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차례 미사일발사시험을 한 후 북은 1998 새로운 도전을 준비한다. 1997 김일성주석의 3년상이 지나고 남에도 김영삼정권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1994 북미기본합의의 경수로건설은 1997.8 착공식을 했으나 클린턴정부의 <지연전술>로 매우 더뎠다. 1998.8중순 미언론에서 핵개발의혹이 제기됐는데 이시기 북은 후에 <동해위성발사장>으로 알려진 곳에서 첫 인공위성의 발사를 준비했고 1998.8.31 발사체 백두산1호(<대포동>1호)에 실려 인공위성 광명성1호가 발사됐다. 위성발사체의 초기개발이 미사일개발의 연장선에 있지만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위성발사체와 미사일은 기술적으로도 구별된다. 2009 북의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는 은하2호의 발사를 사전에 예고했다. 북은 당시 오바마정부의 입장을 확인하려했다. 2001.10.23 북외무성대변인담화는 <신의있는조미대화의재개는부시행정부가최소한클린턴행정부의마지막시기에취했던입장수준에도달해야논의될수있는문제라고본다>고 밝혔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2012 김일성주석탄생100돌을 목표로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과 조국통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뤄낼 계획을 추진했다. 2010.9 김정은위원장으로 이어지는 후계체계를 확립했다. 오바마정부는 <두여기자사건>과 클린턴의 방북등 6자회담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전략적인내>노선을 취하며 더이상 의미있는 진전을 이루지않았다. 중국의 핵실험과 미사일개발이후 중미수교로 이어지는 과정은 북미관계에 적용되지않았던것이다. 중미수교를 위해 미국은 대만과의 관계를 포기했는데 코리아와 관련해서는 그선택을 하지않았다. 2006.7.5 7.4미독립기념일에는 기만전술로 미사일발사훈련을 진행하고 미를 압박했다. 미국·일본의 정찰이 무수단리의 위성발사에 집중된 상황에서 그허점을 찌르며 북은 무수단리의 1발을 포함해 총7발의 미사일발사훈련을 다원적으로 진행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정지위성을쏘아올려통신문제를해결하는것이나의소원>이라며 우주개발의 원대한 포부를 밝힌바 있다. 미AP평양지국에 의하면 2016.8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의 과학연구실장은 10년안에 달에 <공화국>기를 꽂을것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