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주석은 해방직후 남에 미군정이 수립되는것에 대해 지적하며 미군의 비호하에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이 반인민적책동을 점차 노골화하는것을 우려했다. 해방된 조국의 정세는 대단히 유동적이며 언제 어떤 사변이 일어날지 모를 형편이라면서 그에 대처할수 있는 철저한 준비를 갖춰야한다고 강조했다. 산간지역에 유사시 의거해 싸울수 있는 기지를 꾸리고 생산유격대·자위대등을 광범위하게 조직하고 교양훈련하며 식량·피복·무기등 군수물자를 비축해둘것도 밝혔다. 북조선공산당을 조직한 뒤에는 북을 통일된 민주주의적독립국가건설을 위한 강력한 민주기지로 전변시킬것을 당면과업으로 제시했다. 미군은 당시 38선이북지역에 대해 개입할 명분이 없었다. 1947 소미공동위가 완전히 결렬되고 유엔이 코리아문제에 개입의지를 밝히며 선거를 주장하자 1948 이승만과 김성수의 한민당세력을 제외한 우리민족의 대부분의 세력이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 외세의 개입이 없는 남북총선거안을 제안하고 추진했다. 건국과 함께 북의 소련군은 철수하고 남의 미군 또한 철수하는 과정을 밟았지만 코리아반도에 2개정부의 수립으로 그대결이 불가피해졌다. 남의 2대총선에서 무소속이 절대다수를 차지한 결과, 평화적통일의 가능성을 놓치지않고 북남국회간 대화제안을 했지만 결국 전면전발발을 막지못했다. 정전후 김일성주석은 일관되게 평화통일노선을 강조했다. 조선노동당3차대회에서 평화적통일을 위한 선언이 채택됐다. 4.19항쟁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정국에서 연방제를 제안했다. 그것도 어렵다면 경제위원회를 조직해 물자교역이나 경제협조와 원조라도 하자고 제안했다. 남국회는 어떤 제안도 받아들이지않았다. 남에 군사파쇼정권이 등장하자 김일성주석은 남의 반제반봉건혁명과 남인민대중의 이익을 대표하는 혁명적당의 창건을 강조했다. 또 조국통일3대혁명역량으로, 북의 사회주의역량의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에 의한 남의 애국적민주역량과 국제혁명역량의 성숙을 조국통일의 근본방도로 제시했다. 1987 6월항쟁으로 군부파쇼세력이 결정적타격을 받자 북은 남에 범민족통일대회를 제의해 하층민족통일전선을 강화하는 한편, 정부당국간의 상층민족통일전선의 강화를 병행했다. 이전략은 김일성주석의 급서와 김영삼의 반북반통일대결책동으로 곡절을 겪었으나 1998~2000의 <2차북미대결전>으로 6.15남북공동선언의 결실을 맺었다. 이시기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선군혁명전략으로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과 함께 코리아에서 미군을 철거시키는 민족해방혁명의 과업과 분열된 민족의 단결과 단합을 이뤄내는 조국통일의 과업을 추동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2012 김일성주석탄생100돌을 목표로 계획을 추진하다가 2011.12 강계를 향해 떠나는 <인민행열차>에서 서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