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 항쟁의기관차〉 소미냉전의 종식과 북미대결전의 시작

1991 소련·동구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이때를 기점으로 소미대결전은 북미대결전으로 전환됐다. 국제정세는 북에게 불리했지만 북은 우리민족자체의 역량을 키워 결집하면 오히려 화를 복으로 바꿀수 있다고 봤다. 그렇게 1993∼94 1차북미대결전이 시작됐다. 당시 남은 1987 6월항쟁승리로 변혁역량이 성장하면서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 결성되는등 통일운동이 고조되던때였다. 1985 북은 NPT(핵확산금지조약)에 들어갔고 그의무조항인 IAEA(국제원자력기구)에도 가입했다. 그러자 미국은 일방적으로 북군사시설에 대한 사찰의무를 강요했다. 북은 1993.3 준전시상태선포와 NPT탈퇴에 이어 1993.5.29 화성7, 다음날인 5.30 화성8·화성9를 발사했다. 화성7은 일본열도의 북쪽으로는 훗카이도, 남쪽으로는 오키나와까지 타격할수 있는 미사일로 이란·파키스탄에 수출을 앞두고 시험발사의 의미도 있었다. 화성8은 사거리2000km의 준중거리미사일로 동중국해를 넘어 미영토인 괌으로 날아갔고 화성9는 사거리4000km의 중거리미사일로 동해를 건너 북태평양의 미영토인 하와이까지 날아갔다. 미국은 북의 영변핵시설을 타격하겠다고 대응했다. 당시 클린턴정부는 북의 미사일발사를 접한후 전쟁시뮬레이션을 확인했다. 미측이 엄청난 인적피해·물적피해를 입고 참패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미국은 북에 회담을 제안해 1993.6.2~11 뉴욕에서 북미회담이 진행됐다. 이어 1994.6.15 카터전대통령이 미특사로 방북한다. 이때 김일성주석은 카터를 통해 전격적으로 남북수뇌회담을 제안, 분단이후 첫남북수뇌회담개최가 합의됐다. 그러나 1994.7.8 김일성주석의 급서에 김영삼정권이 <조문파동>을 일으켰고, 남북관계는 파탄났지만 북미대화는 계속 진행됐다. 북미회담이 예정됐던 7.8 미대표단은 클린턴대통령의 애도성명을 발표하며 조문했다. 연기된 회담은 8.5~12 개최됐고 10.21 북미제네바합의로 이어졌다. 북미대결전은 전쟁국면으로 치달았다가 북의 군사적공세에 결국은 미국이 외교국면으로 전환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1990년대중반 미는 반북고립압살책동을 계속 벌였고 북은 <고난의행군>으로 200만명이 목숨을 잃는 <총포성없는전쟁>을 치러야했다. 북은 제국주의와의 전쟁을 대비하며 군사력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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