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 항쟁의기관차〉 〈제2코리아전〉도발과 조선의 원칙적대응 

미국은 1962 쿠바미사일위기를 일으키고 1964 통킹만사건을 날조해 베트남전쟁을 일으켰다. 제국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간 격돌이 세계적범위에서 거세게 벌어지는가운데 1960년대 미국은 박정희군사파쇼정권을 내세워 <한>일관계개선으로 미일<한>3각체제를 획책했다. 미<한>합동군사연습은 1961 <독수리>연습이 <한국>군1개대대와 미군1개지역대로 시작됐다가 1969 <포커스레티나>연습부터 대규모로 확대, 정례화 됐다. 미국이 1958.1.29 주<한>미군기지에 핵무기를 반입했다고 발표한이래 10년간 수많은 핵무기들이 반입돼 1960년대말 8종의 전술핵무기 약950발이 주<한>미군기지에 집중배치된것으로 알려졌다. 조성된 정세에서 조선은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을 다하면서 전략적으로는 무장력강화, 특히 핵·미사일개발에 주의를 기울였다. 1962.12 김일성주석은 쿠바미사일위기를 계기로 경제국방건설병진노선을 채택했으며 이를 위해 인민경제개발7개년계획도 3년연장했다. 1963.2 대덕산초소를 찾아 <일당백>구호를 제시하고 인민군대의간부화·현대화와 전민무장화·전국요새화의 4대군사노선방침을 세웠다. 1968.1 미해군첩보선USS푸에블로호가 원산앞바다에서 조선영해를 12.2㎞ 침범해 정찰임무를 수행하다가 조선인민군경비함과 어뢰정에 나포됐다. 1968당시 미는 코리아반도와 베트남에서 2개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전쟁전략을 견지하고있었다. 미군은 항공모함3척과 전함25척으로 편성된 초대형함대를 동해작전수역에 출동시키고 동시에 각종전투기·폭격기등 200대이상으로 편성된 공습편대들을 주<한>미공군기지들과 주일미공군기지들에 집결시켰다. 항공모함3척중 핵추진항공모함<엔터프라이즈>함을 주축으로 편성된 항모타격단을 원산항에서 불과 24㎞ 떨어진 조선의 영해안으로 근접시켰다. 미태평양지구총사령관은 <전면폭격>등을 담은 세부비상계획까지 세우며 조선을 상대로 한 전쟁을 적극 검토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김일성주석은 2.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성명<미제침략자들이감히덤비려든다면섬멸적인타격을가할것이다!>에서 <우리인민과인민군대는미제국주의자들의<보복>에는보복으로,전면전쟁에는전면전쟁으로대답할것>·<미제국주의자들이우리의경고에도불구하고정세를격화시키며끝끝내전쟁의길로나간다면이번에는그들이더큰참패를당하리라는것을단단히각오해야할것>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조선은 소련에서 도입한 대함미사일P15<테르미트>를 실전배치한 상태였으며 2단형지대공미사일S75<드비나>도 공개했다. 추후 1968.10.20 지대공미사일<번개>개발에 성공했다. 미국은 <2개의전쟁전략>을 떠벌렸지만 베트남전에서 고전하면서 정치·경제·군사등 사회전분야에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있던 상황에서 2개전선을 감당할수 없었다. 조선은 <강대강>으로 단호히 대응했고 협상끝에 12월 항복서를 받아내고 코리아에서의 전쟁을 막았다. 사건뒤 조선의 무력행동을 우려한 미국은 1968.11~1969.4 대조선공중정찰을 200여차례 벌였는데 이과정에서 1969.4.15 미해군소속 EC121정찰기가 조선인민군비행대에 의해 격추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미내부에서 격추대응을 두고 혼란을 벌였지만 이미 수세에 몰려있었다. 소련은 타협했지만 조선은 원칙적으로 맞섰다. 1960년대말 미국은 <2개코리아>정책인 <닉슨독트린>을 선포하면서 무력으로 코리아반도전역을 식민지화할수 없다는것을 사실상 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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