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주석은 조선인민혁명군총공격전·전인민적봉기·소부대및인민무장대배후연합작전의 조국해방3대노선으로 일제최후공격작전을 준비했다. 8.9 총공격명령직후인 8.15 일제는 항복했다. 일제는 소련이 들어오기전에 미국에 항복서명하기를 원했고 미제는 핵공격으로 동북아에서 전쟁주도권을 쥐려했다. 그결과 전범국인 일본이 아니라 피해국이고 승전국인 코리아가 북과 남으로 분단되게 됐다. 우리민족은 국내혁명전쟁을 한 중국의 경우나, 패전국이 아닌 제국주의국가 프랑스식민지로 항프랑스민족해방전쟁을 벌여야했던 베트남, 독일점령지(속국)로 패전국이 돼 연합군의 군정이 실시된 오스트리아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오스트리아는 단일정부를 수립하고 소·미·영·프의 합의로 군정기를 마감했다. 김일성주석은 하나의 정부 수립을 위해 김구·김규식과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했지만 미제와의 전쟁은 피할수 없었다. 김일성주석은 해방직후부터 자위적무장력을 갖추기 위해 병기공장을 건설할 계획을 제시하고 조선인민군을 조직하도록 했다. 북은 정보전에서 우위에 있었다. 1950.6.25 미제와 남군대의 공격시간에 대한 정보를 갖고있었다고 한다. 북은 남군대가 해주·금천·철원등 여러방향에서 38°선이북지역으로 1~2km를 침입해 들어왔고 그에 대한 반공격으로 내려왔다고 밝히고있다. 2017 북은 미제의 유엔군이 전개할 인천상륙작전등에 대해 정확히 파악한 정보전·첩보전의 비화를 공개했다. 1952.10 통천상륙작전, 1953.1 정형고지전투에 대해서도 북은 이미 사전에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고 대응했다. 북이 코리아전에서 전략만이 아니라 전술적인 주도권을 쥔 배경중 하나다. 국제적으로는 소련·중국과의 관계도 중요했다. 당시 제국주의열강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일본을 후방기지로 들어왔고 북은 열악한 조건에서 전쟁을 치러야했다. 북은 북반부의 <혁명기지>를 지켜내면서 결국 정전협정을 관철했다. 후속회담인 1953.10 정치회담, 1954.4 외무상회담은 결렬됐다. 1956.4 조선노동당3차대회에서 평화적통일을 호소하고 1960 4.19항쟁이후 광복15돌기념행사에서 김일성주석은 전국적인 총선거를 기본으로 연방제방식의 통일까지 남에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당시 남의 혁신세력은 4.19정국에서 1960하반기 점차 주도권을 쥐면서 1961초 민자통(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을 결성했고 학생운동세력은 적극적인 조국통일의 기치를 들었으나 이런 노력은 박정희군사쿠데타로 압살당했다. 김일성주석은 남민중의 혁명역량이 결정적으로 강화돼야한다는 사실을 주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