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 항쟁의기관차〉 민주화를 향한 열망과 비상계엄확대조치 

박정희군사파쇼정권은 1972.10.17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해산·정당및정치활동의중지등 헌법의 일부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12.13 비상계엄령을 해제한지 보름만에 12.27 <유신헌법>을 제정하며 종신집권을 꿈꿨다. 1975.5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방·부정·반대·왜곡, 개헌청원·폐기를 주장하거나 그에 찬동·선동하는 행위와 이런 내용을 방송·보도하거나 표현물을 제작·배포·판매·소지하는 일체의 행위 역시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금할수 있는 <긴급조치9호>를 발동해 <계엄>과 다름없는 상태를 유지하며 사회의 민주화요구를 철저히 억압했다. 민주인사들의 연행과 투옥이 잇따르던 상황에서도 1977~79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는 계속 활발해졌고, 1979.8 YH무역주식회사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는데 김경숙노동자가 경찰폭력으로 사망했고 신민당총재였던 김영삼이 이에 항의하다 국회에서 제명됐다. 이는 야당의원전원사퇴를 불러왔고 전국적시위확산의 계기로 됐다. 10.16 부산대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10.18 마산지역까지 번져가자 박정희는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 10.20 마산·창원일대에 위수령을 내리고 민간인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이때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다가 1981.1.24 해제될때까지 무려 456일동안 유지되며 <한국>역사상 최장기를 기록한다. 한편 시위는 부산·마산에서만이 아니라 서울등 전국적으로 벌어졌고, 따라서 박정희는 부산·마산에서만이 아니라 서울에서도 계엄을 검토하고 군대를 투입하려했다. 미국무부문서는 1군단30보병사단·3군단20보병사단·4군단26보병사단등이 수도방위사령부 통제아래 비상대기했다, 모든 장병이 공포탄을 받았고 서울로 진입할 태세를 갖추고있었으며 보안사령부는 군인들과 학생들의 접촉을 막기 위해 전방부대의 휴가와 통행증을 취소했다고 언급했다. 군사파쇼에 대한 저항이 폭발적으로 고조되며 민중항쟁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10.26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됐고 10.27 비상계엄령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전날인 10.25 베시미육참차장은 <만약한국에서특별한사건이발생해도미한관계에는변화가없다>며 박정희의 부재를 암시했다. 김재규는 미CIA(중앙정보국)의 직접적지휘를 받는 위치에 있었으며, 피살1달전 글라이스틴과 만나 <정권교체>를 논의했고 피살당일 14시경에도 만났다. 10.31 밴스미국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박정희의후계자를선정할때미국에상담을요청하면주저하지않고의견을말하겠다>고 내정간섭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0.26사건이후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이 계엄사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다. 12.12 전두환은 계엄사령관으로 된 정승화를 김재규의 내란에 방조했다는 혐의로 대통령재가 없이 체포했다. 당시 계엄법에 따르면 비상계엄의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은 계엄지역내의 모든 사법사무를 관장하는만큼 정승화는 실질적인 최고권력자였고, 정승화를 연행하려면 계엄사령관의 상급의 재가를 받아야했으나 위법적으로 미국은 만일 군내부충돌로 내전발생시 조선의 <남침>이 우려된다며 노재현당시국방장관을 종용해 날이 밝을때까지 진압병력이 출동하지않도록 했다. 미국의 비호아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권력을 장악했다. 민중의 반발이 심화되자 비상계엄을 1980.5.17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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