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 김일성주석은 동북항일연군2로군총지휘 주보중의 요청을 받고 코리아항일혁명투사들을 동북지방에 파견할것을 결정했다. 1945.11말경 김일성주석은 단동시내 요영군구사령부를 찾아가 장개석군대와 결전을 앞두고있는 중국인민해방군부대들이 적과의 정면충돌을 피해 도시를 내주고 적의 역량을 분산시키며 농촌지역에 강력한 근거지를 꾸리고 그에 의거해 적후에서 대부대기동전과 유격전을 전개해 적의 역량을 약화소멸할 전술적방침을 제시했다. 이날 김일성주석은 단동지방에서 적의 포위속에 있던 민주연군부대들이 적을 역포위하고 새로운 작전을 벌일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전부대를 신의주로 안전하게 철수시킨 다음 초산·중강을 거쳐 장백지구에 진출하도록 구체적인 조치도 취해줬다. 1946초 김일성주석은 모택동주석의 특사 진운을 만나 약속한대로 중국인민해방군부대들의 전략적이동통로를 열어주며 부상병·환자·노약자들치료대책과 화약, 피복·신발등전략적후방물자를 비롯해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10여만정무기와 탄약·화약·의약품등 군수물자들을 지원했다. 1946.3 김일성주석은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에서 동북민주연군부총사령관겸길료군구사령원 주보중을 만나 동북지역에서 진행하게 될 작전에 대해 토의했다. 1947 7개월동안 조선에서 동북민주연군측을 위해 21만t물자를, 그이듬해에는 30만900여t의 군수물자를 보냈다. 조선을 통과한 인원은 1946하반기 18개부대, 1947 9개월간 1만명이상이 된다. 1948 남양교두를 통과해 약9000명이 두만강을 건너갔고 신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을 경유해 할빈으로 갔다. 장춘·길림·사평·금주·심양등 도시들과 군사적요충지들을 탈환하고 동북전역을 해방하는데서 강건·박락권·최광등 코리아항일투사들이 지휘하는 코리아부대들이 주도적역할을 수행했다. 박락권인솔부대는 적의 대부대를 견제하고있던 최광인솔부대의 후원밑에 장춘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해 5일만에 도시를 완전히 점령하고 만수천명의 적을 살상포로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전투에서 박락권연대장은 흉탄에 맞아 쓰러지는 마지막순간까지 대오의 앞장에서 부대의 공격을 지휘했다. 장춘을 해방함으로써 사평계선에서 포위된 중국인민해방군부대들이 포위에서 벗어나 장춘을 거쳐 할빈·목단강일대로 진출했다. 북중양국부대들이 대부대기동작전과 유격전에 의한 공세를 강화함으로써 대부분의 적들은 도시지역에 고립됐다. 김일성주석은 부대의 일부지휘관들을 평양으로 불러 중국혁명의 승리에 크게 이바지하고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조선인부대들은 중국동북지방뿐아니라 중국최남단 해남도에서도 영웅적위훈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