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5.17 오후9시 중앙청에 집총한 군인들이 도열하고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진 상황속에서 국무회의가 열리며 특별한 토의 없이 비상계엄확대안이 통과됐다. 전두환일당은 비상계엄확대조치직전 김대중등 37명을 내란음모등의 혐의로, 김종필등 9명을 권력을 통한 부정축재혐의로 체포하고 5.18 새벽 무장한 33사단병력으로 국회를 점거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최규하는 당일 특별담화를 내고 <계속되는사회혼란을이용한북한공산집단의대남적화책동이날로격증>·<남침의결정적시기조성획책>을 언급하면서 지역계엄을 전국비상계엄으로 전환선포한데 대한 명분을 조작했다. 5.22 판문각에서 열린 남북총리간대화를위한제8차실무대표접촉자료에서 조선은 사태에 대해 <한민족이,한혈육이총칼에짓밟히는것>이라고 분노하는 한편 최규하담화를 두고 <남조선내부에서일어나는문제를우리는상관안하겠다>·<우리를걸고드는것을인정하라>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5.17부터 모든정치활동의중지및옥내외집회시위의금지, 언론출판보도및방송의사전검열, 각대학의휴교령, 직장이탈및태업파업의금지등의 조치가 실행됐다. 전두환일당은 5.20 예정됐던 임시국회를 무산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며 정부의 실권을 장악해나섰다. 광주에서의 학생시위가 광주민중의 반파쇼항전으로 격화되자 7공수여단은 5.17 전라남북도주요대학을 점거했고 5.18 아침 전남대정문앞에서 열린 비상계엄과 휴교령 반발시위를 강제해산했다. 5.19 11공수여단이 추가배치됐고, 장갑차와 헬기까지 시위진압에 투입됐다. MBC와 광주세무서가 불타는등 시위가 거세지자 5.21 전남도청앞·전남대정문부근에서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했다. 무장항쟁으로 전화되며 시민들은 계엄군을 일시적으로 몰아낸뒤 5.22 시민수습대책위를 꾸리고 계엄군과의 협상을 시도하는 한편 자치질서를 수립했다. 5.23~26 도청광장에서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열리고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때 광주는 철저히 봉쇄됐다. 전두환은 시위대가 무장투쟁을 장기화하기 위해 <폭도>2000여명이 산악지대로 도주했다, <간첩>이 광주에 침투해 공작활동을 하고있다는등의 허위정보로 진실을 왜곡하려들었다. 5.22 미백악관은 <한국>관련최고위급회의를 소집해 <질서회복>을 위해 무력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5.23 미국방정보국은 보고에서 <현재상황은여수순천반란사건과유사>·<정부는보다적극적으로강경하게현재상황을진압해야>한다고 했다. 미국은 <<한국>사태를이용한조선의도발가능성에대비한예비조치>로 기존에 이란및소련을 상대하던 미7함대항공모함<코럴시호>를 5.25 부산으로 급파했다. 또 예정보다 2개월 앞당겨 E3A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2대를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공군기지로 보내 조선을 대상으로 한 경계임무에 돌입했다. 이같은 조치가 조선을 자극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전두환이 전방을 염려하지않고 광주에 집중할수 있도록 판을 깔아줬다는것이 일반적분석이다. 군은 5.27 새벽3시30분을 기점으로 미<한>연합사의 승인아래 20사단과 31사단을 동원한 최종진압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감행했다. 이과정에서 17명의 시민군이 사망, 227명이 연행됐다. 6.1 카터미대통령은 CNN인터뷰에서 <때로는안보의중요성이인권의중요성보다우위에서야한다>고 망언했다. 광주학살은 반미감정을 크게 격발시켰고, 온민중이 반제반파쇼항쟁으로 일떠서는 계기로 됐다. 반북·분단이데올로기로 연명하던 전두환군사정권은 1987.6 민중항쟁의 승리로 붕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