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 항쟁의기관차〉 극우반동의 뿌리, CIC와 서북청년단

일제패망후 우리민족의 각지역에서의 인민위원회조직과 해방된 조국에서의 독립국가수립을 위한 활동은 1945.9.8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폭압적으로 가로막혔다.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다음날인 9.9 서울역에 내려 조선총독부로 향했다. 이때 미군전투부대24군단소속정보기관 CIC(주<한>미군방첩대)가 남에 주둔했다. 1946.2 CIC는 첩보·정보수집·사찰등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코리아에서 식민지배체제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극우청년단체들을 조직·강화하는것을 중요하게 봤다. 한보고서에서 CIC는 <한국정치의힘에서어떤정당이자신의대의에열렬히충성하며<더러운일>을수행할강력한무장청년단체가없다면,다른정치조직에게아무런위협이될수없다>고 썼다. 1946 서북청년단이 발족했고 1947.12.10 서북청년단총회에서 이승만은 <사상이건전한여러분이나서야한다>고 추켜세웠다. 서북청년단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비호아래 <좌익>을 색출하는데서 폭력·약탈·살인·강간·방화·테러등, 방식을 가리지않았다. 범죄적행위들은 극단적반공이데올로기로 인해 정당화됐다. 대구노동자파업·제주민중항쟁·보도연맹사건등에 개입해 20만~40만명이상의 민간인과 비기독교인들을 좌익이라는 이유로 학살했다. 1947.11.14 유엔총회가 남단독선거를 결의하자 하지미군정청군정사령관은 문봉제서북청년단회장을 불러 1948.5.10 단독선거의 홍보지로 활용될 극우성향의 신문 <평화신문사>설립을 약속하는등 정치경제적지원을 아끼지않았다. 미군정은 <승공통일>을 주창하는 반북호전인사로 친미사대의식이 가장 철저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세웠다. 평화통일을 촉구하던 세력은 모두 이승만의 정적들이었다. 최대정적이던 김구는 1949.6.26 남민전(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민전(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조국전선(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으로 통합되는 대회가 열린날 서북청년단간부출신의 CIC요원이자 극우테러조직<백의사>비밀암살단원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제주에서는 1948 4.3무장봉기를 시작으로 1954.9.21까지 수만명의 제주도민이 무력충돌과 토벌과정에서 무참히 살육되는 대참극이 벌어졌다. 1948.4 미군정은 제주도민을 대상으로 한 <대량살육>작전을 지시했고 11월 미군은 정찰기를 동원해 서북청년단을 주축으로 한 토벌대에 무기와 장비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작전직전까지 <괴잠수함출현설>등으로 <초토화>작전의 당위성을 조작했다. 서북청년단원1000여명이 제주에 상륙해 경찰이나 경비대옷을 입고 인민무장대진압에 몰두했다. 100여개중산간마을이 불태워졌고, 명령에 따라 해안지대로 이주한 중산간부락주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집단학살됐다. 한편 여수에 주둔하고있던 <국군>14연대는 제주무장봉기진압명령을 거부하고 군사봉기에 나섰다. 제주항쟁·여순봉기등 무장투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12.1 <대한민국>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규제, 관련된 사람들을 사형등 중형에 처할수 있도록 법제화했다. 인민무장대와 군경토벌대간의 군사적충돌은 38°선부근에서도 계속되면서 코리아내전위기가 심화됐고 결국 1950 코리아전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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