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2000 북은 <고난의행군>을 이겨내며 2차북미대결전을 치렀다. 북이 새롭게 2차공세를 취하지않을수 없었던 이유는 미국이 북침핵전쟁계획인 5027-98작전계획을 공개하고 경수로건설약속을 지키지않는등 북미기본합의를 위반해서다. 미국의 남정부를 통한 반북책동도 심화됐다. 이에 북은 더이상 말로는 안된다고 판단, 2차군사적공세를 취하며 약속을 이행하도록 강제해야했다. 특히 5027-98작전은 <북>이란 국가를 없애고 북지도자의 통치를 종료시키며 북을 <대한민국>통치아래 재조직하겠다는 노골적인 대북선제타격계획이다. 1997 북은 김일성주석의 3년상을 마쳤고 남은 대선에서 김영삼문민파쇼정권이 김대중<화해협력>정권으로 교체됐다. 1994 북미기본합의대로 1997.8 경수로건설착공식은 했으나 클턴턴정부는 의도적으로 공사를 지연시켰다. 북은 비공식적으로 1998.5 파키스탄에서 수소탄·원자탄시험을 실시하고, 공식적으로 8월 첫인공위성인 광명성1호를 발사했다. 위성발사체의 개발에서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기술적으로 구별되지만 초기개발은 미사일개발의 연장선에 있다. 광명성1호발사는 군사적기술로 보면 사실상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발사한것으로 궤도에 안착시킨 인공위성을 위성탄두(FOBS)로도 볼수 있다. 북이 이렇듯 <고난의행군>을 이겨내며 미본토에 핵미사일공격을 가할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것이 확인되자 북미대결국면은 결정적으로 바뀌지않을수 없었다. 클린턴미정부는 1999 핵시설로 알려진 금창리를 시찰해 북미기본합의파탄의 빌미로 삼으려했다가 금창리가 빈터널이었다는 사실에 오히려 정치적타격을 입었다. 이사건은 <20세기의트로이목마>로 세간의 웃음거리가 됐다. 미전국방부장관 페리가 방북한뒤 작성한 페리보고서에 따라 클린턴정부는 대북정책을 고립압살전략에서 평화공존전략으로 바꿀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세에서 2000 6.15남북공동선언이 채택되고 10.12북미공동성명이 발표됐다. 6.15공동선언은 낮은단계연방제와 연합제의 공통점인 화해협력의 단계부터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통일하기로 합의한 통일의 이정표였다. 10.12북미공동성명합의당시 김정일국방위원장의 특사인 조선인민군 조명록총정치국장이 군복을 입고 백악관을 방문해 화제가 됐다. 성명에는 구체적인 북미외교관계수립을 위해 클린턴대통령이 연내 방북한다는 약속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그해말 미대선에서 부시가 당선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다음해 9.11사건이 터졌고 부시정부는 북을 <악의축>으로 규정하며 북미관계는 다시 경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