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초 모택동(1893.12~1976.9)등 중국공산당지도부가 베이다이허에서 여름휴가라는 배경하에 가진 회합이 언제부터인가 중국정치에서 주목됐다. 1953 베이다이허판공실이 설치됐고 1958 베이다이허회의에서 진먼포격전을 결정하고 대약진운동을 전면적으로 실시할것을 결의했다고 한다. 베이다이허회의는 1966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는 이뤄지지않았다. 등소평(1904.8~1997.2)은 종종 베이다이허에서 회견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는데 1992 마지막으로 베이다이허를 방문했다고 한다. 1987·97여름에는 중국공산당 지도부와 서기처서기들이 이곳에 모여 당13·15차대회보고문을 검토한것으로 알려졌다. 등소평은 1982 헌법개정으로 2연임에 <격대지정>의 체계를 세웠다. 1998 후진타오가 부주석에 오르고 2002 총서기와 2003 주석직을 맡게 된것까지는 등소평의 계획아래 있었다. 2007 중국공산당지도부는 시진핑후계구도를 세웠다. 외부에 베이다이허회의는 중국공산당원로들이 모여 당내의 예민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내부적으로 논의하는 자리로 여겨졌다. 7~8월여름 지도부에서 방향을 정하면 가을에 개최되는 당회의에서 당정책으로 결정되고 이듬해 봄에 전인대에서 국가정책으로 시행된다. 서방언론들은 이회의에서 중국공산당내 파벌간의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는것처럼 그려내고 시진핑국가주석이 2017 후계체제가 세워지지않고 3연임이 예견되면서 이회의가 계속 이어질것인지에 대해 조심스러운 전망을 해왔다. 그럼에도 시진핑집권이후 베이다이허에서의 중국공산당지도부의 회합은 계속돼왔다. 이런 전제에서 2018.3 헌법개정으로 시진핑의 3연임체계가 마련된것은 시진핑개인의 뜻이 아니라 당적결의에 기초한다는것을 의미한다. 시진핑집권전인 2012 봄 이미 보시라이사건이 부상했고 시진핑은 집권과 함께 당·국가의 고위관료들의 기율문제·권력남용·부패문제를 해결하지않으면 안됐다. <문화대혁명>이후 중국지도부가 당·국가의 역할을 분리하면서 당의 지도력이 약화됐다. 중국경제의 성장이 둔화하고 미국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며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새로운 환경에서 <강력한당과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인식도 형성됐다. 올해는 중국공산당20차대회를 앞두고 내적으로는 시진핑의 3연임과 외적으로는 전쟁정세의 격랑속에서 진행됐다. 지난 나토정상회의에서 미와 서방측은 중국을 <도전>으로 규정하며 대립노선을 취했다. 회의가 진행될것으로 예견된 8월초 펠로시미하원의장의 대만방문까지 이뤄지면서 중국의 <대만전>이 이회의의 주의제가 될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듯했다. 10.16 중국공산당20차대회가 개최되며 그일주일 앞서 10.9 7중전회가 있을것이라고 발표됐다. 이는 내적으로 시진핑의 3연임이 합의됐음을 시사한다. 이제 남은 가장 큰 문제는 대만통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