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 항쟁의기관차〉 멈추지않는 미의 대조선침략기도

미국은 1948~50초에 걸쳐 작성한 극동침략계획<A,B,C계획>에서 1단계는 미군과 <한국>군의 조선침략전쟁으로부터 시작하며, 2단계는 재무장한 일본군과 장개석군대도 정식 참가해 전쟁을 만주로 확대, 3단계는 우랄까지의 전시베리아를 점령할것을 계획했다. 애초에 이전쟁이 조선에만 국한된것이 아닌 극동지역을 비롯한 아시아나라들을 노린 침략전쟁이고 새세계대전으로의 확대까지 노렸다는것이다. 1950.6.25 인민군대의 결정적인 반공격이 개시됐고 3일만인 6.28 서울을 <해방>하고 중앙청에 공화국깃발을 띄웠다. 연속타격으로 7.20 군사전략상거점인 대전을 <해방>했다. 미국은 짜놓은 각본대로 추종군대들을 대대적으로 코리아전에 동원할 목적으로 6.27 유엔<결의>83호를 통과시키고 7.7 유엔<결의>84호를 날조해 유엔군과 유엔군사령부를 조작했다. 7.14 이승만은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맥아더에게 이양했다. 9.13~15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통일국가수립을 목표로 전쟁후과를 최소화하고자했던 조선의 의지와 다르게 결국 전면전으로 전화됐으며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중국의 참전도 불가피했다. 김일성사령관은 <적들의진공속도를최대한으로지연>시키면서 반격을 준비하도록 했고 10.24 <재진격으로넘어가>·<적의역량을부단히소멸약화>시키는 방침을 선포했다. 1951.5 전쟁이 장기성을 띠면서 <완강한진지방어전>방침을 제시했다. 전쟁기간 유엔을 간판으로 미육군의 1/3, 공군의 1/5, 태평양함대의 대부분과 15개추종국가군대등 200만명의 무력이 동원됐다. 태평양전쟁에서 소모한 군사물자의 11배에 달하는 7300만t이상의 군수물자가 소비됐다. 끊임없는 소모전을 벌일데 대한 조선의 전략적방침과 인민군대의 결사항전은 당시 제국주의연합군대의 월등한 군사력을 압도해 피동에 빠뜨렸으며 1953.7.27 정전협정에 조인하지않을수 없게 만들었다. 미국의 침략기도파탄과 조국통일의 목표가 실현되지않은 상황에서 정전은 또다른 전쟁의 시작이었다. 미<한>은 정전협정체결이 예견된 6월부터 미<한>상호방위조약체결논의를 시작했고 정전직후 8.8 가조인, 10.1 체결하면서 사실상 정전협정을 파기했다. 정전협정4조60항은 협정이 완료된 날로부터 고위급대표들이 3개월이내 외국군대철수와 코리아반도평화를 논의할것을 명시했으나 이에 앞서 미<한>상호방위조약체결로 미군의 영구주둔을 합법화시켰다. 조약은 코리아반도와 그주변에 미군무력을 배치하고 미군이 <한국>군을 장악통제하며 코리아반도<유사시> 연합군사작전을 진행한다는것을 골자로 한다.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서 <한국>이라는 영구적인 군사기지는 필수적이었다. 1953.9 미8군사령부가 용산으로 이전했고 1957 일본에 있던 유엔군사령부가, 1978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용산에 들어왔다. 미군의 법적지위를 규정하고 형사재판권자동포기조항등 대표적불평등내용을 담은 SOFA(주<한>미군지위협정)가 1966.7 타결됐다. 1954 유엔군사령부주관으로 <포커스렌즈>연습이 시작됐고 해마다 조선을 겨냥한 합동군사연습이 광란적으로 벌어졌다. <상호방위>의 미명하에 코리아반도는 언제 또다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대조선핵전쟁연습의 장으로 전락했다. 나아가 미군은 <한국>사회의 자주적발전을 가로막고 대미종속을 심화시켰으며 우리민중의 생존권마저 무참히 유린·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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