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분단에 반공노선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승만정권이 4.19정국으로 붕괴되면서 비로소 남지역의 조국통일지향을 가진 민중민주세력은 혁신세력으로서 사회활동에서 중심을 잡아나갔다. 박정희는 고조된 민중운동에 결정적타격을 가하며 쿠데타와 동시에 모든 정당·사회단체의 활동을 불법화해 해산하고 언론들을 폐간했다. 이와 함께 혁신운동의 중심에 있던 인사들을 체포·구속했다. 박정희군사쿠데타정권은 민심을 의식해 이승만정권의 부역자들과 정치깡패들도 잡아들였지만 사회대중당·사회당(준)과 민족일보등 민중민주진영의 혁신세력에 대한 탄압은 더욱 악랄했다.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 사회진보를 위해 투쟁하던 이들은 지하로 들어가지않을수 없었다. 이들은 지하활동노선을 갖고 비합전위정당창당노선을 추진했다. 1962.1 인민혁명당이 창당됐다. 1964.8.14 김형욱중정(중앙정보부)부장은 도예종·양춘우·김단부·배재현등과 언론인·학생41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13명을 기소했고 1심에서 도예종·양춘우에게 2~3년형이, 그외11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가 2심에서 도예종·양춘우·박현채등 6명이 징역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그외 5명은 징역1년집행유예3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1968.8.24 김형욱은 <김종태가전후4차례에걸쳐김일성과면담하고<통일혁명당>을결성해혁신정당으로위장한뒤합법화해반정부및반미데모를전개하는등대정부공격과반정부소요를유발시키려는데주력했다>며 <통혁당(통일혁명당)사건>을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중정은 김종태등 관련자158명을 검거해 73명을 검찰에 송치했고 23명을 불구속입건했다. 김종태·이문규등 3명은 결국 사형을 받았다. 1968.7.20 통혁당전남도위원회사건에 대해 중정은 관련자118명을 검거하고 거물급만 27명이라고 발표했다. 최영도·정태묵·윤상수 핵심3인중 최영도는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했고 다른 2명은 사형됐다. 통혁당사건발표전 군사파쇼정권은 역공작을 벌여 북이 이문규를 데려오기 위해 제주도로 무장공작선을 보내게 만들어 북장교2명을 체포했다. 그들도 사형됐다. 통혁당사건은 당시 서울시위원회와 전남도위원회,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까지 포괄된다. 알려진데 따르면 통혁당창당은 1961말부터 준비됐다. 최영도·정태묵등은 해방정국 인민위원회나 남로당전남도당등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정태묵은 1953 지리산에서 체포돼 1960 7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와 고향에 머물던중 활동에 참여했다. 이들이 지하당조직구성의 적임자로 김종태를 추천하면서 조직이 서울과 경상도지역으로 확대됐다. 1964.3 김종태와 최영도를, 각각 서울시위원회와 전남도위원회의 책임자로 한 통혁당창당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통혁당은 1969.8.25 통일혁명당중앙위원회를 결성하고 창당을 선포하는 선언과 강령을 국내외에 발표했다고 밝혔다. 통혁당은 창당선언에서 한국사회의 모순과 병폐의 근원은 미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와 후진적인 식민지반봉건적인 사회제도에 있다고 밝히고 진정한 자유와 복리를 향유하는 길은 부패변질된 현제도를 전복하고 자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새사회제도를 수립하는것이며 그 계급적기반과 지도이념, 투쟁목적에서 노동계급과 농민을 위시한 근로인민대중의 이익을 대변해 옹호하는것이라고 밝혔다. 또 당면목적은 한국에서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해 부패한 식민지반봉건적인 사회제도를 전복하고 인민민주주의제도를 건립하며 나아가 통일대업을 성취하는것이라고 했다. 통혁당은 남일회담을 반대하는 1964 6.3봉기, 남일협정을 배격하는 1965 8월투쟁, 1967 총선및대선반대투쟁, 미부통령험프리방한반대투쟁, 사토일본총리방한반대투쟁등에 참여하고 합법기관지로 <청맥>, 비합법기관지로 <혁명전선>을 발간했다. 코리아전쟁과 군사파쇼정권의 폭압에서 사라진것으로 보였던 남에서의 혁명세력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재확인됐으며 외세와 친일파를 등에 업고 분단을 통해 수립된 이승만정권과 4.19항쟁을 짓밟고 등장한 박정희파쇼정권에 중대한 정치적타격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