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 항쟁의기관차〉 경제명맥장악의 강력한 수단

사회성격·사회제도에 따라 화폐의 기능·역할이 달라지므로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에 맞는 화폐의 형태및규모·액면가치· 발권제도·유통체계등을 확립하게 된다. 봉건조선말기 은본위제에 기초한 근대적화폐제도를 내오기 위해 1892 신식전화통용제한법을 제정공포했다. 봉건국가재정고갈·화폐남발·외국화폐유통의 폐단등으로 상평통보(엽전)에 기초한 당시 화폐제도는 더이상 유지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근대적은행업은 19세기말부터 발생했으나 그후 일제의 정치적지배와 은행자본의 침략에 의해 파산됐다.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후 중앙은행의 업무는 1911.3 조선은행에 이관됐으며 해 방이후 1945 한국은행으로 바뀌었다. 일본계인 제일은행이 1902~04 발행한 은행권에는 국호로 <COREA>를 표기하 고 1908~09 우리민족적인 소재의 도안으로 지폐를 발행해 침략적기도를 은폐하고자 했다. 일본금융자본이 화폐발행권을 틀어쥐자 조선인이 설립한 은행들은 거의 파산하거나 일본은행에 흡수되고 토지·광업·어업등 산업전반이 일본자본에 장악됐다. 1920년대 조선의 전체회사납입자본중 일본인회사자본이 약70%에 달했으며 1923 일본과 조선사이에 관세까지 철폐돼 일본의 자본·상품이 자유롭게 이동했다. 1930년대 침략전쟁의 확대로 전시물자공급을 위한 <식민지공업 화>의 결과 일본독점자본이 경영하는 대규모공장이 공업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해방후 1948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1950.6.12 한국은행이 설립됐다. 전쟁중인 7월 한국은행권이 처음으로 발행됐다. 이승만정권은 대외원조와 국채발행이 어려움에 처하자 국가재정확충을 위해 1953.2 화폐개혁조치를 취하고 한국은행으로부터 신권을 넘겨받는다. 화폐교환을 위한 시장의 난맥상은 접어두고라도 물가는 여전히 계속 올랐고 서민들의 생활은 나아진것이 없었다. <원조>를 해주는 미국은 남코리아화폐의 평가절하를 요구했다. 1953.6 미달러화의 가치는 3배 올랐고 미국의 영향력은 그만큼 커졌다. 박정희정권초기 1962 취해진 통화개혁도, 산업자본·금융자본이라고 할만한 자본시장도 형성돼있지않은 조건에서 달러의 지위를 높여주는것외에는 딱히 역할이 없었다. 달러를 빌릴수 있는 사람들만 돈을 벌었다. 이승만정부시기 농촌에 금융조합이 있었으나 그비중은 보잘것이 없었고 상환할 가능성이 없는 고리사채였다. 1956 부채를 가진 농가는 전농가의 86.7%였고 농가부채중 연이자율이 60%이상인 부채가 현금60.1%, 현물54.5%였다. 이에 대한 개혁조치로 농협·농업은행이 설립됐으나 그다지 나아진것은 없었다. 박정희정권은 1972 사채의 제도금융화를 골자로 하는 8.3긴급금융조치 <경제의안정과성장에관한대통령의긴급명령15호>를 발표했다. 이조치에 따라 동결된 사채총액은 3456억원이었으며 이는 1971말 총통화의 31.9%와 국내신용의 30.1%에 상당하는 규모였다. 사채의 제도금융화는 1960~70년대 산업화와 함께 은행업도 현대화해야했기때문이다. 그에 따른 비용부담은 결국 국가몫이었다. 세금과 <인플레이션택스>라고 하는 물가상승으로 민중들에게 돌아갈 분배몫의 희생으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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