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식민지시기와 경제적독립
한나라에서 화폐발행권을 누가 차지하느냐는 경제주권을 누가 장악하는가와 연관된다. FRB(연방은행)가 사은행으로서 금융자본집단이 장악하고있고 화폐를 발행할수록 미국민이 부채의 노예로 전락되는 현실은 화폐발행권소유여부의 절대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1600년대부터 영국에 의해 시작된 식민체제하에서 경제적불평등을 해소하고 부를 축적하고자 미식민지정부는 자체로 화폐를 통용하기 시작했다. 미대륙에 정착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빈민이었으며 당시 미대륙에 대형금광·은광이 발견되기전이었다.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가 극히 부족한 조건에서 영국과의 불평등한 무역구조로 대량의 금·은화폐가 영국으로 유입되고있었다. 통화부족으로 생산물에 대한 충분한 교환이 이뤄지지않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민들은 원시화폐를 사용해 상품거래를 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쌀을, 버지니아주는 담배를 화폐로 사용했다. 그밖에 조개껍질·소·밀·냄비등 다양한 물품들이 화폐를 대용했다. 1715 노스캐롤라이나주의 경우 17종류의 물건이 법정화폐로 유통됐으며 정부·민간에서는 물건으로 세금을 받고 공채·사채의 상환, 상품·서비스매매도 물건으로 이뤄졌다. 뿐만아니라 유럽에서 들어온 금화를 비롯한 경화도 제한적으로 사용 됐다. 미최초의 지폐는 1690 식민지지방정부에서 발행됐다. 이는 금속화폐의 장기적부족현상·대체실물화폐이용의불편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잉글랜드은행이 로스차일드가를 중심으로 한 금융재벌에 장악돼 영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화폐를 발행하는 당시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정부신용표준화폐는 매우 혁신적인 방안이었다. 담보로 실물을 잡지않는 이화폐의 발생으로 사회경제는 빠르게 발전했고 상품무역이 번성했다. 영경제학자 아담스미스는 미국내 화폐발행을 두고 <특히금속화폐가부족한북미지역에서신용에기반을둔거래를할경우상인들이매월또는매년정기적으로서로의신용상태를결산할수있으므로거래에따르는불편을줄일수있었다.관리하기도쉬운지폐시스템은아무불편도가져오지않을뿐아니라어떤상황에서는더많은장점을발 휘할수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펜실베이니아의 지폐인쇄권을 확보했던 벤자민프랭클린은 1729 <지폐의본질과필요성에관한소고>소책자로 펜실베이니아의 지폐발행자격을 얻었으며 위조방지화폐를 제작했다. 1763 영국을 방문한 프랭클린은 미경제호황에 대해 <우리자신의지폐를만들고구매력까지보장하니까우리정부는누구에게도이자를지급할필요가없다> 고 답했다. 미국내 정치·경제·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프랭클린은 정부발행지폐제도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중 한명이었다.
미정부는 지폐를 발행함으로써 잉글랜드은행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화폐발행에 대한 이자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고 잉글랜드은행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반면 영국은 프랑스와의 식민지쟁탈전인 7년전쟁으로 인해 1억3000만파운드의 부채가 있었다. 이부채는 한해이자 만 450만파운드에 달했다. 한편 미국내에서는 지폐를 법정화폐와 동일하게 취급해 영국인에 대한 채무변제에도 쓸수 있게 했다. 그결과 영국채권자들과의 갈등이 증폭됐다. 영국은 부채를 미정부에 전가시킬 목적으로 식민지에서 더이상 환어음이나 지폐발행을 허용하지않는다고 선언했고 1764 통화조례를 통해 미주정부의 지폐발행행위를 엄격히 금지하며 영국정부에 납부하는 세금을 반드시 황금·백은으로 지불할것을 결정했다. 이는 영국은행가들이 미화폐발행권과 미경제를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통화조례에 따른 경제불황에 대해 프랭클린은 <겨우1년만에식민지의상황은완전히역전됐다.번영의시대는가고 경제는심각한불황의늪에빠졌다.거리마다실 업자가우글거렸다.>고 증언했다
1774.10 대륙회의는 영국정부의 부당한 식민지경영에 반발해 <12.1부터영국제품을보이콧하고수출도중지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고 1775.5 소집된 2차대륙회의에 서는 독립전쟁경비마련을 위해 대륙지폐발행을 결정했다.
미국은행설립을 둘러싼 쟁투
1786 농민에 대한 가혹한 부채와 조세가 원인이 돼 <셰이즈의봉기>가 일어났다. 전쟁기간 매사추세츠주정부가 지폐를 남발하 자 농민들로서는 부채갚기가 수월했다. 전후 영국이 미국과의 교역을 중단하고 영국외 유럽무역상들은 미국에게 경화를 요구했 다. 매사추세츠에서도 지폐가치가 하락하고 경화가 통용되자 농민들도 지폐가 아닌 경화로 부채를 갚아야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경화가 없던 농민은 토지를 빼앗겼고 그렇게 토지를 빼앗긴 농민가족중에는 독립전쟁에 참전후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못한 사람 들이 많았다. 농민들은 부채탕감을 위해 지폐발행을 주정부에 요구했으나 주정부·의회·상인에 의해 좌절됐다. 농민의 분노는 시 위로 번졌고 이후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봉기로 발전했다. <셰이즈의봉기>는 영국의 미경제장악과 영국과 결탁한 세력들에 의한 농민생활파탄으로 인해 일어난 미국최초의 무장봉기다.
봉기결과 주정부에 대해 일정하게 제한을 두기 위해서라도 연방 정부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대두됐다. 연방주의자들은 1788 미 합중국연방헌법을 제정했다. 미헌법1장8절에는 <의회는화폐의제조와가치설정의권리를갖는다>고 명시됐다. 1791 1미국은행 이 설립됐다. 미국은행은 개인80%·정부20%로 지분이 나눠져있 었는데 이는 명백히 헌법을 위반한것이었다. 워싱턴정부하에 재 무부장관이었던 알렉산더해밀턴은 영금융재벌 로스차일드가의 자금지원을 받았다고 알려져있는 대표적인 친영세력이다. 해밀 턴은 전쟁당시 부채에 대한 책임을 연방정부에 집중시킴으로써 재정압박을 하는 동시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도로 잉글랜드은 행과 같은 미국은행의 설립을 제안했다. 해밀턴과 달리 미국은 행설립에 반대했던 세력은 토마스제퍼슨을 중심으로 한 반연방 파였다. 제퍼슨은 <만약미국인이끝까지민간은행으로하여금국가의화폐발행을통제하도록둔다면이들은행은먼저통화팽창을이용 하고이어서통화긴축정책으로국민의재산을박탈할것이다.이런행위는어느날아침그들의손자들이자기의터전과선조가개척한땅을 잃어버렸다는사실을깨달을때까지계속될것이다.>라며 미국은행설립을 반대했다. 연방파가 채권자·은행가·대지주를 주요지지기반으로 삼는 반면 반연방파는 채무자, 특히 저당잡힌 농장을 가진 가난한 농민들을 주요지지기반으로 삼고있었다. 이런 차이는 반연방파가 미민중의 민심을 반영하고있다는것을 보여준다. 1미국은행의 유효기간은 20년이었다. 유효기간이 끝나는 1811당시 미국은행주식 1000만주중 700만주는 외국자본이었으며 그중 대부분은 영국은행과 로스차일드가가 차지하고있었다. 1791~96까지 5년동안 미정부채무는 무려 820만달러로 증가했으며 그에 대한 부담은 고스란히 미국민중의 몫이었다.
제퍼슨정부에 의해 1미국은행의 연장이 가로막혔으나 1812 영미전쟁에 의한 미정부부채의 증가로 결국 1815 2미국은행이 설립된다. 마찬 가지로 20년의 유효기간이 있었으나 총주식은 3500만달러로 상승했으며 개인80%·정부20%소유였다. 7대대통령 앤드류잭슨은 미국은행의 문제점을 규탄하며 폐지를 공약해 당선됐다. 잭슨과 그지지자들은 민주공화당을 결성하며 보통사람·협의의헌법해석·주(州)의권한강화·저 율관세·농업주의·작은정부·교통망개량등 제퍼슨적인 가치를 내세웠다. 이는 당시 백인성인남성으로 참정권이 확대되면서 이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잭슨은 <헌법이의회에화폐발행권한을준것은의회가직접그권한을행사하라는뜻이지어떠한개인이나기업에그권한을위임하라는뜻은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잭슨은 1만1000여명연방정부직원중 은행관련직원 2000여명을 해고했다. 1832 잭슨은 연임에 성공했다. 잭슨은 당시 은행장이자 금융재벌과 결탁한 니콜라스비들과 국제금융재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2미국은행연장을 부결시켰으며 나아가 재무부장관에게 2미국은행계좌에서 정부지분을 인출해 23개주은행으로 송 금하라고 명령했다. 잭슨이 추구한것은 미국민이 은행을 지배하고 통화공급결정권을 쥐는 <민주적화폐경제>였다. 1836 자유은행법을 채택해 누구나 은행을 자유롭게 개설하게 했다. 1864 국책은행법이 제정됐다. 국책은행이 화폐발행을 독과점할때까지 30년을 <자유은행시대>라고 부른다. 1835.1 잭슨은 마지막 국채를 상환했음에도 3500만달러 잉여금을 남기는 최초의 대통령이 됐다.
잉글랜드은행과 국제금융재벌은 미국에 대한 각종 대출을 중지하고 금화폐공급량을 축소했다. 그결과 1837 경제공황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같은해 잭슨의 후임자인 마틴밴뷰런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뷰런은 화폐긴축에 따른 위기국면은 독립재무제도의 실행으로 돌파하려고 했다. 이는 재무부가 관장하는 화폐를 개인은행시스템에서 전부 인출해 재무부자신의 시스템에 보관하는 제도였다. 이미 국제금융재벌에 의한 경제공황으로 주은행을 비롯한 은행들이 파산된 상황이었다. 독립재무제도로 들어오는 돈은 금·은화폐였으며 이는 정부가 금·은화폐공급량을 적절히 조절함으로써 국제금융재벌이 금을 매개로 미국화폐를 좌지우지하는 문제에서 벗어난다는것을의미했다.
1840 미대선에서는 미국은행부활을 내세웠던 휘그당의 헨리해리슨이 당선됐다. 휘그당은 새로운미국은행·고율의보호관세·교통망개량사업등을 내세운 중공업중심·대자본중심의 당이었다. 해리슨은 휘그당출신임에도 미국은행부활·독립재무제도폐지를 주장하지않았다. 해리슨은 취임후 31일만에 사망했다. 1849 휘그당출신 재커리테일러가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테일러는 사석에서 <중앙은행부활은물건너갔다.나의임기내에는그문제를고려하지않겠다.>고 언급했다. 1850 테일러는 의문사했는데 1991 비상중독으로 사망했다는것이 밝혀졌다.
남북전쟁승리와 포퓰리즘 1861 남북전쟁이 시작됐다. 당시 미국내 은행수는 꾸준히 늘어 1836 713개에서 1860 1562개로 증가했고 9000종의 은행권이 발행됐다. 국제금융재벌은 링컨대통령에게 전쟁비용대출에 대한 이자료 연24~36%를 요구했다. 이를 받아들일 경우 전후에 파산할것임을 고려한 링컨은 제안을 거부했다. 1861 체이스재무장관은 군비물자를 안정적으로 수입하기 위해 모든 은행에 있는 금을 정부산하로 끌어왔다. 그결과 은행권이 태환지폐에서 불환지폐로 전환됐다. 링컨은 정부도 불환지폐를 발매할수 있도록 의회를 설득했고 의회는 전쟁수행을 위해 담보없이 20년간 연5%이자가 붙는 국채발행을 승인했다. 그린백의 등장으로 자금문제를 순식간에 해결했다. 부분지급준비금제도를 활용한 은행의 신용창출작업으로 돈이 풀리면서 군수산업·철도·도로건설이 활발해졌고 이는 북부의 승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미국민들은 소액으로 쪼갠 북부의 국채를 스스로 구매함으로써 북부의 승리를 견인했다. 링컨은 1865.4.15 암살됐다. 비스마르크독일총리는 <링컨은의회에서권한을부여받고민중에게국채를팔아자금을조달했다.이렇게해서정부와국가는외국금융재벌의올가미에서벗어났다.국제금융재벌들이자신들의손아귀에서미국이빠져나갔다는사실을알아차렸을때링컨의죽음도멀지않았던것이다.>라고 언급했다.
1880~1900년대사이 농민운동인 포퓰리즘운동이 일어났다. 남북전쟁 후 서부가 확장되면서 북부공업지대·공화당, 남부백인농장주·민주당 외에 중서부소농민들이 정치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주축이 돼 포퓰리즘운동이 발생했다. 당시 농민들은 은행·금융제도, 토지투기업자·철도회사등에 경제력이 집중되고 유통업자들의 독점횡포에 고통받으며 많은 빚을 지고있었다. 중서부소농들은 금본위제를 고수하며 고율관세만 추구하는 산업가·은행가를 배척했다. 농민들은 농민동맹을 발전시켜 1892 인민당을 창당하며 정치세력화했다. 주지사3명·상원5명·하원 10명을 배출했으나 소농을 넘어서 대중적으로 조직화하지못했다. 포퓰리스트들은 정부소유창고망설립과 함께 금융재벌권력제한, 부재지주 제폐지·상원직선제, 철도·전화·전신규제및공영화등을 요구했다. 1893 공황이 발생했다. 6개월동안 8000개기업·156개철도회사·400개은행이 파산하고 농산물가격이 폭락했다. 당시 노동력의 20%인 100만명의 노동자가 실업자로 전락했으며 서남부지역의 부채농민들은 파산했다. 인민주의자들과 농민들은 부채탕감을 위해 충분한 화폐공급을 요구했다. 1872 국제금융재벌의 배후조종하에 미의회가 은화를 폐지하는 화폐주조법을 통과시켰는데 이에 반발해 금은법정가치비율이 1대16인 복본위제부활을 촉구했다. 농민들은 농산물가격인상과 부채상환을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은화의자유롭고무제한적인주조>라는 정치적구호 를 들었다. 민주당 윌리엄제닝스브라이언은 <은화의자유주조>를 지지 하는 <황금십자가>연설을 통해 <우리는이렇게말하는것으로금본위제에대한그들의요구에답하고자한다.당신들은가시면류관을노동자의이마에씌울수없으며황금의십자가에인류를못박을수없을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브라이언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민주당대통령후보로 지명됐다. 1896선거는 금융재벌을 등에 업은 세력들과 그에 반하는 세력들간의 격전으로 치러졌다. 금융재벌들은 공화당에 선거자금을 퍼부었고 그결과 브라이언은 국민투표에서 47%를 획득했으나 선거인단투표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패배했다. 민주당을 밀었던 인민당은 선거후 몇달만에 붕괴됐고 1898 금생산량의 급등에 따른 경제호황을 딛고 공화당은 1900 금본위제법을 제정했다.
FRB설립과 노동자·민중의 경제투쟁
1907 산업생산지수가 최고치를 기록했다. 철도산업의 호황, 철강산업의 발전으로 각종 원자재가격이 폭등했다. 은행들은 자기자본비율이 1%에 미치지못할 정도로 지나친 대출을 해주며 자산거품을 만들었다. 우선 철강산업이 직격탄을 맞으며 주식시장이 폭락했다. 1907 니커보커투자신탁회사가 파산될거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1만8000여명의 투자자가 예금인출을 요구했다. 금융시스템이 붕괴직전에 놓였다. 이에 대한 해결사로 나선 인물이 JP모건이다. 모건은행의 모태인 피바디주식회사의 조지피바디는 1835 영국에 진출해 로스차일드가에 부역하기 시작했으며 이관계는 1869 모건과 로스차일드가문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1891 로스차일드가와 영국은행가는 원탁회의그룹을 만들었는데 모건은 이에 상응하는 조직으로 미국에 외교협회(CFR)를 만들어 미정부를 막후에서 조종했다. 한편 로스차일드가가 은행쪽에는 모건을 내세웠다면 공업쪽에는 록펠러·스탠더드오일석유회사를 조종했다. 1914 루드로학살은 록펠러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록펠러가문소유의 콜로라도퓨얼&아이언컴퍼니는 야만적인 경영으로 탄광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탄광노동자들은 스스로 노조를 조직했고 파업을 전개했다. 1914.4.20 노동자와 사용자측의 민병대가 충돌해 노동자측 어린이11명을 포함해 20여명이 학살됐다. 록펠러는 경쟁사와의 관계에서도 불법·편법을 사용하며 폭력적으로 합병해 사업을 독점화하는것으로 유명했다. 민중에게 야만적인 록펠러는 금융자본집단과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로스차일드가를 비롯한 국제금융재벌들은 미철도운수업의 95%를 장악하고있는 모건은행·쿤롭사를 동원해 스탠더드오일의 운반비를 대폭할인해줬다. 록펠러는 국제금융재벌을 등에 업고 미석유산업을 완전 독점했다.
1907 공황은 미중앙은행설립을 위한 전초전이었다. 1911 린드버그하원의원은 <나는금융트러스트가있다고주장해왔다>·<1907자연은큰자비를베풀어그어느때보다넉넉한수확을미국에선사했다.다른산업분야또한바삐돌아갔고자연의관점에서보자면몹시풍요로운한해의모든조건이갖춰졌다.>·<월스트리트의투기가1907금융공황을일으켰다.예금자들의돈은금융트러스트가편애하는누군가와도박꾼에게대출됐다.>라고 규칙위원회에서 증언 하며 1907 공황이 금융자본집단의 조작에 의한것임을 폭로했다.
금융자본집단과 그대변인들은 1910.11 모건·록펠러의 별장이 있는 조지아연안 지킬섬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연방준비은행법초안을 마련했다. Fed(연방준비제도)라는 용어는 미국민을 기만하기 위한 방책이며 본질은 미중앙은행설립이다. 1·2미국은행과는 달리 100%개인소유로 설립됨으로써 금융자본집단의 미국은행독점화가 완성됐다. 1911 무디스인베스터스서비스창립자 존무디는 비밀회의 참가자인 모건·제임스힐(철도재벌)·조지베이커(뉴욕퍼스트내셔널은행장)는 모건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며 록펠러·윌리엄록펠러·제임스스틸먼(내셔널시티은행장)·야곱시프(쿤롭사)는 록펠러그룹사람이라고 증언하며 이들이 구성하는 자본의 핵심축이 미국을 통제하고있다고 언급했다. 1914.5.19 미통화감사위원장보고에 따르면 발행주식가운데 대부분을 뉴욕시대형은행들이 소유했다. 록펠러·쿤롭이 지배하고있는 뉴욕내셔널시티은행이 가장 많은 3만주를 소유했다. 모건의 퍼스트내셔널은행이 1만5000주를 소유했다. 1955 두은행이 합병해 씨티은행이 탄생함으로써 뉴욕연방준비은행주식의 1/4을 차지하게 됐고 사실상 FRB의 총재후보결정권을 갖게 됐다. 그외 뉴욕내셔널상업은행2만1000주·하노버은행(로스차일드가)1만200주·체이스은행6000주·케미컬은행6000주를 소유하며 40%의 뉴욕FRB주식을 보유했다. 1983 이들지분은 53%로 증가했다. 이후 씨티은행
15%·체이스맨해튼14%·모건신탁9%·하노버7%·케미컬8%로 확정됐다.
이시기 노동자·민중은 화폐를 둘러싼 직접적인 투쟁보다는 미독점자본주의를규탄하고 8시간노동제를 비롯한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쟁취투쟁을 전개했다.1875 펜실베이니아탄광노동자파업, 1877 볼티모어·오하이오철도파업, 1886 8시간노동자요구총파업등을 전개했다. 1886 헤이마켓투쟁은 19세기후반 미노동운동을 이끈 노동기사단이 세력을 확대하던 중 발생한 투쟁이다. 12~16시간 장시간·고강도노동과 저임금으로 인한 착취에 시달리며 노예같은 삶을 살던 노동자·민중은 5.1 8시간노동제를 촉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1889.7 2인터내셔널창립대회에서는 5.1 메이데이로 결정하고 1890.5.1 모든나라·도시에서 8시간노동확립을 촉구하는 국제적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1925~28 뉴욕통화완화정책으로 1920년대 미국은 번영을 구가하며 투기광풍이 불었다. 1928 한해만 연준은 600억달러를 방출했는데 당시 세계금유통량의 6배나 되는 돈이었다. 1929에는 뉴욕연방은행 단독으로 580억달러나 방출했다. 통화팽창정책은 당시 뉴욕은행이사 벤저민스트롱과 잉글랜드은행 몬테규노먼사이의 협정에 의한것이다. 그목적은 뉴욕금리를 런던보다 낮추려는데 있었다. 미하원의 안정위원회는 1928 비밀협정에 관한 조사에 돌입했고 그결과 금융자본집단의 통화유통조작으로 1929 미증시가 붕괴됐다는것을 드러냈다. 1929 457억달러에 달하던 통화량이 1933에는 300억달러로 30%나 줄어 극심한 디플레이션이 초래됐다. 그결과 실질통화유통량은 1/3로 줄어 5년만에 2만5000개였던 상업은행이 1만4000개로 줄었다. 공황전 260만명이었던 실업자수는 1933 1300만명으로 급증했고 실업률은 37.6%까지 치솟았다. 1930 125만명 실업자대회·전국실업자위원회조직, 1931 <아사반대>광산노동자파업, 1932 미노스캐롤라이나의류노동자15만명파업, 1934 미항만노동자20여만명총파업등 1930년대 대공황은 미노동운동을 결정적으로 전환시켰다.
심화되는 인플레이션과 달러불신 FRB의 설립은 필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FRB를 구성하는 대형은행이 의결권을 장악하고있는 사실은 통화인플레이션의 큰 위험이 내 재돼있다는것을 의미했다. 1981 금융연구교육위원회 베라스미스는 <중앙은행의원리>에서 <중앙은행의기본적인정의는단일은행이화폐발행의완전한또는일부독점권을지니는은행제도이다.그것은바깥에서부터강요되거 나정부지원의결과로생겨난다.>고 정의했다. 즉 중앙은행은 화폐발행독점권을 쥐고있기에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그런데 중앙은행을 성립하는 행위인 부분적인 준비금제도때문에 직접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 준비금 일부만 있어도 장부상 신용이 생기며 통화는 은행이 예치금이나 준비금 으로 보유한 실제<금액>보다 훨씬 증가하게 된다. 금융자본집단에 의해 금·은 복본위제에서 금본위제로, 결국 금본위제붕괴로 변화하는 역사적과정은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고 미국민중에 대한 착취도 심화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자본 주의상승기인 19세기에서 독점자본주의시대인 20세기로 들어서는 시기 국제금융재벌들은 법정화폐체제를 모색했다. 법정화폐는 금·은이 대출총량에 제약 을 미치는 국면에서 완전히 벗어나 화폐를 장악통제할수 있는 방법이었다. 화 폐공급을 무한대로 늘려 얻는 수익이 인플레이션에 따른 대출이자손실보다 훨씬 컸다. 독점과정을 거친 금융자본집단은 1933 루스벨트대통령을 내세워 금 교환금지행정명령·금준비금법안등을 통과시키며 금본위제에서 벗어나고 금을 소유하고있는 금융자본집단의 이득을 위해 부역하게했다. 1944 브레튼우즈협 정으로 금1온스당 35달러로 고정하고 다른나라통화들은 달러에 고정하며 미 달러를 기축통화로 함으로써 세계적으로 금의 화폐기능을 없앴다. 단계적으로 금본위제를 약화시킨 금융자본집단은 1971.8 리처드닉슨대통령을 앞세워 금 교환임시중단을 선언함으로써 금본위제를 전격 폐지했다.
인플레이션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1918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경제학자 케인즈의 지적으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케인즈는 독일에 과도한 배상금을 물 릴 경우 전무후무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것이며 독일민중을 빈곤으로 내몰아 <극단적혁명>이 일어날것이라고 역설했다. 케인즈의 예견대로 독일은 거액의 전쟁배상금으로 화폐발행량이 증가해 초인플레이션에 놓였다. 그린스펀도 책 <금과경제의자유>를 통해 <금본위제가없는상황에서는어떤방법으로도국민의재산이인플레이션에먹히는것을막지못한다>고 강조했다. 케인즈와 그린스펀 모두 금융자본집단에 부역하기전까지 인플레이션의 위험성을 역설했던것이다. 특히 케인즈는 <통화개혁론>·<화폐론>등에서 화폐문제를 연구하며 인플레이션을 자본주의의 파괴자로 여겼다. 케인즈는 특정국가에 의해 임의로 발행량이 증가·축소되는 일이 없는 세계화폐가 있어야한다고 주장하며 <방코르>를 고안했다. 이는 금등30개상품가격을 기초로 가치가 산정되며 각국은 자국화폐를 일정한 고정환율로 방코르와 교환할수있게 하는것이다. 브레튼우즈회의에서 케인즈는 방코르와 함께 <국제청산동맹>을 도입해야하며 세계각국이 무역에서 세계화폐를 공통으로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또 환율조정시스템을 통해 무역수지 적자국의 경우 적자액만큼의 방코르초과인출을 계산해 올릴수 있게 하되 각국의 초과인출상한액은 무역규모에 비례해 설정하도록 고안했다. 케인즈의 주장은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려고한 금융자본집단에 의해 가로막혔다.
1960 이미 남발된 달러는 외환시장에서 평가절하압력을 받았다. 미경제학자 로버트트리핀은 <미국이경상적자를허용하지않아국제유동성공급이중단되면세계경제는크게위축될것>·<적자상태가지속돼달러화가과잉공급되면달러가치가떨어져준비자산으로서의신뢰도를잃고고정환율제도도붕괴될것>이라고 주장했다. 1966 미의 금보유량은 전세계금의 절반이하로 줄었음에도 1971 달러통화량은 10%가 증가했다. 그러자 스위스·프랑스등이 달러를 금으로 태환해갔다. 닉슨에 의해 금본위제가 해체되자 세계각국의 달러와 그와 연동된 화폐들이 한순간에 종잇조각으로 전락했다. 재정적자에 따른 인플레이션의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세계국내총생산액대비 세계금융자산비중은 1970 50%에서 1980 109%, 1990 263%, 2000 310%로 폭증했다. 이는 화폐본연의 기능인 거래동기에 의한 수요보다 투기적수요가 증가했다는것을 의미한다.
1976 경제학자 프리드리히하이에크는 <화폐의탈국가화>에서 중앙은행은 높은 인플레이션문제를 해결할수 없으므로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민간주체 누구나 화폐를 자유롭게 발행할수 있어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의 주장의 과학성여부를 떠나 인플레이션에 따른 달러신인도의 추락은 화폐의 <탈국가화>를 추동한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사이퍼펑크운동과 암호화폐의 등장
1960년대중반 미국내 반전운동은 청년·민중으로 하여금 기존사회질서·물질문명을 부정하고 자유·평화를 추구하는 반체제·반문화운동인 히피운동으로 발전했다. 히피운동에 뒤이어 사이퍼펑크(Cypherpunk)운동이 일어났다. 사이퍼펑크운동은 개인의 자유, 특히 사생활보호를 매우 중시했다. 이운동은 1990년대전후 인터넷대중화와 함께 IT혁명의 핵심지역인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비트코인의 핵심 기술인 블록체인은 사이퍼펑크운동으로부터 시작한다. 사이퍼펑크는 암호(cipher) 와 저항을 상징하는 펑크(punk)의 합성어다. 위키리크스최고책임자 줄리언어산지는 책<사이퍼펑크>에서 <대규모감시와검열에맞서자유를지키기위한방안으로강력 한암호기술을활용하는사람을말한다>라고 정의했다.
사이퍼펑크운동은 1980년대초 레이건정권에 의해 신자유주의체제·부자감세가 진행되며 소득불평등·부의편중이 심화된데 저항하며 일어났다. 미국의 자유시장·규제 완화·자유무역·외환시장개방으로 개발도상국들은 외환시장을 개방당하고 국부를 약탈당한 반면 초국적자본만이 부를 축재했다. 사이퍼펑크운동은 초국적자본에 결탁한 정부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졌다. 특히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인터넷보급 으로 인해 국가조직·초국적자본에 의해 개인정보가 감시·악용되고 개인에 대한 검열이 심화됐다. 사이퍼펑크운동가들은 소설가 조지오웰이 예고한 <빅브라더>의 출현에 저항해 움직였다.
1992 사이퍼펑크모임이 시작됐다. 모임의 주요멤버는 수학자·컴퓨터프로그래머 에릭휴즈, 인텔컴퓨터칩의 알파입자문제를 해결한 티모시메이, 시그너스솔루션창립자 존길모어등이다. 휴즈는 선언문을 통해 <프라이버시는세상에선택적으로노출하는것이다>라고 단언했다. 메이는 <공산당선언>을 흉내낸 <암호화무정부주의자선언>을 썼다. 사이퍼펑크운동가들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여러기술을 개발했다. 예컨데 컴퓨터학자 신시아더크와 분산컴퓨팅분야권위자 대니돌레브는 공동으로 <가단성암호화기술>을 개발했는데 이는 블록체인의 바탕기술로 평가받고있다. 어산지는 <해방을위한최고의도구였던인터넷이전체주의의가장위험한조력자로변신했다.인터넷이인류문명을위협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약자에게프라이버시를,강자에게투명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사이퍼펑크의 주요구호중 하나다. 전미국 가안보국계약요원 에드워드스노든은 2013 미·영정보기관들이 세계유명인사·일반인들의 개인정보를 <프리즘>비밀정보수집프로그램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수집·사찰한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1993 사이퍼펑크운동가들은 선언문을 통해 <프라이버시는IT시대의열린사회를위한필수가치다.정부나기업또는다른얼굴없는거대조직들 이우리의프라이버시를보장해줄것이라고기대할수없다.우리의프라이버시는우리스스로보호해야한다.>고 단언했다. 암호는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며 암호화된 정보는 중앙집권에서 벗어나 정보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를 의미했다.
암호학자들은 화폐거래에서도 사생활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개인간직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암호화폐가 바로 비트코
인이다. 비트코인의 암호기술인 블록체인기술은 정부·은행등중앙에서 신용을 제공해주는것이 아니라 거래개인들스스로 신
뢰를 창조했다.
암호학자·컴퓨터공학박사 데이비드차움은 암호화폐의 선구자라고 불린다. 차움은 1981 논문 <추적불가능한전자메일,반송주소와디지털가명>을 통해 <추적불가능한통신은탐구의자유와표현의자유가실현되기위한토대>·<이런요구에부응하기위해다양한종류의익명인증시스템이마련돼야한다>고 주장했다. 1982 가상화폐 <디지캐시>와 거래당사자의 신분·메시지를 노출시키지않고 결제사실을 검증하는 <은닉서명>을 소개했으며 <익명성전자화폐>프로그램을 제안했다. 1985 발표한 논문<신분없는보안:빅브라더를이기는방법>은 사이퍼펑크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배경이 된다.
차움은 1990 <디지캐시>를 창업해 세계최초 암호학이 적용된 익명성디지털화폐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디지캐시는 디지털화된 달러에 해시값을 붙여 만든 세계 최초암호화폐 이캐시(e-cash)를 출시한다. 차움은 이캐시에 은닉서명·암호화된계좌·이중지불방지시스템을 적용했다. 이캐시는 거래내역을 제3자가 알수 없는 익명성을 보장했다.
디지캐시는 디지털토큰을 기반으로 한 전자결제시스템으로 시스템사용자들끼리 토큰을 교환할수 있고 거래소에서 현금으로 교환이 가능하게 했다. 돈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수 없게 설계돼 익명성을 보장했다. 그러나 디지캐시는 미정부의 압박에 의해 결국 파산했다.
데이비드차움의 동료인 암호학자 닉재보는 1998 분산된 디지털 통화매커니즘 <비트골드>를 설계했다. 재보는 <신의프로토콜> 논문에서 <이상적인프로토콜에는상상가능한가장신뢰할만한제3자,즉모든사람의편에신이있다.신은모든이의신뢰를지키니어 느누구도본인의입력값과출력값에대해아는수준으로다른사람의 입력값에대해알수없다.>·<중개인을무신뢰제3자프로토콜로대 체하는것에초점을맞춘다.무신뢰제3자는자동화돼아무도통제하지못하고완벽한결과값을전달한다.>고 말했다. 논문을 발표한지 10여년후 비트코인이 등장했을때 <신의프로토콜>의 첫번째버전인 블록체인도 등장했다. 재보는 사생활·계약·신뢰기관등을 주로 연구하며 프로그래밍된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으로 계약을 이행하는 시스템인 <스마트계약>을 선보였다. 또 당사자간 거래·계약이 네트워크상 중앙기관개입없이 자동적으로 실행되기 위한 계약·거래공증방안으로 <채굴>방식을 제시했다. 비트골
드는 금본위제통화발행원리를 구현한것으로 인플레이션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암호화폐다. 비트골드는 참가자들이 컴퓨터를 이용해 암호화된 퍼즐을 풀면 얻게 되는 구조인데 퍼즐이 풀릴때마다 조금씩 어려워지면서 비트골드를 얻는것도 어려워진다. 비트골드와 비트코인의 구조상 유사성으로 재보를 비트코인창시자인 사토시나카모토로 지목하기도 한다.
사이퍼펑크운동가들중에 <암호무정부주의자(cryptoanarchist)> 암호학자들은 군·정보당국의 암호성메일을 인류모두가 평등하게 누려야할 기술로 봤다. 암호학자 애덤백은 익명성보장·이중 지불방지기술인 <해시캐시>라는 블록체인에 쓰는 작업증명알 고리즘을 개발했다. 이를 바탕으로 <해시캐시>라는 암호화폐를 개발했다. 이는 비트코인의 채굴알고리즘이 됐다. 백은 블록스 트림을 창업해 인터넷이 안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인공위성을 통해 비트코인거래가 가능한 사업을 추진중이다.
게임개발자·암호학자 할피니는 2004 해시캐시를 이용해 <재사용가능한작업증명>을 만들었다. 이는 정보의 위조·변조확인인 증에 초점을 뒀다. 피니는 이머니(e-money)를 개발해 공개하면서 블록체인기술이 만들어졌다.
반민중적화폐에서 민중적화폐로 인플레이션에 의해 민중에게 비용이 전가되는 반민중적화폐에 대항해 민중적화폐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은 지속적으로 있었다. 1998 리버티달러창시자 버나드본놋하우스는 인플레이션이 존재하지않는 화폐를 만들기 위해 금화·은화를 주조해 <리버티달러>를 만들었다. 이는 암호화폐와는 달리 실물로 존재하는 민간화폐였다. 리버티달러는 10년간 민간인·민간기업에 사용됐다. 2007 미FBI·첩보부는 리버티달러사무실을 급습해 금·은·백 금등 귀금속, 리버티달러 2t을 압수했다. 민간의 화폐발행은 미 연방법에 위배되며 돈세탁행위로 간주됐다. 놋하우스는 2011 반역죄로 기소돼 22년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되면서 2015.12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2005 사토시는 컨퍼런스에서 리버티달러가 비트코인에 영감을 줬다고 언급했다.
1996 출시된 이골드(e-gold)는 주류경제에 밀착한 가상화폐였다. 이골드는 사용자가 금·은을 골드앤실버리저브에 맡기면 그에 상당한 이골드를 계좌에 넣어준다. 회사에 돈을 부치면 돈에 상응하는 금·은을 사서 보관하고 이골드를 계좌에 충전해주는식이다. 즉 금·은복본위제의 가상화폐다. 이골드는 마치 실물 금·은거래와 같아 환차손을 방지했다. 미정부는 2001 9.11테러후 만든 애국자법에서 테러자금추적을 명분으로 송금업체가 반드시 허가를 받도록 규제했는데 미재무부는 골드앤실버리저브역시 송금업체로 규정했고 미법무부와 같이 이골드를 수사했다. 2007 미정부는 이골드사용자가 신상정보를 공개할필요가 없기에 돈세탁·아동포르노등에 사용될수 있다고 주장하며 골드앤실버리저브를 기소했다.
일련의 상황은 비트코인이 2008.9.15 금융공황 직후인 2009.1.3 등장한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증명한다. 2008.10.31 사토시는 백서<비트코인:일대일전자화폐시스템>에서 비트코인의 주요특징으로 ·<조폐제도또는여타중앙기관배제>·<참여자익명성>·<해시캐시기반의작업증명을통한화폐발행>이라고 해설했다.
비트코인은 블록체인기술과 채굴보상알고리즘을 처음 실용화했다. 사토시는 2009.1.3 자료저장사이트 <소스포지>에 3만1000항의 비트코인오픈소스소프트웨어프로그램을 공개했다. 이프로그램은 이후 개발된 암호화폐의 원천기술이 됐다. 사토시가 최초의 블록을 만들고 채굴해 발행한 암호화폐는 50비트코인이었다. 이중 10비트코인을 피니에게 보냈다. 사토시는 6일뒤 프로그램이 이미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전하며 <중앙서버도,중앙집권화된권력도없는완벽히탈중앙집권화된시스템이다>라고 발표했다. 2009.2 사토시는 <비트코인 P2P재단>포럼에 올린 글을 통해 <기존화폐의근본적문제는그화폐시스템이돌아가는데필요 한신뢰의부족이다.화폐의역사는신뢰의위반으로가득하다.>·<비트코인은신뢰가아닌암호화 된증거에만기초를둔다>고 밝혔다. 이렇듯 비트코인탄생의 배경에는 달러중심의 통화·금융시스템, 금융자본집단에 대한 불굴의 지속적인 저항이 있다.
비트코인은 낯선사람들끼리 거래하면서도 중개인이 필요없다는데에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다. 분권화된 신용시스템을 창출함과 동시에 해킹으로부터 안전한 장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또다른 특징으로는 설계당시부터 발행총량이 2100만개로 한정돼있는데 21만개의 블록이 생성될때마다, 통상 4년마다 발행되는 비트코인수는 절반으로 줄어 결국 0으로 수렴된다. 이는 인플레이션방지를 목적으로 한다. 사토시의 동료개발자 마르티말미는 비트코인0.2버전개발에 참가했다. 말미도 비트코인에 대해 <독점적인중앙은행의불공정한통화정책과중앙집권의통화공급으로인한위험에서안전하다>·<비트코인은부분지급준비제도와중앙은행의나쁜정책으로인한불안정으로부터안전한화폐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비트코인의 원천인 블록체인은 제3자가 필요없는 <신뢰매커니즘>이다. 블록체인은 장부분산을 통해 투명한 거래내역을 유지하기 위한 방식이다. 예컨대 A와 B가 중간에 은행등 매개체없이 거래를 하는데 분쟁발생을 막기 위해 돈거래완결전에 A와 B간의 거래내역을 시스템내 다른 사용자들과 공유한뒤 이를 검증하는 작업을 거쳐 신뢰성을 확보하는것이다. A가 B에게 암호화폐를 보내면 해당암호화폐를 사용하는 사람들가운데 거래의 검증에 참여하기로 자원한 수많은 검증자들에게 모두 전달된다. 별도 중개자없이 거래하는 운영방식을 P2P라고 한다. 계좌는 익명으로 처리되지만 거래일시·금액은 누구나 볼수 있게 공개돼있다. 시스템적으로 장부조작을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 암호화기술을 사용하고있다.
블록체인기술은 모든 이용자중 과반수합의에 기초하고있다. 비트코인을 전송하면 그사실이 모든 이용자들에게 공개되고 거래가 맞다고 과반수가 검증해주면 그사실은 영구적으로 확정된다. 이검증과정을 채굴이라 부른다. 채굴자들은 새로 발행되는 비트코인을 얻기 위해 시스템의 검증자로 활동한다.
비트코인은 금융자본집단등 반민중세력에게 저항하는 민중의 자주적요구와 최첨단과학기술이 결합돼 창조된 민주적이고 전략적인 첨단의 화폐다. 아직 세계화폐로 인정될때까지는 해결해야할 과제가 많으나 비트코인과 새암호화폐들은 빠르게 한계를 돌파하며 FRB의 미달러체계를 위협하고있다.
현재 미국민중의 화폐발행권·경제주권쟁취를 위한 투쟁이 활발하다. 2008 금융위기이후 사이버상에서 비트코인이 등장했다 면 현실에서는 2011 월가점령시위가 시작됐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자>라는 구호는 그자체로 금융자본집단에 대한 미국민중·세계민중들의 격노를 담고있다. 2018.8 미국내에서 진행된 여론조사는 미국민중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와 혁신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권자1009명에게 <미국이자본주의에서멀어져좀더사회주의로가는것이좋다고생각하느냐아니면나쁘다고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좋다고생각한다>가 36%, <나쁘다고생각한다>가 51% 나왔다. 이는 6년전에 비해 각각 16%증가·13%감소한 수치다. 18세이상 미국인 1505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는 18~29세청년층중 사회주의에 대해 긍정적이미지를 갖고있는 이들은 51%였으나 자본주의에 긍정적이미지를 갖는 이들은 45%에 불과했다. 이러한 수치는 2008 금융위기직후인 2010 JP모건체이스의 수익이 전해에 비해 무려 48%가 증가한 반면 미국채무가 무려 14조달러에 달하는 극단적인 현실을 반영하고있다.<99%를위한미래>저자 사라레너드는 <2008이후우리는은행가를위해정부가잔인한긴축을강요하는것을목도했다>·<우리중상당수에게자본주의는축복이아니라공포이고우리의적은월스트리트와시티오브런던에있다>며 금융자본집단을 겨냥했다.
지난 미대선이후 딥스(딥스테이트 Deep State)대 반딥스간의 쟁투가 벌어지고있다. 오랜기간 치밀하게 변혁을 준비해온 반딥스세력이 딥스청산이후 미국가재건의 방도로 NESARA(National Economic Security And Reformation Act)·GESARA(Global Economic Security And Reformation Act)를 들고있는것으 로 알려져있다. NESARA는 알려진바에 따르면 거액의 금·은등 귀금속에 의해 뒷받침되며 이는 모든 기업·은행을 사는데 사용된다. 뿐만아니라 연준폐지를 내세우고있다. 마침 <위더피플> 과 같은 주권운동세력은 화폐발행에 따른 부채이자로 흘러들어가는 소득세등 불법적인 조세제도반대투쟁을 전개해오며 금융자본집단·딥스의 본질을 폭로해오지않았는가. 금융자본집단과 민중간의 수백년에 걸친 <화폐전쟁>은 지금 결정적국면으로 나아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