주적자치정부를 꾸릴수 있는 권리가 있으므로 증가하는 국민에 부응해 영토확장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통곡의길>(원주민이주법, 원주민강제이주정책)에서 보여지듯 자격있는 국민에 원주민·흑인·중남미혼혈인은 포함되지않았으며 그들은 무자비한 학살과 학대 그리고 착취의 대상이었다.

제퍼슨은 미국을 <자유를위한제국>이라고 여겼으며 제국은 캐나다를 포함한 아메리카·쿠바까지 가능하다고 봤다. 매디슨대통령시기(1809~17) 민주 공화당에서 팽창주의의 논리에 대해 <명백한운명>·<팽창의천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845 뉴욕시의 저널리스트 존오설리번은 서부로 계속 팽창해나아가 대륙전체로 확대하는것은 미국의 <명백한운명>으로서 나날이 증가하는 수백만인구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신이 베풀어주신것이라고 소개했다. 이해 12.2 제임스포크는 미의회에 먼로독트린은 강화돼야 하며 미국은 더 활발하게 서부로의 팽창을 계속해야한다고 언급했다. 먼로주의는 1823 제임스먼로가 의회일반교서에서 유럽열강의 아메리카대륙, 미국·멕시코등 주권국가에 대한 간섭을 거부하고 대신 미국은 유럽열강간 의 전쟁에 대해 중립을 지키기로 한 내용을 가리킨다. 당시 스페인의 예속에서 벗어난 라틴아메리카나라들에 대한 지배를 둘러싸고 유럽열강들과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환경속에서 나왔다. 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열강의 전쟁은 미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것으로써 이는 아메리카대륙에 대한 미국의 <독점적지배>를 선언한것이다. 먼로주의는 아메리카대륙에서의 팽창주의와 그외지역에서의 고립주의라고 할수 있다.

당시 <서부개척> 즉, 서부로의 팽창은 내적으로는 노예주(州)의 확장을 의 미했다. 1820 노예주인 미주리주를 연방에 편입하면서 메인지방을 <자유주>·비노예주로 하고 미주리는 노예주로 하되 미주리주의 남부경계인 북위 36°30’이북에는 노예주를 설치하지않을것과 비노예주와 노예주의 수를 동수로 유지할것등을 합의한 <미주리타협>이 이뤄졌다. 그러나 남부노예주들 은 수시로 그것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텍사스합병과 이에 따른 미국· 멕시코전쟁으로 영토확장이 이뤄지면서 노예주가 더욱 늘어나는 양상을 보이자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이 고조됐다. <1850타협>으로 무마되는듯했으나 대립은 사라지지않고 논란은 증대됐다. 1854 공화당의 창당은 노예주가 북부로 확대되는것을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 이뤄졌다. 공화당은 자유주의와 반노예주의를 내세웠고 경제재편을 통해 안정적인 재정운용을 요구했다. 공화당후보 에이브러햄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노예주들은 전쟁을 준비하면서 미연방에서 탈퇴하고 아메리카연합국을 선언하는데로 나아갔다. 남북전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고 미연방이 깨지는것을 막아냈다. 당시 흑인노예의 해방은 매우 낮은 수준의 권리를 쟁취한것이었지만 분명히 새로운 단계로의 전진이었으며 근로민중의 주권확립으로 나아가는 방향이었 다. 그러나 무엇보다 전쟁에서 북부의 승리는 자본주의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는것에 자본가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이후 미국사회를 또다른 차원의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해외팽창과 제국주의전쟁

미국은 서부로의 영토팽창이 거의 끝나갈 무렵 즉 산업자본주의시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해외침략에 나섰다. 19세기말 20세기초 미국은 아메리카대륙을 소유해야하며 전세계를 통제해야한다고 하면서 극동·태평양지역·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침략, 진출을 강화했다. 제국주의로의 이행시기 미국의 대외노선은 여전히 유럽에는 고립주의, 라틴아메리카에는 먼로주의·범아메리카주의·곤봉정책(Big Stick Diplomacy), 아프리카에는 <개발>·<진보>구호, 아시아에는 <문호개방>정책을 내세웠다.

미국은 중국의 아편전쟁시기(1차1839~42) 영국을 적극 지지원조했다. 아편전쟁이 끝나고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1844.2 중국마카오에 4척의 군함을 보내 위협하고 그해 7월 <청미통상조약(망하조약)>을 체결했다. 중국의 5개항에서의 <무역의자유>·치외법권·최혜국대우특권을 보장받았다. 또 1858 <천진조약>을 강요했다. 미국은 <문호개방>의 간판아래 봉건세력을 지원하고 그들을 통해 자신들의 이권을 보장받고 침략의 지반을 강화 하려했다. 1853.7 4척의 미국함선이 일본도쿄만에 침입해 <국서>를 접수할것을 강요했다. 1854.2 미국함선은 대함대를 이끌고 돌아와 무력시위를 하며 위협하고 3월 <일미화친조약>을 체결했다. 1858 보다 예속적인 <일미우호통상조약>을 강요해 일본을 반식민지로 만들었다. <조선개방안>은 1845.2 미하원에 상정됐으나 아직 힘을 갖추지못한 조건에서 실행하지못하다가1866.7 <제네럴셔먼>호를 대동강에 침입시켰다. 몇차례의 함 선진출이 패배로 끝나자 미국은 일본을 내세워 조선에 대한 침략목적을 실현하려고 했다. 일본이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후 일본의 알선으로 미국은 1882.4 <조미조약>을 강요하고 철도부설권·목재채벌권·공장설립권·광산탐사권등 이권을 강탈하며 금·은을 약탈했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밀약등 일본의 조선강점을 지지하는 정책으로 넘어갔다.

미국은 태평양횡단의 전략거점을 완성하기 위해 1867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와 알류샨열도를 사들이고 하와이·필리핀·사모아를 강점해들어갔다. 하와이에 대해서는 1875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고 1893 <하와이공화국>수립에 개입했다. 1898.8 하와이는 미국에 병합됐다. 비슷한 시기 사모아의 동부지역을 강점해 식민지로 편입시키고 1900 해군기지를 설치했다. 동부사모아는 미국의 식민지로 주민들은 시민권이 없으며 미하원에 대표를 보내지만 표결권은 없다. 서부사모아는 20세기초 독일의 지배를 받았는데 2차대전후 뉴질랜드의 식민지가 됐다가 1960년대 영연방국가로 사모아독립국을 수립했다.

1898 미국은 필리핀·괌도를 강점하기 위해 필리핀을 식민지배하고있던 스페인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미국은 아시아의 필리핀·괌도, 카리브해의 쿠바·푸에르토리코를 지배하려했다. 1898.2 미국은 아바나항구에서 미국군양함<메인>호를 폭파하고 그책임을 스페인측에 씌우며 대대적인 반스페인소동을 벌였다. 1898.4 미국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1898.12 미국과 스페인은 파리에서 조약을 체결하고 스페인의 쿠바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게 하고 푸에르토리코·서인도제도의여러섬들·마리아나제도의괌도·필리핀을 미국의 독점적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는 미국이 벌인 첫제국주의식민지재분할전쟁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아메리카인을위한아메리카>를 내세운 미국은 1889 워싱턴에서 범아메리카회의를 열고 <협조의강화>라는 미명하에 관세동맹·화폐동맹·아메리카은행등을 구성하며 미국의 입장을 관철했다. 미국은 범아메리카주의의 허울을 쓰고 라틴아메리카 여러나라의 내정에 직접 개입해 무력간섭을 벌이고 군사정변등을 일으켰다. 미국은 파나마운하를 차지하기 위해 작전을 벌였다. 콜롬비아의회가 운하건설권과 관리권을 미국에 주는것을 거부하자 1903.10 파나마지역을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하게 해 파나마공화국이 수립됐으며 파나마운하에 대한 조약을 체결하고 영구조차지로 규정했다. 20세기초 시어도어루스벨트가 표방한 라틴아메리카정책은 <곤봉정책>으로 개입주의노선이다.

19세기말20세기초 미국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단계에 들어서고 미국의 제국주의가 무르익은 시점 당시 스페인과의 전쟁과 파나마운하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과제가 제기됐다. 시어도어루스벨트는 1898 스페인과의 전쟁이 선포되자 국방부해군담당차관보를 사퇴하고 의용기병대를 조직했다. 그는 쿠바의 케틀힐전투·산티아고전투에서 스페인군을 격퇴해 국민적영웅이 됐다. 전쟁후 시어도어루스벨트는 공화당후보로 뉴욕주지사
에 당선됐고 1900 주지사를 사퇴하고 윌리엄매킨리대통령후보의 부통령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1901 매킨리가 암살당하자 시어도어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됐다. 시어도어루스벨트는 중남미에 대한 유럽의 지배를 막기 위해 중남미개혁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가쓰라·태프트밀약을 추진한미국대통령도 시어도어루스벨트다.

국내문제에서는 독점자본의 폐해가 나타나면서 이에 대한 수습책이 나오던 시기였다. 시어도어루스벨트의 정책은 허버트크롤리의 신국민주의와 연결된다. 신국민주의는 <부유한교양계급이주도하는중앙정부가사회문제에적극적으로개입해야한다>는 해밀턴주의와 <개인적자유의보장을위해작은정부와분권적참여가필요하다>는 제퍼슨주의의 절충으로 루스벨트는 독점제한·노동자보호·사회정의·사회복지, 그리고 이를 위한 연방의 개입을 강조했다. 크롤리는 이를 진보적민주주의라고 칭하고 자본주의의 점진적개선을 주장했다. 반면 미국의 팽창주의·개입주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단계에 이르렀다. 파나마운하를 통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고 양쪽에서의 패권의 유지가 미국의 목표로 됐다. 1904 시어도어루스벨트는 <루스벨트귀결 (Roosevelt Corollary)>에서 미국이 영토를 새롭게 획득하지 않겠지만 채무를 이행하지않거나 과오·무능, 문명사회에서 멀어진 국가에 대해서는 미국이 <세계경찰>로서 간섭하겠다고 밝혔다. 1900년대초 1차세계대전을 앞둔시기 제국주의열강의 군비경쟁이 심화되는 한편 미국은 대서양을 지배하는 영국을 견제하고 태평양을 지배하기 위해 해군을 본격적으로 준비시켰다. 이시기 미국은 실질적인 제국주의단계에 진입했다고 분석된다.

제국주의 미국

제국주의국가간의 식민지재분할전쟁이었던 1차세계대전에서 미국의 기본입장은 유럽의 전쟁에 개입하지않는것이었다. 미국은 고립주의와 중립노선으로 양측에 전쟁물자를 대주면서 실익을 챙겼다. 전쟁이 끝난후 우드로윌슨은 국제연맹의 창설을 제안했다. 이는 제국주의열강들이 상대적균형을 유지해 발전이 뒤늦은 미국이 앞선 다른나라들보다 해외팽창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며 자신을 <평화>의 수호자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있었다. 윌슨의 1918 민족자결주의도 1913 레닌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민족강령을 채택하고 1917 러시아사회주의혁명이 승리한 조건으로 이를 의식하지않을수 없는 처지에서 비롯된것이며 앞선 제국주의국가들의 식민지배를 약화하고 미국의 식민지배를 확장할수 있는 하나의 요인으로 될수 있었기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국제연맹에 참가하지못한다. 물론 미국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국제연맹의 모든 사업에 개입했다. 소련은 제국주의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1934.9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그러나 소련·핀란드전쟁을 구실로 국제연맹에서 제명시켰다. 결국 국제연맹은 2차대전을 앞둔 시기 파쇼국가들의 침략과 전쟁정책을 묵인조장하는 국제기구로 전락했고 파쇼국가들이 침략전쟁으로 본색을 드러낸후 사실상 붕괴됐으며 2차대전기간에는 활동이 중단됐다.

1921.11~1922.2 미국의 제안으로 워싱턴회의가 개최됐다. 회의에는 미국·영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중국·네덜란드·벨기에·포르투갈대표와 영국령인도·영국자치령대표들이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미국·영국·프랑스·일본사이에 <태평양섬들의상호불가침조약>이 체결됐다. 이조약에 의해 영일동맹의 효력이 상실하며 미국의 지위가 높아졌다. 1922.2 <해군군비제한에관한조약>이 미국·영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 5개국사이에 체결됐다. 주력함대의 t수의 비례와 최대배수량등을 규정하고 미국과 영국은 E110°로부터 동쪽의 태평양상의 섬들에 새로운 기지를 창설하지않는다는 의무를 정했다. 회의결과 미국은 영국과 동일한 규모의 해군력을 보유 할수 있게 됐다. 또 회의에서는 <중국의영토상및행정상독립원칙을인정할데관한조약>이 체결됐다. 조약에서는 중국의 <독립>·<영토완정>에 대해 성문화했으나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는 못했다. 일제가 중국에 강요한 <21개조요구>를 폐기하고 <문호개방>의 원칙을 선포함으로써 일본의 독점적지위를 없애고 미국을 비롯한 다른나라들의 침략의 길을 열어줬다.

워싱턴회의에 의해 1차대전후 극동과 태평양지역에서 열강간의 세력범위와 식민지의 재분할이 어느정도 확증됐으나 모순과 대립은 해소되지않았다. 미국은 일본에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며 불만을 표시했고 일본은 회의후 곧 회의결정을 재검토했다. 이때부터 일본·미국, 일본·영국, 일본·프랑스등 열강들사이의 모순·대립은 가속화됐다. 1930 해군군비제한조약의 만기를 앞두고 영국의 제의에 의해 런던에서 새로운 회의가 개최됐지만 프랑스·이탈리아는 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다투다가 탈퇴했고 1936 다시 만기를 앞두고 열린 회의에서는 일본이 미국·영국과의 동등한 비율을 요구하다가 탈퇴하면서 회의는 결국 결렬됐다. 열강들사이에서 조절하려는 노력은 그들사이의 모순으로 실현될수 없었다.

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일본·이탈리아가 패망하고 영국·프랑스는 심하게 약화됐다. 미국은 본토가 공격받지않아 산업에 타격을 받지않고 오히려 전쟁기간 군수산업을 대대적으로 확장해 군수물자공급으로 폭리를 취했다. 미국은 2차대전후 자본주의국가중 최대채권국이 됐으며 미국독점자본은 세계자본주의경제에서 첫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미국은 1948 자본주의나라들의 공업생산에서 53.4% 금보유량의70%를 차지했다. 미국은 전후 어떤 나라보다 많은 재정경제적잠재력을 가지고 다른나라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미국은 군사적으로도 가장 우위를 차지했다. 함대와 병력수에서 미국대 영국은 1939각각 1대1이었다면 1952 4대1과 3.5대1로 미국이 우세해졌다.

2차대전후 1947.3 해리트루먼은 공산주의확대의 저지를 위해 자유·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소수의 정부지배를 거부하는 세계여러나라에 군사·경제원조를 제공하겠다고 밝히면서 개입주의팽창야욕을 드러냈다. 미국은 루스벨트의 말처럼 영토를 확장하지는 않았지만 신식민주의의 간접통치방식으로, 중앙정보국을 창설하고 방대한 기구·권한, 거미줄같은 정보망을 갖추고 국내의 민주역량을 탄압하는 한편 세계곳곳의 군사·정치·경제적개입을 벌여 정변과 와해책동등 미국의 개입주의정책을 실행하고있다.

미국은 2차세계대전이후로 전세계적범위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왔다. 전쟁직후 중국내전에 장개석을 지원했으며 1950 코리아전쟁에는 직접 참 군했다. 인도차이나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퇴한 뒤로 베트남에 미국이 들어가 정치군사적으로 개입했으며 1964 통킹만사건을 조작하고 베트남전쟁을 도 발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은 비난의 대상으로 되면서 국내·국제적으로 고립됐다. 미국은 냉전시기이래 일본·남코리아·독일등 세계주요거점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소련과 사회주의세력을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군사력을 증강시켰으며 다른나라의 내정에 간섭해왔다. <평화적이행전략>으로 소련을 비롯해 사회주의국가에도 침략적이고 파괴적인 내부와해를 획책했다. 북코리아에 대해서는 고립압살정책을 실시하고 미군정이래 코리아에 대한 침략적인 핵공격계획을 추진했으며 2012 오바마정부에서는 <참수작전>까지 수립·추진했다.

소련붕괴이후에도 미국은 1990년대초 극동·중동에서의 2개전장에서 동시승리전략을 추진하며 끊임없이 전쟁책동을 감행하고있다. 특히 <9.11테러> 이후 <테러와의전쟁>을 조작해내고 전쟁정세를 계속 이어가려했다. <대 살상무기>를 이유로 이라크 후세인정권을 전복하고 증거와 관계없이 사담 후세인을 미국으로 데려와 처형했으며 리비아의 지도자 무아마르알카다피를 살해했다. 미국은 역사적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현재까지도 가장 많은 전쟁을 하고있는 호전국가로 됐다. 오바마정부는 ISIS테러집단을 조작했고 시리아내전을 유도해 21세기 중동지역에 고향을 등질수밖에 없는 수백수천의 난민을 초래했다.

경제명맥을 장악한 금융자본집단

자본주의사회는 자본의 사적소유에 기초한 사회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의 목적은 이윤이다. 사람의 인격도 돈에 의해 평가되며 돈없는 사람은 멸시받는다. 맑스는 <자본론>을 집필하며 자본과 그운동을 연구했다. 맑스를 계승하는 자본주의이론이 레닌의 <제국주의론>이다. 레닌은 은행자 본과 산업자본의 결합으로 금융자본이 형성되고 금융자본의 금융과두정이 실시된다고 논증했다. 자본주의는 봉건에서 태내로부터 발생해 발전해 왔다. 자본은 화폐의 형태를 가진다. 은행자본은 화폐와 화폐의 운동을 통해 산업자본을 장악하고 금융자본으로 발전한다. 미국에서 최대이윤을 추구하는 금융자본은 화폐를 장악하는것으로 경제를 장악하고 더 큰 이윤추구를 위해 국가권력을 동원하는것이 금융과두정이다.

미국식민지시대 1690 매사추세츠는 군대비용충당을 위해 최초의 지폐를 발행했으며 1715까지 13개의 식민지중 10개주가 자체통화를 발행했다. 18세기중엽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의 자기소유의 인쇄소에서 최초의 위조지폐방지기술을 도입한 지폐를 인쇄했다. 영국은 1751 뉴잉글랜드식민지에 한해 화폐발행을 금지하는 법령을 마련했는데 이법안은 영국의 조세와 같은 공공부채는 허용하되 상인들을 상대로 사용하는것을 금지했다. 1764 영국은 이법안을 확대해 모든 공공·민간채무지불에 대한 사용을 금지하는 지폐발행전면금지령을 내렸다. 영국정부는 화폐법폐지를 위해 프 랭클린을 포함해 의회에 로비를 했다. 1774 1차대륙회의에서는 <보스턴차사건>이후 미국의 권리전복에 해당하는 영국의 <참을수없는>법등 7가 지법에 대해 논의했다.

영·프식민지전쟁후 식민지민들의 토지권을 제한하는 조지3세의 <1763선언>을 비롯해 <설탕법>(1764)·<인지세법>(1765)·<타운센드법>(1767)·<차법>(1773)등 전쟁으로 인한 재정손실을 보상하기 위한 법들이 영국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에 반발한 미국인들이 1773 보스턴항에 정박해있던 동인도회사선박3척에 적재돼있던 차342상자를 바다에 버리는 <보스턴차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대륙회의와 독립선언·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앞선 1770.3.5 보스턴의 영국세관건물근방에서 영국강점군이 비무장주민들에게 총탄을 퍼부어 5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새뮤얼애덤스같은 독립파들은 13개주를 통틀어 같은 뜻을 가진 이들과 함께 반영단체를 조직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1773 새로운 <차법>이 발효되고 <보스턴차사건>이 벌어진것이다.

1781 북미은행(Bank of North America)이 로버트모리스와 해밀턴등에 의해 설립됐다. 모리스는 상인으로 수입·수출과 일반은행업무로 펜실베이니아에서도 가장 번성한 회사중 하나를 운영했다. 미국독립선언·연합규약·미국헌법의 3문서에 모두 서명한 2명중 한사람으로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독립전쟁에서 재정을 책임졌고 독립전쟁에 자금마련을 위해 대륙회의는 모리스에게 사립발권은행의 설립을 허가했다. 모리스는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의 형태를 본따 북미은행을 설립했다. 건국후 워싱턴정부의 초대재무부장관 해밀턴은 1미국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설립안(1791~1811)을 제안했다. 해밀턴은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국가의신용을안정화하고연방정부의금융업무처리를개선하기위국립은행이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초대국무장관 제퍼슨등 반대자들은 은행권력의 집중화가 건전한 통화시스템에 위협이 될수 있으며 북부의 이익을 위해 남부가 희생한다는 의미라며 중앙은행의 설립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제퍼슨은 은행의 설립은 사기꾼들이 돈버는것을 도와줌으로써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다고 생각했다. 이후 해밀턴은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해 제조업중심의 보조금지급을 요청했으나 이는 대부분 승인되지못했다. 미·영전쟁 (1812~15)의 영향으로 중앙은행의 필요성이 인정돼 의회는 1816 2미국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설립안(1817~36) 을 다시 20년기한으로 인가했다. 전쟁과 2미국은행의 화폐발행으로 경기과열은 심화됐다. 이 과열된 경기속에 뉴욕증권거래소도 탄생했다. 뒤를 이어 과도한 대출을 회수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지자 경기가 하락하고 그영향으로 자산과 토지가격은 빠르게 하락하면서 개인파산이 속출하고 1819 은행위기가 발생한다. 이런 상황속에서 서민들의 불만은 은행과 금융에 집중됐다. 사람들은 중앙은행이 세수입을 관리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관리하고 그로인한 권력을 소수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앤드류잭슨은 미국은행의 폐지를 공약으로 당선됐다. 2미국은행은행장 니콜라스비들은 만기4년전인 1832 의회에 면허연장을 요구했고 의회는 이를 승인했지만 잭슨은 이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잭슨은 연방정부자금을 모두 주법은행으로 이관하고 1835 연방정부의 모든 채무를 상환하고 완전 독립하게 된다.

1861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자금이 필요했던 링컨정부는 은행에 손을 벌려보지만 이자가 너무 높아 정부에서 화폐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링컨은 재무부를 통해 국채(Demand Notes)라고 불린 최초의 10달러지폐를 발행하게 했다. 일명 <그린백(Greenback)>으로 불리는 이화폐는 링컨시기에 총4억달러를 발행했으며 그이후로도 간간히 발행됐으나 은행가들의 비난을 받으며 그나마도 발행이 중단됐다. 100년뒤인 1960년 대 존에프케네디대통령이 그린백의 발행을 명령했으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유통되지못했다.

미국발권은행의 역사는 1913 연준(연방준비제도, Fed)으로 이어진다. 1907 공황에 타격을 입은 미국경제를 수습하기 위해 선두에 선것은 미국의 대표은행 JP모건이었다. JP모건은 조지피바디사를 인수합병하고 남북전쟁시기 전쟁물자를 공급하면서 성장한 기업이다. 조지피바디사는 미국철도사업의 자금을 모으기 위해 런던에 사무실을 내고 사업하던 투자금융업체였다. 당시 영국자본의 가장 큰손은 로스차일드가였다. 런던에서 국제금거래가격을 결정하는 회의도 로스차일드사무실에서 이뤄졌다. 미국석유독점재벌 록펠러도 로스차일드가의 자금으로 독점을 완성할수 있었다고 알려져있다. 1907 뱅크런이 발생하자 JP모건은 수습을 위한 자금투입을 결정했다. 존록펠러도 1000만달러를 내셔널시티은행에 예금했다

공황이후 중앙은행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통화공급량을 관리하는 중앙은행이 있다면 공황과 같은 위기발생시 대응능력을 갖출수 있을것이라고 기대했다. 1910 록펠러2세의 장인이기도 한 상원의원 넬슨앨드리치와 에이브러햄앤드류(재무부차관)· 폴와버그(쿤롭컴퍼니대표)·프랭크밴드립(내셔널시티은행장)· 헨리데이비슨(JP모건컴퍼니파트너)등이 회의를 갖고 <국가준비은행(National Reserve Bank)>구상을 내놓았다. 국가금융 위원회의 최종보고서가 발표되고 그로부터 2년여의 논의끝에 1913.12.23 법안이 가결되고 윌슨대통령이 즉시 법안에 서명하면서 당일 연준이 설립됐다.

연준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승인한 이사 7명으로 이루어진 연준이사회(FRB)에 의해 운영된다. 미국각지에 연은(연방준비은행, FRB Federal Reserve Banks) 12개지점이 있으며 연준이사회7명과 당연직으로 참석하는 뉴욕연은총재를 포함한 지역연은대표5명으로 구성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Federal Open Market Committee)가 정기적으로 회의를 갖고 결과를 발표하고있다. 연준은 미국역사의 과거은행들처럼 사립은행자본의 출자로 설립됐으며 미국정부는 지분을 소유하고있지않다. 그들은 정부의 세금으로 천문학적인 이자수익을 취한다.

2008 공황은 모기지론과 파생금융상품으로 인한 공황으로 전형적인 금융공황이었다. 금융자본은 탐욕적이윤추구로 담보의 리스크가 큰 정크본드를 자본시장안으로 밀어넣어 거품을 조장해 이윤을 취하지만 결국 제로섬인 자본시장에서 손실을 보는것은 소액투자자들이고 경제위기로 타격을 받는것은 성실하게 노동하는 근로대중이다. 2008금융세계공황의 영향으로 미국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했으며 2008.1~2010.2 미국의 실업률이 약10% 맴돌면서 7300만개 넘는 일자리가 사라졌다. 금융기관특별감독기구에 따르면 현재까지 59명의 금융인을 포함해 총251명이 수감되는 처벌을 받았지만 그중 월가의 CEO는 없다고 한다.

금융자본집단은 정부의 화폐발행에 대해 금지불보장없는 화폐는 위험하다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이 발권은행을 장악한뒤에는 금지불보장따위는 신경쓰지않고 화폐를 마구 찍어대고있다. 금본위제가 통화량의 억제로 경기위축을 야기한다면 무제한한 통화량의 증가는 인플레이션을 야기한다. 과거 금광의 발견은 통화량의 증대를 가져오면서 경기부양의 효과를 가졌으나 지금 시대에 새로운 금광의 발견으로 통화량을 확대한다는것은 가능하지않다. 경제성장에 대한 과학적인 계산과 치밀한 계획에 근거해 통화량을 확대시켜야한다. 이를 통제할수 없는 자유시장경제에서 통화량을 안정시킬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금본위제다.

고도로 자본주의화된 경제는 경제명맥을 금융자본이 지배하고 이를 통해 금융자본이 사회의 모든것을 좌우하고있다. 인격의 가치마저도 자본·돈으로 환산되는 사회에서 세상은 돈을 가진자와 못가진자로 구분된다. <부익부·빈익빈>으로 가진자는 나날이 극소수가 되고 못가진자들은 계속 확대되며 그분노 또한 높아지고있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문제가 아니라 정치·문화전반으로 확대되고있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인격마 저 돈의 노예가 되지않기 위한 저항인것이다. 즉, 금융과두정에 대한 거부와 반대로 나아간다. 역사적으로 세계적부가 집중돼 자본이 높은 이윤을 찾아 거쳐갔던 나라들에서는 결국 민중들의 삶이 파탄나고 피폐해졌다. 미국은 현시대 이른바 명실상부한 세계최강국임에도 불구하고 미국민들은 높은 실업률과 파산이라는 만성적인 위기속에 살고있다.

건국이념,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미국의 독립과 건국에 영향을 미친 사상은 당시 영국에 있었던 로크의 자유주의와 영국군주제에 반대하던 커먼웰스(Commonwealth)맨의 공화주의다. 자유주의사상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미국독립선언의 기본내용으로 됐다. 기본권을 보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 체제가 공화주의다. 공화정은 자신의 대표를 선출함으로써 주권자들이 자신의 주권을 실현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고대노예제시기에는 노예주들의 귀족공화정이 되고 중세봉건시기에는 시민들의 공화정을 그리면서 부르주아혁명을 추동하는 개념으로 작용했다. 로크는 <주권재민설>을 주장하면서 여기서의 이 자산가를 의미하는것임을 명확히 했다.

커먼웰스는 특정계급이 아닌 모두의 행복을 위해 조직된 국가를 의미했지만 점차 좀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정치공동체에도 사용됐다. 크롬웰이 잉글랜드공화국을 선포했을때 국명은 <Commonwealth of England>였다. 후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병합해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공화국 (연방)이라고 불렸다. 커먼웰스의 개념은 아직도 사용되고있다. 미국 버지니아주의 공식적인 명칭은 버지니아커먼웰스(Commonwealth of Virginia) 다. 켄터키주·매사추세츠주·펜실베이니아주등도 마찬가지다. 과거 미국자치령일 당시 필리핀도 필리핀자치령(Commonwealth of the Philippines) 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현재 미국자치령인 푸에르토리코와 북마리아나제도도 이름에 커먼웰스를 사용한다. 미국에 뒤이어 영국의 식민지가 된 오스트레일리아도 1901 연방을 이루면서 공식이름에 커먼웰스를 사용하고있 다. 영연방과 독립국가연합은 <Commonwealth>로 표기하고있다. 커먼웰스맨은 영국의 군주제를 반대하는 반정부인사들을 의미하는것으로 오늘날에도 군주제폐지를 주장하는 영국인들은 <신하가아니라시민(Citizen not Subject)>이라는 모토를 걸고 활동을 이어오고있다.

부르주아시기 봉건제를 반대했던 혁명세력은 봉건제를 반대하기 위해 인권과 자유주의사상을 제시했지만 명확히 제한적이었다. 부르주아들은 근로민중들의 인권과 자유를 형식적이고 제한적이나마 보장해주지않을수 없었다. 봉건세력을 와해시키고 부르주아정권을 안정적으로 수립하기 위해서는 근로민중들과 타협하지않을수 없었다. 부르주아혁명의 하나인 미국의 독립전쟁직후 <셰이즈의반란>자들은 자신들이 미국의 건국정신을 구현하고있다고 믿고있었다. 반란은 독립이후 가난한 농민들이 자신의 생활을 파탄나게한 빚과 세금에 분노해 일어난 무장봉기였다. 미국독립이 영국의 부당한 세금에 분노해 일어난 미국식민지민들의 분노였기에 본질상 다르지않았다. 그러나 봉기는 미국의 연합정부에 의해 제압됐으며 연합이 연방으로 강화되는 계기로 됐다. 미국의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미국민중을 위한것이 아니라는것을 보여주며 독립전쟁이 부르주아혁명이었다는것을 확인시켜준다.

워싱턴은 군인출신정치가로 파벌을 부정적으로 봤다. 공동의 가치·이익을실현하는데서 파벌은 불필요하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훗날 연방당을 창당하는 해밀턴과 훗날 민주공화당을 창당하는 제퍼슨을 각각 재무장관·국무장관으로 수용했다. 미국헌법은 대통령·부통령을 투표에서 1·2위로 지정했다. 정당에 대한 규정은 없다. 미국정치에서 정당이 창당되고 대통령·부통령이 각기 다른 정당으로 될때 곤란한 상황이 되지않을수 없었다. 2대 존애덤스시기 부통령 제퍼슨의 역할은 대통령인 애덤스를 계속 반대하는것이었다. 국정운영의 효율을 위해 러닝메이트제로 바뀌게 됐다. 보다 귀족주의적이었던 연방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민심을 잃고 사라졌고 민주공화당내의 일부세력이 창당한 국민공화당과 함께 잭슨을 반대하는 휘그당을 조직한다. 휘그당이라는 이름은 영국의 군주제와 왕당파를 반대해 자유주의·공화주의의 사상을 전통으로 하는 명칭이다. 이 명칭에는 잭슨정부의 독단·독선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반영돼있다.

잭슨시대를 <잭슨민주주의>라고 한다. 잭슨지지자들은 민주당을 창당했다. 잭슨은 귀족출신이 아닌 식민지영토확장전쟁의 평민군인출신으로 남부대토지노예농장주가 된 인물이다. 잭슨은 서민의 대표로 여겨졌으며 미정부재정을 2미국은행으로부터 독립시켰다. 평등주의를 강조해 선거권을 모든 백인남성으 로 확대하면서 대중의 권한을 신장시켰다, 이전시기까지 미정부는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종신직으로 관직을 유지했다. 이로 인해 공무원의 부패가 만연했고 정권의 지시도 잘 듣지않았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해 선거운동원들과 정당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을 선거승리의 대가로 관직에 임 명했다. 이후 이는 관행으로 됐다. 의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등 반대자들에게는 독재로 느껴졌으나 대중에 의해 선거된 대표자가 권한을 행사하고 그권한을 강화한다는 의미에서 대중의 권한확대로 봤다. 전반적으로 정부활동에 대한 시민들의 참여가 확대됐다. 주법관들의 임기를 축소하고 공선제를 채택하며 배심제를 강화하고 변호사의 역할을 높였다.

민주당은 대토지농장의 노예소유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경제관계에서 노예제에 대한 분명한 제한성을 갖고있었다. 이는 시대적제한성이기도 하고 그들의 이념적제한성이기도 했다. 노예제를 반대해 결성된 공화당의 등장과 남북전쟁으로인한 후과는 이런 제한성을 극복하지않을수 없게 만들었다. 즉 미국사회는 민주주의·공화주의사상의 확대를 가져왔으며 사회발전의 가능성을 높였다.

미국의 건국이념에서 자유주의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본질적으로 연관된다. 그러나 동일한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엄연히 구별된다. 극단한 자유주의는 공화주의를 파괴하며 민주주의의 기초를 약화시킨다. 공화주의는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것이다. 극단한 자유주의는 미국의 <건국의아버지>들이 생각한 파벌과 같다. 최근 미국민주당은 자유주의적경향이 강화되고있다. 특히 유색인종·여성·성소수자문제의 해결을 사회적차별을 해소하는 본질적접근이 아닌 다른집단들의 인권을 침해하는식으로 진행해 사회적우려가 증폭되고있다.

진정한 공화국 재건

봉건사회에서 생겨난 신흥부르주아들은 정치적면에서는 절대군주제·신분제를 정면으로 반대했으며 경제적면에서는 봉건적 토지소유관계, 종교적면에서는 봉건적신분제를 신성화한 기독교에 결정적인 반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이시기 <자유>·<평등>·<인권>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민주주의사상이 등장했다.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민중들의 투쟁이 강화되고 자본 주의의 전반적모순이 심화돼 위기에 처하자 근로대중의 저항을 무마시키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등장한것이 자유민 주주의다. 자유민주주의는 특히 2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사회주의민주주의를 비난하고 그와 대립각을 세우기 위해 사용된 표현이다. 그자체로 체제대결적성격을 가지며 민주주의에서도 자유주의를 절대화하는 경향성을 가지고있다. 이는 극단한 개인이기주의에 기초하고있다. 개인주의는 사적소유의 산물로 개인주의에 기초한 사회는 사회를 적대계급으로 분열시키고 계급적대립·불평등을 야기한다. 지배계급의 부패와 도덕적타락은 인류역사의 오랜과정에서 쉽게 확인할수 있는 모습이다. <피자게이트>·<헌터게이트>는 자본주의의 <부익부빈익빈>사회에서 극단화된 금융과두정치체제의 소수지배계급이 저지르는 도덕적타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도널드트럼프는 백악관에서 나와 플로리다 마라라고에 전대통령사무실을 마련하고 부정선거에 불복하며 정치활동을 이어가고있다.

미국건국의 자유주의·공화주의는 그자체로도 반민중적요소와 시대적·사상이론적제한성을 갖고있지만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국가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자유주의·공화주의의 그가치마저도 훼손되고있다. 미국에 불고있는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은 과거 미국건국을 이끈 종교세력인 청교도인들의 종교부흥운동이었다. 미국독립시기에는 반지성주의를 이끌며 역시 독립을 이끈 다른 하나의 사상인 계몽주의가 반종교적으로 가는것을 반대했다. 미국의 종교세력은 미국을 <언덕위의도시>(마태복음)로 보면서 미국이 그들의 이상적종교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했다. 국가독점자본주의와 금융자본집단의 지배를 거부하고 현재 미국민과 세계인류의 각성을 요구하는 흐름을 보이고있다. 미국내에 진정한 공화국을 재건하는 대격변·대전환으로 이어지겠는지 온세계가 주시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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