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5 항쟁의기관차〉 중국의 영토완정과 대만위기

중국의 영토완정과 대만위기

손문의 주도로 건국될 당시 중화민국은 중국을 대표하는 근대국가였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이끌었던 당시 레닌의 코민테른은 중국이 봉건사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못하고 자본주의적발전이 진행되지못해 노동계급의 역량이 축성되지못했다는 판단으로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추동했다. 손문은 레닌과 사회주의에 호의를 가지고 공산주의세력과의 합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중국국민당을 힘있는 민중적당으로 개조시키고자했다. 그러나 손문사후 장개석은 당내의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하면서 군권과 당권을 장악해들어갔다. 당권을 쥐고있었던 왕정위는 이후 일제에 부역하면서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친일분자로 전락했다. 국민당내 공산당지지자들은 국민당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장개석의 국민당과 거리를 두고 훗날 중국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건국에 함께했다. 중국공산당은 일제침략에 맞서 장개석의 국민당과 2차국공합작을 이뤄냈다. 일본패망이후 장개석은 공산당과의 3차내전에서 패배하고 대만으로 쫓겨났다. 2차세계대전이후 전세계적범위에서 사회주의세력이 확장되는 상황에 코리아와 중국은 나라가 분단되면서 최전선이 됐다. 중국공산당의 대만에 대한 군사적진출가능성을 코앞에 둔 시기 코리아전이 발발했다. 코리아전이후 미국과 대만의 상호방위조약이 추진되자 다시 양안관계의 위기가 고조됐다. 미국은 패색이 짙어진 베트남전쟁에서 벗어나는 한편, 중소분쟁을 촉진시키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후 미국에서 제정된 대만관계법은 사실상 미·대만간의 동맹조약에 다름없다고 인정됐다. 미국은 대만과 비공개적인 합동군사연습도 지속해왔다. 대만은 19세기말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일본에 복속됐던 지역이다. 1945 일제패망후에는 중국국민당·중화민국의 치하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폭력적으로 진압당했다. 1949 계엄령이 선포된뒤 1980년대까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없는 최장기계엄을 기록했다. 장개석부자의 통치이후 대만출신인사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오게 됐지만 친미세력의 지배구조에 큰변화는 없었다. 중국의 마지막 남은 영토완정의 대상인 대만은 미국의 대중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지렛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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