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반대해 무장도발을 일삼았고 전쟁을 선동하던 이승만정부와 미군은 1950.5 2번의 기자회견이후 전쟁에 대해 언급하지않았다. 5.10 신성모국방장관이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의남침이임박>했다고 밝혔다. 이틀뒤에는 이승만이 기자회견에 나서 <(북한군이38°선부근으로집결하고있다며)한국은이문제를유엔과미국을통해해결할것>이라고 밝혔다. 그뒤 전쟁이 발발하는 6.25까지 <한국>정부는 북의 남침준비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않았다. 1952 미언론인 스톤은 책<코리아전쟁비사>에서 조선군의 남침을 유도하거나 조선군의 공격을 자극한후 이같은 조선군의 남침 또는 공격이 미국여론에 주는 영향을 이용해, 조선군의 남침에 대응하지않을것이라는 6.25전쟁이전의 미국의 정책을 바꾸는것이 보다 현명한 방안이라고 이승만이 누구로부터 조언을 받은것인가라며 의문을 던졌다. 이승만의 미국인고문 올리버의 서신과 미국무장관고문 덜레스의 발언등을 봤을때 이승만은 이전쟁을 <북한군의남침>에 의한것으로 보이게 해야했다는것이 요지다. 미국의 선전포고권이 행정부가 아닌 의회에 있고 미국이 1964 베트남전을 일으키기 위해 <통킹만사건>을 조작해 의회를 설득하지않으면 안됐던것처럼, 미군이 코리아반도에 다시 들어갈 방법은 조선의 남침을 유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미국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충실하게 이행했다는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우리민족의 통일독립의지가 무엇보다 강했기때문이다. 도발에 아무 대응도 하지않고 가만히 있는것은 외세의 개입으로 분단된 조국을 통일할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또 남지역에서는 이미 미군정과 단선단정을 반대해 유격대가 조직돼 무장항쟁을 벌이고있었다. 1946~47, 1948~49 이미 코리아는 사실상 전쟁터였다. 진짜 전쟁터로 되는걸 피한것은 전적으로 조선의 <인내심>에 기인한다. 조선은 피할수 없는 전쟁을 앞에 두고 평화적통일을 위한 제안을 했다. 스탈린이 요구했고 조선도 원했던대로, 조국전선(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중앙위확대회의에서 8.15해방5돌을 계기로 민주주의적원칙에서 남북총선거를 실시할것을 제의하는 <평화적조국통일방책추진에관한호소문>을 채택했다. 이를 남측에 제안하기 위해 조국전선대표단이 파견됐으나 6.11 대표단은 남으로 내려가다가 체포·압송됐다. 6.15 조선노동당은 이승만이 제안을 반대하는 조건에서 조선의 최고인민회의와 <대한민국>의 <국회>를 단일한 전조선적입법기관으로 연합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회가 개원하는 6.19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에서 <평화적조국통일추진에관하여>라는 결정을 채택했다. <대한민국>외에 어떤 통일독립정부도 원하지않았던 이승만은 조선의 제안을 철저히 묵살하며 미군이 코리아반도에 다시 들어올 시기인 전쟁의 발발만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