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1818~83)는 과학적세계관과 과학적사회주의사상을 확립하고 노동계급의 혁명에 관한 사상을 풍부·심화하면서 이를 실천하기 위해 엥겔스(1820~95)와 함께 1846년초, 노동운동단체들에 미치고있는 가짜사회주의사상조류들의 영향을 분쇄하고 노동계급의 단결을 위해 공산주의자통신위를 설립했다. 통신위는 독일·벨기에·프랑스의 공산주의자들과 영국차티스트운동참가자들과도 연계를 가졌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를 기반으로 1847.6 런던의 정의자동맹1차대회에서 공산주의자동맹으로의 조직개편안을 통과시켰다. 이시기 맑스는 <철학의빈곤>(1847.6)에서 정의자동맹에 영향을 끼치고있던 프루동(1809~65)의 <빈곤의철학>(1846)을 비판했다. 프루동은 <빈곤의철학>에서 소생산이 사람의 천성에 맞는 경리형태이며 자본주의적인 대규모소유는 절취함으로써 생겨난것이라고 주장했다. 맑스는 이에 대해 자본주의적착취의 본질을 가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일으킨다고 지적했다. 또 소생산도 포함한 사적소유를 부정하는 과학적공산주의를 반대해야한다고 한 견해를 반박했다. 1864.9 맑스와 엥겔스의 제의에 따라 국제노동자협회가 설립됐다. 협회는 영국·독일·프랑스·폴란드·이탈리아·아일랜드등에서 온 노동자대표들이 참가한 국제노동계급의 상설적인 중앙조직이었다. 3차대회(1868)에서는 <토지의사적소유가복리와진보의전제조건>이라고 하는 프루동주의자들의 주장을 배격해 그에 해당하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대회에서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전쟁위험이 조성되고있는 조건에서 노동계급에게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투쟁할것을 호소했다. 바쿠닌(1814~76)의 사회민주주의국제동맹이 협회에 가입하길 원했다. 1869 4차대회에서 협회는 모든 분파들은 협회의 이론적인 구상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해도 좋다는 원칙하에 개인가입으로 받아들였으나 이후 협회내에 이들과의 갈등은 계속 커져갔다. 바쿠닌은 협회의 <권위주의>를 비난하고 협회를 계급적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체로 만들자는 입장을 취했고 음모적으로 사업했다. 맑스는 1871 파리코뮌을 프롤레타리아독재정권으로 보면서 프랑스의 혁명지도부, 혁명적당을 조직하고 강화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바쿠닌은 파리코뮌을 국가권위에 반대하는 자유로운 연합으로 봤다. 1872 협회는 바쿠닌을 추방했지만 바쿠닌주의와 지식인의 음모적인 무장봉기를 중시한 <초혁명적>블랑키(1805~81)주의의 결탁등 그영향을 우려해 본부를 뉴욕으로 이전할것을 결정했다. 협회는 1876 맑스의 제의에 따라 해산됐다. 협회는 1872 회의당시 유럽13개국과 미국·호주의 65명의 대표가 참석하는등 크게 장성했으며 노동운동내에 맑스주의를 보급하고 각국에서 맑스주의에 기초한 조직적기반을 갖추는데서 기본적인 임무를 달성했다. 협회는 맑스주의의 승리를 위해 프루동주의와 바쿠닌주의, 영국의 조합주의, 독일의 라살주의등과 투쟁했다. 맑스주의는, 노동계급의 혁명투쟁을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정치경제적기초를 건드리지않는 부분적개량으로 대치하며 자본주의제도를 혁명적폭력으로 청산하는 정치투쟁과 노동계급의 혁명적독재를 부인하는, 루이블랑(1811~82)·프루동·블랑키·바쿠닌·라살등의 기회주의사상에 맞서 옳은 노선과 방침을 밝혀줌으로써 세계노동운동과 국제주의운동을 장성·강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