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 항쟁의기관차〉 평화통일요구 억누른 희대의 자작테러

1983.10 미얀마아웅산폭탄테러로 장관·차관·기자·경호원등 <한국>측에서만 17명이 폭사당하고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건당시 전두환은 수행원들만 먼저 보내고 마지막에 차를 타고 가다가 화를 면했다. 사건직후 이를 <북괴소행>으로 규정했고 비상경계태세를 발동했다. 사건은 전두환군사파쇼정권과 미레이건정부에 의해 치밀하게 조작됐다. 사건다음날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대공수사관련자들은 테러증거를 준비해 급히 미얀마로 날아갔다. 미얀마정부는 중간수사발표에서 조선을 배후로 특정하기를 주저했는데 안기부는 <서울에서왔다>고 주장하는 범인을 설득해 진술을 번복하게 만들었다. 당시 미얀마는 대통령 네윈이 궐위되고 국가정보국이 해체되다시피해 권력공백상태에 있었다. 이렇듯 주권을 온전히 행사할수 없는 조건에서 미얀마는 진실을 묵인할수밖에 없었다. 미얀마정부가 이일로 조선대사관을 강제철수하고 국교를 단절한것은 조선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고 미일<한>3각체제를 강화하고자 했던 미국의 의도에 부합한다. 전국적으로 <북괴>를 규탄하는 관제시위가 벌어지면서 1980 광주민중항쟁이후 확산된 <한국>내에서의 반미투쟁이 위축됐고 반북의식이 고취되며 평화통일요구가 억눌렸다. 1986.9 김포공항테러사건으로 5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 벌어졌는데 당시 치안본부장 강민창이 미얀마아웅산폭탄테러사건과 유사하다며 <북괴의소행또는북괴의사주를받은불순분자의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사건직후 현장이 말끔히 치워졌고 치안본부가 나서서 사건을 은폐했다. 일례로 현장에서 천장보수공사를 하다 직격탄을 맞은 피해자의 몸에서 나온 90개의 볼베어링(납탄)을 <스테인레스쓰레기통파편>이라고 조작했는데, 이는 특수공작원들이 <북파공작>에 사용하는 대인지뢰<클레이모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위한것이었다. <클레이모어>는 <한국>군과 미군에서만 사용하는 살상무기였다. 강서경찰서계장 심동수는 현장에 출동해 증거인멸의혹을 제기했지만 강민창에게 협박을 받고 <북한제<콤포지션B>폭약이터졌다>는 내용의 현장감식소견서를 거짓으로 작성했다. 보안사는 사건발생직전 김포공항에 입국한 일반인40여명을 서빙고분실로 연행해 고문등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그중 <북괴간첩>으로 지목됐던 한민간인은 공교롭게도 경찰총포화약수사에 협력했던 사람이었다. 이사람을 경찰이 <대테러협력자>로 보증해주면서 <북괴간첩>음모가 분쇄됐고, 사건은 흐지부지하게 마무리됐다. 1987.11 직선제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탑승객115명이 전원사망한 KAL기사건이 터졌다. 1988.1 레이건미정부는 김현희의 거짓진술과 안기부수사발표문을 바탕으로 KAL기폭파가 조선이 저지른 테러라고 모략했다. 안기부는 이를 적극 활용해 <무지개공작>을 계획했다. 공개된 문건에 따르면 <무지개공작>의 <목적>은 KAL기사건을 <북괴의테러공작>으로 폭로해 <북괴를위축시키고> 이를 이용해 <국민들의대북경각심과안보의식을고취함으로써가능한대선사업환경을유리하게조성>해 대선직전 <반북소동>으로 군사파쇼정권을 연장하려는것이었다. 그외에도 공작과정이 상세히 기록됐다. 전두환파쇼정권에 의한 조작사건들은 미국이 조선을 <테러국가>로 지정하는데 이용됐고 나아가 2000년대 <테러와의전쟁>프레임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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