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은 1991 미사일개발정보가 미국에 노출되지않도록 하기 위해 중국에서 시험발사를 했다. 북의 미사일개발사실이 외부에 드러난것은 1993.5.29 북이 처음으로 일본열도를 향해 화성7호를 발사하고 다음날인 5.30 사거리2000km의 준중거리미사일 화성8호와 사거리4000km의 중거리미사일 화성9호를 발사하면서다. 화성8호는 무수단에서 동중국해를 넘어 미국영토인 괌으로 날아가, 괌북쪽 약100km 떨어진 서태평양해상에 떨어졌다. 화성9호는 무수단에서 동해를 건너 북태평양의 미국영토 미드웨이제도를 넘어, 하와이에서 서쪽으로 약400km 떨어진 해상에 떨어졌다. 화성7호는 이란·파키스탄에 수출을 앞둔 시점에서의 시험발사이기도 했는데 노토반도앞바다에 작은 부표를 맞추면서 그명중률을 과시했다. 미사일은 탄도비행마지막단계에 탄두가 동체에서 분리돼 초고속으로 낙하하면서 미사일항법기능을 높여 명중률을 끌어올렸다. 원래 사거리1000km로 예상됐지만 프리깃함이 표적이 될 부표를 설치할수 있는 해역인 노토반도앞바다의 사거리500km지점으로 정해졌다. 사거리1300km인 화성7호는 일본열도를 타격권안에 두고 북으로는 홋카이도에서 남으로는 오키나와까지 타격할수 있다. 당시 화성7·8·9호발사후 1993.6.2~11 뉴욕에서 북미양자회담이 진행됐다. 1991.12.24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김일성주석을 승계해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됐다. 12.25 러시아대통령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해체를 선언하는 전날이었다. 1993.3 준전시상태선언과 NPT탈퇴, 5월말 미사일시험발사는 김정일최고사령관의 지휘아래 실시됐다. 1994.6 카터전대통령이 방북해 김일성주석을 만났으며 이어 북남수뇌회담이 제안됐다. 1994.7 김일성주석의 서거에도 불구하고 북미대화가 계속 진행돼 1994.10.21 북미제네바기본합의가 채택된다. 1990년대중반 북은 미국과 미사일양자회담을 하는 동시에 북·미국·남·중국의 4자회담을 진행했다. 북미양자회담이 미사일과 관련된 군사회담이었다면 4자회담은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회담이었다. 김일성주석의 서거직후 미국은 <지연전술>을 쓰며 북을 고립압살하려고 책동했다. 북미기본합의는 10년기한으로 이뤄졌지만 2000말 클린턴대통령의 방북이 실현되지못하며 꼬이기 시작했다. 2001 9.11사건과 2002.1 부시의 <악의축>국정연설에 이어 2002.10 켈리특사의 방북으로 북핵시비가 다시 국제이슈로 부각됐다. 2003 NPT탈퇴유보를 철회하면서 새로운 국면이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