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 항쟁의기관차〉 반파쇼세력의 승리와 20세기혁명의 대고조기

소련중심반파쇼세력과 파시즘세력간의 대결

2차세계대전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소련중심의 반파쇼인민전선과 독일중심의 파쇼세력간의 대결전이었다. 1922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파쇼권력이, 1933 독일에서 히틀러나치권력이 수립됐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인해 특히 독일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932 등록된 실업자가 600만명으로, 이들 가족까지 포함하면 당시 독일인구의 1/3이 살인적인 생활고에 시달리고있었다. 1933 아돌프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했고 1932말부터 1935까지 고용창출을 위해 총52억마르크를 지출하는 정책을 통해 독일민심을 장악했다. 정부지출정책은 다른 경제부문을 통제·강화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히틀러나치권력은 1933 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불법화하거나 당을 해체하며 독일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선진적인 독일노동자·민중을 야수적으로 탄압하는 한편 군수산업을 강화하고 징병제도입으로 군대를 키우며 전면적인 재무장을 추진했다.

한편 1935.8.20 코민테른7차대회에서는 <파시즘의공세와노동계급의반파쇼투쟁에서코민테른의과업>를 채택했다. 우선 프롤레타리아통일전선의 기초위에 광범한 반파시즘인민전선의 창설을 위해 노력해야한다,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근로농민·도시소부르주아·인텔리겐차를 묶어야한다고 강조했다. 또 공산당·사회민주당의 행동통일·정치통일을 중시하며 반동세력과의 투쟁을 강화하는 한편 좌익사민주의노동자·활동가·조직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세워야한다고 역설했다.

2차세계대전의 전조는 곳곳에서 감지됐다. 1937.7.7 일본은 노구교사건을 일으키며 중일전쟁을 개시했다. 독일은 1938.3 오스트리아를 병합했으며 독일·이탈리아는 스페인에 계속 무력간섭을 했다. 독일의 침략적행위에 대한 소련의 투쟁의지는 확고했다. 1938.3 파시스트의 침략확대를 저지하고 새로운 세계전쟁방지를 위해 집단행동에 참가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소련은 <모든국가,특히강대국이세계를집단적인힘으로구원하는문제에대해확고하고도명확한입장을취한다면오늘이라도늦지않다>고 강조했다. 독일은 연이어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침략을 준비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천혜의 요새인 주데텐란트를 장악하기 위한 독일의 침략에 영국·프랑스제국주의국가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켜 독일의 서진을 막고 소련으로의 동진을 유도했다. 소련은 1935 소련·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의 군사대표자회의를 소집해 독일침략으로 생긴 희생국을 방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심의하자고 제안하며 집단안전보장정책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양보정책을 선택한 영국·프랑스는 독일·이탈리아와 1938.9 뮌헨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분할·몇개국경지역독일할양을 결정하며 소련측제안을 묵살하고 파시즘의 발호를 부추겼다. 미국은 국무장관 코델헐을 통해 워싱턴주재독일대사에게 독일의 요구에 관한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하는것을 미국이 지지한다고 함으로써 뮌헨협정을 사실상 찬성했다. 뮌헨협정의 여파로 1939 스페인에서 파시즘체제가 확립됐다.

1939.3 독일은 영국·프랑스의 동의 없이 체코슬로바키아전역을 점령했고 폴란드침략에 착수했다. 그제서야 영국·프랑스는 파시스트의 침략위협에 시달리는 나라들의 국가적인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성명과 함께 소련에 원조조약체결을 제안하며 소련과의 교섭을 시작했다. 영국·프랑스의 교섭은 히틀러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독일무력이 소련으로 향할것을 기대하며 진행됐다. 영국·프랑스는 소련에만 일방적으로 전쟁참가의무를 지우려했다. 1939.8 모스크바3국군사대표교섭을 통해 최종적으로 영국·프랑스가 소련과 연합할 의지가 없다는것이 확인됐다. 특히 영국은 독일정부와 비밀리에 교섭을 진행하며 불가침조약, 세계적규모의 세력권분할협정체결을 제안하고있었다. 소련은 서쪽으로는 독일, 동쪽으로는 일본으로부터 위협을 받고있었으며 서방제국주의국가들이 소련붕괴를 획책하는 조건에서 소련방위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전술적조치로 1939.8 소·독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1939.9.1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며 2차세계대전이 시작됐다. 독일은 50여개사단·2000여대탱크·2000여대비행기를 동원해 폴란드를 불의에 습격했다. 폴란드동맹국인 영국·프랑스는 국내여론의 압박으로 9.3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은 23개사단에 불과했고 영·프연합군은 110개사단이나 됐지만 싸우지않았다. 영국·프랑스는 번번이 독일과 군사적대결을 피해 독일의 서진을 자초했다. 독일군은 1940.4.9 덴마크·노르웨이를 습격했고 5.10 서부전선의 벨기에·룩셈부르크·네덜란드를 점령했다. 벨기에레지스탕스세력은 완강한 투쟁으로 5.27까지 버텼으나 결국 5.28 독일에 항복했다. 독일은 프랑스·독일변경에 구축한 마지노방어선을 우회해 프랑스를 침략했다. 6.10 이탈리아도 프랑스남부를 침공했다. 6.14 파리가 함락되자 6.22 프랑스는 항복했다. 프랑스북부는 독일이 점령했으며 남부는 친독괴뢰비시정권이 수립됐다. 7.10 <브리튼전장> 즉 영국에 대한 공습을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영토침략에 주력했다. 1940 소말리아·수단·케냐를 침략했다. 이집트에서는 영국군혼합부대에 패배했다.

일본은 1937.7.7 노구교사건을 감행하며 중국을 침략했으며 1938 하싼호사건, 1939 노몬판사건을 일으키며 소련에 대한 무력공격을 시작했다. 1940.9 독일의 프랑스점령으로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병력이 철수한 틈을 타 일본은 인도차이나를 침공해 점령했다. 1940.9.27 독일·이탈리아·일본은 3국동맹을 체결하며 <유럽신질서>·<대동아공영권>을 망상했다. 1941.4 독일은 유고슬라비아·그리스를 점령했다. 일본은 1941.12 진주만을 습격하며 태평양전쟁을 감행했으며 필리핀·영국령말레이시아·홍콩·싱가포르·네덜란드령동인도·오스트레일리아령파푸아뉴기니를 침공해 동남아시아를 장악했다. 반면 미국은 미드웨이전등 해전에서 승리하며 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유럽의 서부·북부를 빠르게 점령한 독일은 침략의 예봉을 소련으로 돌렸다. 1941.6 독일이 소련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소·독불가침조약은 파탄났다. 히틀러는 <전격전쟁>계획을 세워 겨울까지 전쟁을 종결지으려했다. 독일이 북부·서부유럽을 장악한 조건에서 독일에 맞서 싸울 유일한 세력은 소련뿐이었다. 소·독전쟁의 결과가 사실상 2차세계대전을 결론지었다.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모스크바·키예프등 3방면으로 공격을 전개했으며 1941.7 리투아니아전역·몰다비아·라트비아일부·서부백러시아·서부우크라이나를 점령했다. 당시 소련측요원인 리하르트조르게가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할것이라는 정보를 1940과 1941.3 2차례에 걸쳐 소련측에 보냈다.

독일은 전시경제체제로 완전히 바꾼 상황이었고 서유럽전역에서 자원을 강탈해 전쟁에 동원하고있었다. 독일은 독일군 150개사단을 포함한 파시스트군 190개사단을 소련에 집중배치했다. 소련은 1939~41동안 병력을 3배로 증강해 새롭게 150개사단을 편성했으나 평화경제체제를 유지하고있었고 1941.4 소·일중립조약을 체결했으나 극동국경방어로 병력을 서부전선에 집중시킬수 없는 조건이었다. 소련공산당은 6.22·23 병역의무자군입대·전시체제화·탄약생산동원계획을 발표했다. 6.30 전연방공산당중앙위·최고회의간부회·소련인민위의 공동결정으로 국가방위위원회가 창설됐다. 국가방위위원회의장은 이오시프스탈린서기장이 맡았으며 국방정책·전시경제계획화·군대창설보급등의 임무를 맡았다. 7.3 스탈린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총동원계획을 발표하며 전선에서의 용기와 영웅정신의 발휘, 후방에서의 헌신적노동을 호소했다. 당은 <모든것을전선을위하여!모든것을승리를위하여!>라는 구호를 내세워 소련노동자·민중을 전투에로 불러일으켰다. 소련노동자·민중은 전선지원청원서와 모스크바·레닌그라드노동자가 주창한 국민의용군창설운동으로 화답했다. 개전후 6개월동안 붉은군대와 해군에 약100만명의 공산당원과 200만명의 콤소몰(전연방레닌주의청년공산주의자동맹)성원이 참전했으며 1941말 붉은군대내에는 130만명의 공산당원이 소속됐다.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독일군에 맞서 소련민중들은 용맹히 맞서 싸웠다. 1941.8부터 전개된 스몰렌스크전투는 2개월간 계속됐다. 전투가 한창 벌어지던 9.18 서부방면군의 4개보병사단이 세운 전투공로로 친위대칭호를 받으며 최초의 소비에트친위대가 생겼다. 스몰렌스크·모스크바·칼리닌·오룔에서 징집된 50만붉은군대는 방어용시설을 구축했으며 이후 공세로 전환해 독일군8개사단을 격퇴했다. 7월부터 시작된 레닌그라드전투에서는 16만명의 레닌그라드민중이 국민의용군에 가담했다. 독일군은 8월말 레닌그라드근교에 진출했고 9월초 북쪽에서 진격해온 핀란드파쇼군대와 함께 시를 봉쇄했다. 레닌그라드민중은 2년5개월에 걸친 대봉쇄에서도 굴하지않고 파쇼세력에 완강하게 맞서 싸웠다. 독일파시스트군대는 남부의 키예프·오데사를 점령하려했으나 영웅적투쟁에 막혀 결국 실패했다.

9월말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향해 총공격을 단행했다. 독일군은 77개사단중 전차부대·기계화부대로 23개사단을 동원해 공격했다. 국가방위위원회는 10.19 수도가 포위상태에 있음을 선언하고 <모스크바를적들의손에넘겨주지말자>고 호소했다. 모스크바당위원회는 7월에 이미 12만명에 달하는 12개사단의 국민의용군을 조직했다. 다수의 당기관·정부기관이 모스크바외지역으로 소개됐으나 전연방공산당중앙위정치국·소련정부·국가방위위·최고사령부등은 수도에 남았다. 이시기 조르게는 소·독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첩보를 타전했다.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않고 만주이남으로 병력을 철수할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소련정부는 시베리아에 주둔하고있던 40여개사단을 서쪽으로 이동시켜 모스크바방어전에 투입했다.

1941.11 10월혁명24주년기념회의가 개최됐고 붉은광장의 레닌묘앞에서 붉은군대의 열병식이 거행됐다. 스탈린은 연설에서 그동안의 간고했던 전투를 총화하고 독일현실과 국제정세를 해설하며 전쟁의 성격을 <해방전쟁>·<정의의전쟁>이라고 정의했다. 이어 <위대한레닌의승리의깃발이여러분을이끌기를!>·<독일강도무리를철저히격파하기위해!>·<독일침략자들을진멸하라!>·<레닌의깃발아래승리를향해앞으로!>를 외치며 붉은군대를 고무했다. 부대는 열병식이 끝나자마자 전선으로 투입됐다.

1941.11말까지 독일에 의해 소련유럽지역대부분이 점령됐다. 독일점령지역에서는 당을 중심으로 한 파르티잔운동이 조직됐다. 1941.6.29 전연방공산당중앙위원회의 지령을 근거로 이미 당의 지하중앙기관이 적배후에서 파르티잔부대창설작업을 착수하고있었다. 전연방공산당중앙위는 7.18 <독일군후방에서활약할전투조직에관하여>결의문을 채택하며 적후방에 당의 지하조직을 만들어 파르티잔운동에 <광범한규모와전투적적극성>을 부여하자고 호소했다. 그결과 1941말 독일점령지역에 250개가 넘는 지하당조직들이 활동했고 이들의 지도를 받는 2000개이상의 파르티잔부대가 전투행동을 전개했다. 파르티잔부대들은 파시스트군사령부·경비대괴멸, 창고·기지·자동차·열차·교량·통신시설의 폭파·파괴등을 단행했다. 전투지역에서 붉은군대, 피점령지에서 파르티잔부대의 활약상으로 독일의 계획은 좌절되고 무력을 갖추기 위한 시간을 벌수 있었다. 1941.12 소련은 모스크바근교에서 반격을 개시해 최초로 독일군을 패배시켰다. 이를 시작으로 붉은군대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서부방면에 모스크바·툴라·칼리닌을 해방했고 레닌그라드·오룔·스몰렌스크의 일부를 해방했다. 모스크바전투승리의 결과 영국·미국과의 반파시스트연합을 공고히 하는 조건이 마련됐다.

이미 독일의 침략책동에 질겁한 영국·미국은 소련과 공동행동에 공식적으로 합의했다. 1941.7.12 소련·영국은 <독일과의전쟁에서공동행동을취하는문제에대하여>라는 협정을 체결했다. 1941.12 일본의 진주만습격을 계기로 반파쇼연합형성이 더욱 촉진됐다. 1942.1.1 소련·미국·영국등 26개국이 파시스트블록을 분쇄하기 위해 군사·경제자원을 동원한다는 선언을 체결했다. 1943 영국·미국은 유럽에서 서부전선을 구축한다는 협정서를 체결했다. 미국의 본색은 하리트루먼미상원의원의 <독일이승리하면우리는러시아를원조해야할것이고만일러시아가승리하면독일을원조할것이다>는 말로 잘 알수 있다. 그러나 1943 영국·미국은 약속을 이행하지않았다. 그결과 독일병력의 대부분이 동부전선에 집중되면서 소련은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1942말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방어전이 한창일 때 반격을 준비했다. 최고사령부는 스탈린그라드북서쪽·남쪽에 대부대를 집중배치했다. 1942.11 남서전선·돈강전선의 각부대들이 일제히 공세로 전환했고 이후 돌파구를 뚫으며 기계화부대가 돌진했다. 11월말 소련은 33만명이상의 적부대를 포위했다. 독일군의 구출작전을 막아낸 소련군은 총반격으로 전환해 포위된 적부대섬멸작전을 개시해 대승했다.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의 승리는 파시스트블록을 뒤흔들었고 파시스트국가들의 소련침략계획을 분쇄했다. 1942~43 소련측은 유럽지역의 가장 큰 남부도시인 보로네시의 전역과 서부도시 쿠르스크의 대부분을 해방하고 48만㎢에 달하는 지역을 해방시켰다.

한편 1943.5 코민테른해산에 관한 결정이 내려졌다. 코민테른을 해산한 이유는 각나라들의 공산당·진보정당의 혁명역량이 충분히 성장해 국제당의 중앙집권적영도가 없이도 자기나라혁명을 스스로 해나갈수 있으며 반파쇼연합이 이념과 제도를 초월해 광범위하게 형성되는데에 코민테른의 존재가 걸림돌이 돼서다. 코민테른은 1차세계대전때 분열됐던 공산주의세력을 다시 결속했고 맑스주의의 순결성을 지켰으며 각국의 미숙했던 공산당·진보정당을 지도·엄호하며 그역사적임무를 다했다.

1943여름 쿠르스크전투가 시작됐다. 쿠르스크전투는 역사상 최대규모의 기갑전으로 가장 치열했던 전투중 하나로 꼽힌다. 독일군은 <성채작전>하에 50개사단으로 편성된 전차·자주포2700대, 비행기200대, 대포1만문등 총90만병력을 확보해 침략했다. 소련은 쿠르스크주변지역에 7개군을 배치하고 후방에 예비부대를 집결시켰으며 3000마일이 넘는 십자형참호를 만들어 대포·대전차포를 배치하고 40만지뢰를 매설하는 방어작전을 실행했다. 파르티잔운동중앙사령부의 지도하에 파르티잔병단과 여단부대는 적의 통신·교통주요군사목표물을 파괴했으며 8월 전투가 한창일 때 파르티잔100만병력은 <레일전쟁>을 전개했다. 9월 작전첫날밤 2000개레일이, 9월중순에는 20만개레일이 파괴됐으며 <레일전쟁>2단계의 결과 1만1000량열차폭파, 6000량기관차, 4만대차량·플랫폼, 6500개교량을 폭파해 독일군의 수송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쿠르스크전투의 승리결과 독일군은 전략적주도권을 완전히 잃었고 이때부터 종전까지 소련에 단한번도 승리하지못했다.

2차세계대전의 전체국면이 근본적으로 전환된것이다. 소련은 파죽지세로 반격하며 빠르게 소련과 주변지역을 해방시켰다. 전투승리는 이탈리아에도 영향을 미쳐 영국·미국이 이탈리아에 쉽게 상륙할수 있었으며 이탈리아파르티잔부대중심의 민중봉기는 무솔리니정권을 붕괴시키는 위업을 달성했다. 파시스트블록의 약한고리가 붕괴됐다.

1943.11~12 소련·미국·영국정상회담인 테헤란회담이 개최됐다. 테헤란회담은 공동전쟁방침을 확인하며 3개나라의 협력을 밝힌 선언문을 채택했다. 특히 유럽지역에서 서부전선구축문제가 논의됐다. 서부전선은 약속과는 달리 1943에도 구축되지않았고 1944.5.1이전에 서부전선을 구축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허나 이조차 지켜지지않아 소련이 사실상 홀로 악전고투했다. 결국 서부전선은 소련의 승기가 확실해진 전쟁후반기 1944.6 노르망디상륙작전으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1944 소련공산당은 소련영토에서 파시스트군을 완전히 쓸어내고 유럽의 모든 민중들을 파시즘에서 해방하고 히틀러군대를 독일본토에서 완전히 물리친 뒤 전쟁을 종결짓는다는 임무를 하달했다. 붉은군대는 맹공을 퍼부으며 독일군의 주력부대를 분쇄하고 발트해연안지역쪽으로 쫓아냈다.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의 봉쇄에서 완전히 해방됐다. 소련군은 1944.3 루마니아국경까지 진출했으며 여름에는 파시스트군대에 점령당한 지역의 3/4을 해방시켰다. 서부전선이 형성된 후에도 독일군의 2/3는 소·독전선에 있었다. 소련군은 7월 백러시아수도 민스크를 해방하고 얼마후 리투아니아수도 빌니우스를 해방했다. 소련군의 승리와 독일군의 패퇴에는 붉은군대를 비롯한 정규군의 역량만이 아니라 피점령지역의 파르티잔군대의 영웅적투쟁과 후방에서의 철도폭파를 비롯한 대규모작전이 단행됐기에 가능했다. 1944.7~8에는 우크라이나지역을 해방시켰다. 소련군은 소련경내를 해방시킴과 동시에 해방군자격으로 서쪽으로 진격했다. 1944.6 루마니아영토에서 군사행동이 이뤄졌으며 7월에는 폴란드영내에 진입했다. 9월에는 불가리아파시스트정부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10월에는 유고슬라비아영내에 진입했다. 1945.2에는 헝가리수도 부다페스트가 해방됐다.

1945.1 독일군은 서부전선공세로 작전을 바꿔 영국군과 미군을 공격했다. 궁지에 몰린 처칠영국총리는 소련에 구원을 요청했다. 붉은군대는 발트해에서 카르파치아산맥에 걸친 1200km의 광범한 전선에서 대공세를 개시했다. 소련군은 폴란드·헝가리전역에서 파시스트군대를 격퇴하고 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대부분지역을 해방했으며 덴마크민중들의 반파쇼투쟁을 지원했다.

1945.2 소련·미국·영국정상회담으로 얄타회담이 개최됐다. 회담에서 국제연합운영절차·전범처리·독일분할관리등 문제가 논의됐다. 특히 독일의 <무조건항복>조건이 작성됐고 독일나치즘을 근절하고 장차 독일이 평화를 깨뜨리는것을 결코 허용해선 안된다는 결의문이 채택됐다.

처칠은 소련의 승리가 확고해지자 어떻게 하면 영국군·미군이 붉은군대보다 빨리 독일·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등에 입성할수 있을지만 궁리했다. 처칠은 이미 항복한 독일군의 무기를 모아 히틀러군에 재지급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하며 소련·반파쇼인민전선을 배신했다.

1945.4 베를린작전이 개시됐다. 10일에 걸친 총공격끝에 4.30 독일국회의사당안으로 돌진해 건물원주·창문에 붉은기를 걸었다. 베를린은 함락됐고 독일파시스트권력은 붕괴됐다. 1945.5.8 독일은 무조건적인 항복문서에 서명했고 5.9 소련군은 체코슬로바키아수도 프라하를 포위하고있던 독일군을 제압하며 최후의 작전을 완료했다. 2차세계대전의 특히 유럽지역에서의 승리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반파쇼인민전선에 합류한 각국민중들의 대승리였다.

유럽피점령지역에서의 반파쇼투쟁

2차세계대전시기 소련과 가장 인접한 지역인 동유럽은 공산당·진보세력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의 파르티잔군사활동이 활발했다. 특히 소련을 엄호하며 공동투쟁을 벌였다.

2차세계대전시작과 동시에 폴란드는 공산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농민이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독일의 점령지로 전락했다. 부르주아반소정권이었던 폴란드정부는 소련의 원조를 거절했고 독일의 공격에 대항하지못했다. 영국·프랑스는 폴란드와 체결한 상호원조조약에도 아무런 원조를 하지않음으로써 폴란드가 독일수중에 떨어지는것을 방조했다.

폴란드에 대한 점령을 시작으로 동유럽국가들은 독일군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폴란드부르주아세력은 1939.10 프랑스에 망명정부를 구성했으며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자 1940.6 영국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반소입장이었던 망명정부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1941.2 소련과 상호원조·지지에 관한 소련·폴란드협정을 체결했다.

영국·프랑스는 전쟁직전까지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있는 나라들을 반소전쟁에 끌어들이려했다. 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를 상대로 벌인 제국주의국가들의 음모는 결국 실패했다. 3국은 1939.9·10 소련과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으며 1940.6 진보세력이 권력을 잡으면서 소련에 편입될것을 소련정부에 요청했다. 1943 독일의 전세가 기울게 된데는 이들지역에서의 파르티잔투쟁이 강화돼서다. 우크라이나·백러시아·크리미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파르티잔부대의 투쟁이 전개됐다. 1943말경 무장한 파르티잔의 수는 100만명을 넘어섰고 일부는 파르티잔병단으로까지 발전했다. 루마니아의 애국적포로들은 의용병사단을 만들어 독일에 대항했으며 루마니아·헝가리·핀란드등의 공산당은 전쟁에서 파시스트동맹을 패배시키고 정부를 전복시킨다는 정책을 실행했다. 파시스트군에 포함돼있던 슬로바키아·루마니아군의 병단규모부대원전원이 연합군측에 투항하기도 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국민해방통일전선, 불가리아에서는 조국전선, 그리스에서는 민족해방전선, 루마니아에서는 민주주의적국민연합, 헝가리에서는 독립국민전선이 조직돼 소련의 해방전쟁에 결합해 조국을 해방시켰다. 1944상반기 폴란드에서는 10개병단이 넘는 파르티잔이 활동하고있었다. 파르티잔운동발전의 일환으로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헝가리 각공산당의 요청에 따라 원조활동을 벌였다. 1944중반기 붉은군대와 함께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군대가 조국해방을 위해 서쪽으로 진군했다. 폴란드1군은 붉은군대와 함께 폴란드해방을 위해 전투했으며 파시스트군대를 몰아낸 후 노동자당의 지도하에 폴란드국민해방위원회를 조직했다. 1944.7 수립된 위원회는 폴란드최초의 노동자·민중정권이었다. 8월 루마니아공산당과 민중들은 무장봉기로 파시스트정부를 전복했다. 친독정권수상 안트네스크를 비롯한 반역자들을 체포하고 주요거점을 점령했다. 루마니아정부군은 붉은군대에 합류에 독일군을 수도에서 몰아내고 자국영토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 투쟁했다. 9월 불가리아노동당의 지도하에 수도 소피아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인민전선정부가 수립됐다. 10월 붉은군대는 요시프브로즈티토를 사령관으로 하는 유고슬라비아국민해방군과 협력해 영내에 진입했으며 베오그라드를 해방했다. 티토는 1941.6 파르티잔부대를 창설해 직접 부대를 지휘했다. 독일군의 티토군에 대한 토벌작전과 극우민족주의군대인 체트니크군에 맞서 가열한 투쟁을 전개했다. 1943.7 이탈리아 무솔리니정권이 몰락하자 이탈리아군이 점령했던 유고슬라비아의 영토를 장악했다. 그러자 히틀러군단은 유고슬라비아내독일군주둔병력을 20만명으로 증강했고 동유럽파시스트군대16만을 포함해 총36만의 파시스트군대를 동원해 티토의 파르티잔군대를 공격하기 위한 <번개작전>을 개시했다. 1943.11 티토는 유고슬라비아민족해방위를 구성해 왕정을 대체한다고 선언했다. 계속되는 파시스트군대의 공격에도 살아남은 티토군은 1944여름 스탈린·처칠과 회담을 가졌다. 티토는 1944하반기 군부대4개·사단52개등 80만명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있었으며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소스니아등지에서도 독일에 맞서 투쟁했다. 1944.10 독일군 1만6000명이 죽고 8000명이 포로가 됐으며 1주일간의 치열한 시가전끝에 독일군의 마지막거점이 유고슬라비아파르티잔프롤레타리아여단에 의해 함락됐다. 소련이 베를린을 함락한지 일주일후 티토는 <유고슬라비아에대한파시스트의공격이시작된지49개월3일째가되는오늘,유럽의침략자독일이항복을했다>고 방송했다.

1944.10 그리스민중은 공산당의 지도아래 독일군을 분쇄하고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그리스민중은 1940.11 이미 이탈리아침략군을 퇴각시킨 역사적경험이 있었다. 1941.4 독일군에 의해 영토가 다시 점령되자 1942.12 그리스민족해방전선은 전국인민해방군을 창설해 반파쇼투쟁을 가열하게 전개해 많은 지역을 해방했고 최초의 인민민주정권기관을 설립했다. 1944.3 민족해방전선과 여타조직들은 민족해방정치위원회를 결성해 임시정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1944.5 정기국회에서 인민민주주의적국가체제가 수립됐다. 그리스공산당의 승리에 불안해진 영국은 군대를 그리스영내에 진주시켰고 10월 망명정부가 귀국해 1944.12 인민해방군해체에관한명령이 발포됐다. 결국 영국·미국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정부군과 인민해방군사이에 그리스내전이 벌어져 1948까지 계속됐다.

한편 1940.6 프랑스 페탱정부는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으며 사실상 항복했다. 프랑스의 2/3는 독일군점령, 1/3은 친파시스트비시정권이 들어섰다. 이지역도 1942.11 독일에 의해 점령됐다. 프랑스부르주아정권은 전쟁이 발발하기 시작할 때부터 독일파시스트에 맞서 싸우기보단 반공정책을 시행하며 반역적으로 나왔다. 1939.9.26 공산당불법화법령을 발표해 공산당당원8000명체포·노동조합620여개해산과 수백개공공조직활동을 금지시켰다. 1940.7 프랑스공산당중앙은 선언문을 통해 프랑스애국세력의 통일전선구축과 저항운동의 조직화를 통한 국가재건을 호소했다. 공산당은 지하인민위원회를 결성해 시위·파업·태업등을 조직했고 1940가을 OC(전투조직)를 조직했다. OC는 약1년사이에 29건의 철도폭파를 비롯한 사보타주투쟁을 전개했다. 이즈음 샤를드골은 자유프랑스를 조직해 반파쇼투쟁을 호소했다. 1941.5 노르·카레지역에서 탄광노동자10만명이 파업한 후 프랑스최초로 점령군에 대한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1941.7 공산당중심의 NF(민족전선)가 결성됐다. NF에는 공산당·사회당·기독민주당·급진사회당등이 포괄됐다. 프랑스공산당은 FTPF(의용병과파르티잔)군대를 조직하는데서도 주도적역할을 했다. FTPF는 적군용열차전복·수문폭파·적소부대급습등의 군사활동을 전개했다. 1942.5 프랑스공산당은 전국적인 무장봉기준비에 착수했다. 1942.11 프랑스공산당과 드골지지자들사이의 공동행동에관한협정이 체결됐으며 1943.5 CNR(전국레지스탕스평의회)이 결성됐다. CNR은 무장투쟁·전민중적봉기를 방침으로 결정했다. 프랑스공산당은 1943.4 인민봉기준비를 위한 주요지침을 발표했고 1944초 프랑스레지스탕스는 50만명의 FFI(국내프랑스군)로 통합됐다.

1944여름 무장봉기로 피점령지역절반을 해방시켰고 6.6 연합군의 노르망디상륙작전을 방조했다. 8.18 공산당은 대중봉기결행을 호소하는 호소문을 발표했고 노동총동맹·기독교노동조합연맹은 총파업을 단행했다. 파리지구FFI사령관이자 공산당원인 홀탕귀는 파리해방을 위한 공세명령을 내렸다. 이전투로 3000여명의 레지스탕스대원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을만큼 봉기는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에 연합군총사령관 드와이트아이젠하워는 급히 2기갑사단을 파리에 배치했고 히틀러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8.25 독일군사령관이 항복하면서 프랑스는 해방됐다.

파시스트국가내에서의 반파쇼투쟁

전쟁기간 히틀러파시즘은 더욱 강화됐고 경제는 국가독점경제체제로 전환됐다. 전쟁초 독일의 승리는 독일사회전역에 국수주의·전체주의사상을 확산시켰다. 반면 독일내반파시즘운동은 극심한 탄압으로 매우 취약해져있었다. 전쟁기간에는 반파시즘활동가20만명이 독일나치당의 테러로 희생을 당했다. 독일공산당당원30만명중 15만명은 탄압당하고 검거된채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으며 당원수만명이 학살됐다. 1939.12 독일공산당정치강령이 발표됐다. 독일공산당은 독일인의 민주적자유·사회적요구실현, 파시스트독재·독점자본반대, 자유·민주·평화애호의 독일을 위한 투쟁에서 노동운동의 통일단결과 광범한 인민전선결성을 강조했다. 1940 독일국내 비합법당활동의 실천적지도부를 재건했다. 반면 독일사회민주당내에서는 반전·반파시즘투쟁의견을 통일시키지못했다. 사민당우파세력은 반공·반소주의를 취하며 국내에서의 저항운동을 조직하지않았다. 그럼에도 사민당당원들은 반파쇼투쟁에 적극적으로 합류했으며 독일공산당의 반파시즘조직과 점차 긴밀히 협력했다.

반파쇼투쟁의 핵심세력은 혁명적인 노동계급이었다. 1940~45 브란덴부르크감옥에서 정치범으로 처형된 807명중 773명이 노동자·수공업자였다. 도르트문트노동자들은 <천천히일하자>구호를 제시하며 군수산업·전시경제를 마비시키려했다. 노동자들은 결근·사보타주·불량품생산등의 방법으로 투쟁했다. 1943 노동규율위반으로 독일노동자 1만4000명이 처벌됐고 1~9월사이에 파업참가를 이유로 노동자1만8900명이 체포됐다. 반파쇼투쟁세력은 군사포로·수용소수감자·외국인노동자등 외국인을 상대로 한 조직활동도 진행했다. 그결과 주요수용소에서는 지하국제위원회가 설치됐다.

1942말 대규모지역에서 당활동·반파시즘투쟁센터가 구성됐다. 이조직들은 인민전선강화와 히틀러권력타도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1943.7 소련내 독일망명자·독일인포로들은 NFD(자유독일전국위원회)를 구성했고 <독일국방군과독일국민에게보내는자유독일전국위원회의선언>을 발표했다. 위원회는 <자유독일>방송국을 운영해 독일을 향해 방송을 실시하고 전선·독일내 여러 출판물을 출판·배포하는 선전전을 진행했다. 독일내반파시즘운동은 잔혹한 탄압·테러에도 계속 성장해 1944봄 독일공산당은 85개이상의 도시·촌락에 거점을 확보했고 이곳을 중심으로 공산당지도부의 직접적지도를 받는 1만명반파쇼활동가들이 활동했다.

1944.7 슈타우펜베르크대령의 히틀러암살사건이 있었다. 나치독일의 대령 슈타우펜베르크는 한때 히틀러를 존경했으나 2차세계대전발발과 나치정권의 잔학상에 반나치즘으로 변모해 반히틀러비밀조직에 가담했다. 1944 히틀러암살에 실패한 후 7.21 총살됐다. 이사건이후 독일정권은 독일공산당·자유독일조직을 비롯한 반파시즘조직을 극렬히 탄압했다. 반파시즘조직지도자들이 처형됐으며 1944.8.18 공산당영수 에른스트텔만이 부헨발트집단수용소에서 처형됐다.

1944.10 소련군이 독일에 진주했고 1945.4.30 히틀러가 자살했으며 5.2 베를린이 함락되고 5.8 독일최고사령부대표들이 무조건항복문서에 조인했다. 독일내반파쇼투쟁은 독일나치즘의 집중적인 탄압에 따른 극도의 고난속에서도 치열했으며 희생적으로 전개됐다.

1940.6 이탈리아무솔리니정권은 영국·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프랑스의 영토일부를 점령했다. 반파시즘정당과 조직들은 일시적으로 파괴됐으나 1941 반파시즘정당의 지하구조가 재건됐다. 1941.7 공산당, 1942봄 사회당이 지하조직망을 재건했다. 1942여름 공산당은 비합법신문 <단결(L’Unita)>을 재발간했고 사회당은 비합법신문 <전진(L’Avanti)>을 발행했다. 소부르주아정당 정의와자유는 1942말 행동당으로 개편했다. 1941가을 해외에 애국세력통일행동위원회를 설립했는데 여기에 공산당·사회당·정의와자유가 참가했다. 1942에는 토리노에서 국민전선위원회가 결성됐고 이후 로마·밀라노에도 설립됐다. 1943초에는 이탈리아국내의 지하지도센터의 활동이 시작됐다. 이센터는 팔미로톨리아티공산당대표와 정기적으로 연결됐다. 반면 반파시즘에 참가했던 부르주아정당은 민중봉기·파업등을 반대하며 미국·영국군지지에 기대를 걸었다.

1942봄부터 파업투쟁이 고조됐으며 1943.4 토리노·밀라노무기공장 30만노동자파업투쟁은 점점 북부의 타도시들로 확산됐다. 파업은 공장에서 비밀조직사업을 전개하던 공산당당원들에 의해 반파시즘·반전투쟁으로 조직됐다. 이탈리아내에서의 반파쇼투쟁과 전쟁패배로 인해 위기에 처한 무솔리니정권은 1943.7.25 일명 <궁전쿠데타>, 즉 왕을 방문했다가 그자리에서 체포됐다.

새총리가 된 피에르트바돌리오와 연합군은 휴전협정을 맺었으나 1943.9.8 독일은 다시 이탈리아영토의 상당부분을 점령했고 12일 독일군나치친위대가 무솔리니를 구출했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공화당을 구성하고 이탈리아사회공화국을 선포했다. 이탈리아반파시즘투쟁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이탈리아공산당은 루이지롱고를 지휘관으로 하는 파르티잔부대 가리발디연대를 구성했다. 1944.6 모든 파르티잔부대가 VCL(자유의용군)로 통합했다. 1945.3 VCL수는 15만명에 이르렀다. 이탈리아반파시즘투쟁에는 공산당외에도 다양한 정치세력이 포함됐다. 이는 자본가·소자본가·노동자·농민·종교인등을 대표하는 여러 정당들을 다 포괄했다. 정당대표들은 반파시즘투쟁과정에서 CLNAI(북이탈리아민족해방위원회)를 결성했다.

1944.3 전국적인 총파업이 결행됐다. 노동자100만명이상·파르티잔2만명이상이 파업노동자들을 지지했다. 파업은 남부의 정치투쟁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파업의 결과 1944.4 최초의 반파시즘정당내각이 세워졌다. 톨리아티는 1944.3 모스크바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온 뒤 파시즘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우선 단결하고 국가구성문제는 종전때까지 미루며 제헌의회를 소집하자며 바돌리오정부에 촉구했다. 이에 부르주아정당도 전국적봉기를 준비하기 위한 정치적연대에 참여하게 됐다.

반파시즘봉기는 파르티잔과 애국행동그룹을 중심으로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1944 이탈리아일부지역을 해방했으며 독일군점령지역에 CLNAI의 통제를 받는 파르티잔해방구가 만들어졌다. 파르티잔의 가열한 투쟁을 경계한 미국·영국군사령관은 1944.11 파르티잔부대해산을 강요했다. 파르티잔은 부대를 유지한채 봉기준비를 계속했다. 1944말~1945초 겨울내내 독일군과 파시스트군이 파르티잔에 맹공을 퍼부을 때도 연합군은 정전협정을 이유로 사실상 아무런 행동을 하지않았다.

1945.4.24 정치적총파업이, 4.25 전국적인 봉기가 시작됐다. 봉기결과 100개이상의 도시가 해방됐다. 봉기의 중심에는 25만명에 이르는 파르티잔부대가 있었다. 연합군은 파르티잔이 북부지역을 대부분 해방시킨 후인 1945.4에야 북부에 진격했고 가장 먼저 한 행동은 CLNAI가 임명한 인사들을 요직에서 내쫓고 과거부르주아정권의 관리들로 대체한 일이었다.

봉기과정에서 이탈리아사회공화국은 해산됐고 무솔리니는 총살됐으며 이탈리아전국토가 독일군으로부터 해방됐다. 1945.4.25 CLNAI포고에 따라 노동자관리평의회가 설치됐다.

일본내에서의 반파쇼투쟁은 매우 미약하게 전개됐다. 일제는 군국주의정권을 수립한 후 모든 정당·노동조합활동을 불법화했다. 1940 고노에내각은 노동조합원을 산업보국회에 가입시키고 군수생산에 강제로 동원했다. 부르주아정당은 스스로 해산해 대정익찬회에 참여했다.

1941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노동자에 대한 착취·통제는 더욱 극심해졌다. 노동자들은 비조직적으로 저항했는데 지각·조퇴·작업기피·불량품생산과 사보타주가 진행됐다. 1941~44 노동쟁의1303건에 5만3000명이상이 참여했다. 1942이후 미국·영국은 태평양에서 벌어진 군사작전에 참가했으며 아시아에서의 반일민족해방운동도 격렬히 진행됐다. 도조히데키일본총리는 1944.7 사임되고 해산됐던 정당들이 참여한 고이소구니아키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1945.8.9 일본관동군이 만주에서 패배하자 비로소 일본은 군사작전을 중지했다.

한편 일본인국제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인 오자키호쓰미는 조르게의 협력자로 유명하다. 아사히신문특파원으로 중국상하이에서 근무할 때 조르게를 만난 오자키는 1932 귀국해 <오토>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했다. 오자키는 1937 고노에후미마로총리의 보좌관으로 역임하며 정보수집과 전쟁·외교정책기획단계부터 참여했다. 조르게가 일본을 근거지로 고급정보를 수집할수 있었던것은 소련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오자키를 비롯한 조력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민족해방투쟁과 반파쇼인민전선의 강화

1937.7.7 중일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일제는 루거우차오(노구교)에 주둔해 있던 중국군대를 공격했고 8.13 상해로 진격했다. 7.8 중국공산당은 <전중국인민이단결해민족통일전선이라는견고한장성을축성해일본군의침략에저항하자>고 호소했고 7.15에는 <국공합작을공포하기위한중국공산당중앙의선언>을 통해 국공합작을 추진했다. 장개석·국민당은 굴욕적인 평화적외교방법으로 노구교사변을 해결하려고 했다. 8.13 일본의 상하이사변으로 국민당남경정부가 직접적으로 위협받자 그제서야 항전에 동의했고 9월 국공합작의 성립을 사실상 승인했다. 공산당의 전면항전노선과 달리 국민당은 국민당정부·군대의 독점적항전을 주장했다. 공산당은 광범위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는 동시에 국민당의 반공음모를 경계하며 일면적인 항전노선과 투쟁해야했다.

루거우차오사변후 반년동안 거의 모든 화북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은 화동에서 1937.11 상하이, 12월 난징, 1938.5 쉬저우를 점령했다. 1938.6 화중의 허난, 10월하순 우한을 점령했으며 화남에서는 1938.10 광저우를 점령했다. 전쟁터에서 국민당군대의 패배로 국토대부분이 피점령지로 전락했다.

1938.5 모택동중국공산당총서기는 <지구전을논한다>를 통해 항일전쟁은 지구전이며 최후의 승리는 중국민중의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전략적방어·전략적대치·전략적반격등 3단계를 반드시 경과해 발전할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면서 승리를 위해 가장 중요한것은 당이 전면항전노선을 견지하고 인민전쟁의 방침을 실행하는것이라고 강조했다.

1938.10 일본군이 광저우·우한을 점령한 후 전쟁터가 확대됨에 따라 전선이 연장됐고 물자가 대량으로 소모됐다. 일본군후방은 공산당의 항일유격전쟁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있었다. 항일전쟁은 전략적방어단계에서 전략적대치단계로 발전했다. 일제는 국민당에 선린우호·공동방공·경제제휴등 3개원칙을 제안함으로써 통일전선의 분열을 획책했다. 국민당내친일파인 국민당부총재 왕정위와 그무리들이 공개적으로 투항했다. 왕정위는 1939말 일본과 매국조약을 조인해 동북지역할양을 비롯한 영토분할·괴뢰정부수립을 체결했다.

1938말부터 1940초 해방구민중들은 일본군의 포위공격을 분쇄했으며 항일근거지와 민중의 혁명역량을 크게 향상시켰다. 특히 산시(산서)·차하얼·산둥·허난의 항일근거지민중들은 2년간 10여차례에 걸친 일본의 대규모공격을 분쇄했다. 근거지는 주변지역으로까지 확대됐고 근거지인구는 약2500만명으로 증가했다. 해방구를 중심으로 한 일본군소탕작전과 근거지확대는 계속됐다. 1940.7 항전3주년당시 공산당의 군대는 4만명에서 50여만명으로, 민병은 200만명으로 발전했다. 전국근거지·유격지역총인구는 약1억명으로, 공산당원은 80만명으로 늘었다. 일본군후방전쟁터에서 공산당군대는 일본군·괴뢰군전부를 패퇴시켰다. 적후방이 항전의 주요전쟁터가 됨으로써 전국적범위의 인민혁명전쟁으로 발전했다. 1939.1 국민당5기5중전회에서 장개석은 화중·화남통치만 보존된다면 일본에 투항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회의에서 반동법령이 제정되며 공산당원에 대한 대규모정치적테러·학살이 감행됐다. 항일민족통일전선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1939.7.7 중국공산당은 <항전2주년기념을위한시국에대한선언>을 통해 <항전견지·투항반대>·<단결견지·분열반대>·<진보견지·퇴각반대>의 3대정치구호를 제출하고 투쟁을 지도했다. 공산당을 중심으로 근거지민중들은 국민당의 공격에 굳건히 반격하며 국민당의 1차반공고조를 격퇴했다.

국민당은 1940.10.19 2차반공고조를 개시했다. 1941.1.4 신4군군부와 부대원9000명은 북쪽으로 이동중 국민당7개사단8만여명의 습격을 받아 사실상 전멸했다. 장개석은 신4군이 국민당을 배신했다고 모략했다. 국민당의 반공고조는 정점에 달했다. 중국공산당중앙혁명군사위원회는 신4군중건을 명령했다. 신4군은 창장(장강)남북의 적후방에서 항전했다. 공산당은 전국각지에서 항의운동을 통해 국민당의 반동적범죄행위를 폭로했다. 주은래가 책임자로 있던 남방국충칭(중경)에서도 반격을 전개하며 국민당의 폭행을 드러냈다. 장개석무리는 점차 고립됐고 결국 국민참정회의연설에서 공산당토벌행위금지를 선포했다. 2차반공고조가 분쇄됐다.

1941.12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화북지구의 치안강화운동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며 식민통치를 강화했다. 일본은 해방구소탕을 주요방침으로 채택하며 모조리불싸지르고·모조리죽이고·모조리빼앗는 광란적인 3광정책을 채택했다. 심지어는 세균전까지 벌였다. 1941~42 일본군은 화북해방구소탕을 위해 1000명이상의 병력을 17차례나 동원했다. 1942 5.1대소탕으로 중국공산당간부·민중 5만여명이 학살됐다. 공산당은 군대를 재편하고 당의 통일적지도력을 강화했으며 대생산운동을 전개하는 정책을 통해 일본의 탄압을 극복했다. 특히 대생산운동에는 수만명이 투입돼 반역군대와 국민당보수세력의 경제봉쇄를 분쇄하고 항일전쟁의 최후승리를 위한 물적기초가 마련됐다.

1943 2차세계대전의 전도가 반파쇼인민전선에 유리한 쪽으로 변화하면서 중국공산당해방구도 점차 회복되고 혁명역량이 강화됐다. 각해방구민중들은 국부적으로 반격하기 시작했고 적후방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공산당부대들은 강남·중원을 장악하기 위한 전략적방침에 따라 전투를 전개했으며 일부는 서쪽으로 진출하거나 황하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근거지를 확대했다. 그결과 1945봄 해방구는 19개로 발전해 화북·화중·화남의 광범위한 지구에 두루 분포됐다. 군대는 91만명으로 발전했고 민병은 220만여명에 달했다. 해방구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일본군이 점령한 대다수중심도시의 교통선을 포위했다.

1943 국민당이 3차반공고조를 개시했다. 장개석은 2년내 공산당·혁명역량을 제거할것을 암시하며 대규모내전을 일으키고자 했다. 공산당은 국민당의 반공내전음모를 폭로하고 7.9 연안에서 3만인대회를 통해 단결호소·내전반대를 강조했다. 뿐만아니라 변구(변경의 공산당자치군정지구)의 민중들을 사상·군사·조직적으로 준비시켜 국민당군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결국 장개석은 섬서·감숙·영하변구에 대한 진공정지를 명령했다. 3차반공고조는 저지됐다.

1944 일본은 중국동북쪽에서 베트남까지의 대륙교통선을 확보하기 위해 허난·후난·광시전투를 개시했다. 국민당100만군대는 참패했고 대부분의 지역과 140여개도시를 상실했다. 국민당통치지역에서 광범위한 민주운동이 일어나 민주개혁실행·국민당일당독재폐지·국민당통치기구개조등을 강력히 요구했다. 1944봄 중국공산당은 국민당대표와의 담판을 통해 국내정치제도의 개혁·민주화실행을 요구했다. 1944.9.24 중경의 각계애국인사를 비롯한 500여명은 회의를 개최해 민주화실행·국민당일당독재종식·연합정권수립을 요구했다.

1945봄 공산당7차전국대표대회에서 모택동은 <두개중국의운명>이라는 개회사를 통해 반식민·반봉건·분열·암흑적인 구중국과 독립·자유·민주·통일·부강·광명한 신중국이라는 2개의 전도를 짚으며 중국공산당의 임무는 광명한 전도를 위해 싸워나가는것이라고 선언했다.

유럽에서의 반파쇼전쟁이 승리를 거뒀다. 중국공산당은 부대의 전투력을 향상시켜 대반격을 준비했다.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한 후 소련군 150만명이 3방면으로 나뉘어 중국의 동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모택동은 8월9일 <일본침략자에대한최후의일전>을 통해 8로군·신4군을 비롯한 군대에게 투항하지않는 모든 침략자·주구에게 광범위한 공격을 가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해방구민중들은 일본군·반역군대를 향해 전면적으로 진공했다. 8.11~10.10까지 2개월동안의 격렬한 전투를 통해 사망·부상·포로가 된 일본군·반역군은 23만여명에 달했고, 도시197개·국토31만5000여㎢가 회복됐으며 인구1800만여명이 해방됐다. 9.2 일본정부는 항복조서에 조인했다. 8년여에 걸친 항일전쟁은 중국민중의 승리로 끝났다.

1940.8.10 조선인민혁명군군정간부회의가 소할바령에서 진행됐다. 보고<조국광복의대사변을준비있게맞이할데대하여>를 통해 김일성부대는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시작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한 약10여년의 투쟁기간을 총화했다. 특히 1936.5 결성된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체인 조국광복회를 긍지높게 평가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30년대중반부터 조국광복회를 창건하고 백두산근거지를 창설하며 광범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1937.3 서강회의에서 <인민혁명군이존재하는한조선은반드시독립된다>는것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대부대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할 방침을 제시했다. 압록강, 두만강연안북부연안, 임강·장백일대의 압록강연안으로 진출해 과감한 전투들을 전개했다. 이시기 일제를 충격에 빠뜨리고 조선민족의 해방의지를 크게 고무한 사건은 1937.6.4 보천보전투승리였다. 보천보전투는 일제의 삼엄한 국경경비진을 뚫고 번개처럼 전개된 전투였다. 보천보전투는 조선민중의 반일투쟁의지와 승리에 대한 확신을 전세계에 각인시켰다.

1938 코민테른의 이름으로 좌경모험주의자들은 만주의 무장부대들이 만주국수도 장춘을 포위공격하고 열하원정으로 일본군을 타격할것에 대한 노선을 내놓았다. 조선인민혁명군과 공동투쟁을 전개한 중국인무장부대들은 장춘으로 이동하다가 결국 큰 타격을 입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좌경모험주의노선의 위험성에 대한 대책으로 배후교란작전에 따른 유인기습전투를 조직·진행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38.11 군정간부회의를 통해 대부대기동작전으로 넘어가 일본군에 섬멸적타격을 줄것에 대한 방침을 제시하고 국경일대·국내로 진출해 무장투쟁을 확대할것에 대한 과업을 제시했다. 이렇게 시작된 100여일간 <고난의행군>으로 위기를 돌파한 조선인민혁명군은 1939.4 백두산동북부지대로 이동해 정치군사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대홍단지구·백두산동북부지대로 진출했다. 1939.10에는 대부대로 미리 설정된 비밀노정을 따라 넓은 지역을 선회하면서 일본군을 기습하며 연속으로 타격하는 대부대선회작전방침을 제시하고 두만강연안을 비롯한 백두산주변지역곳곳에서 일본군을 타격했다. 1940.3 홍기하전투를 통해 일본군정예부대인 마에다부대를 전멸시켰다.

소할바령회의에서는 일본이 전례없는 발악적인 토벌공세를 감행하고있으며 정치사상적공세·경제적봉쇄정책도 더욱 강화하고있다는것을 지적했다. 뿐만아니라 일제의 취약성과 조선·중국·일본내에서의 민족해방투쟁·반전평화운동을 짚으며 <조국광복의대사변을주동적으로맞이하기위한준비사업>을 잘할것에 대해 강조했다. 전략적과업집행을 위해 대부대작전에서 소부대작전으로 이행을 결정했다. 이는 인민혁명군의 역량을 보존축적하고 혁명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는 코민테른의 권고이기도 했는데 소련이 독일과 일본의 협공위험에서 벗어나 방위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아시아에서의 정세완화정책을 실시하고있었다. 소부대작전은 소련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국제주의적요구가 반영됐다.

인민혁명군은 소부대·소조들로 편성돼 조선과 만주각지에 파견됐다. 소부대는 매복전·습격전을 벌이며 일본군을 연속타격하면서 군사정치적타격을 주고 민중들의 사기를 높였다. 소부대활동중에는 군용열차전복·군용도로공사장습격전과 군사정찰사업·조직정치사업도 있었다. 특히 일제탄압에 의해 파괴된 조국광복회조직을 복구하고 확대하기 위한 사업이 활발히 전개됐다.

1942.7 조선인민혁명군과 소련·중국측은 국제연합군을 편성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조선·중국·소련무장력의 연합문제를 최종토의하고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의 독자성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전제하에 국제연합군창설을 결정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자체역량을 강화하면서 국제반제역량과의 공동투쟁을 통해 일제를 타도하고 2차세계대전의 승리에 기여했다.

1940년대전반기 김일성조선인민혁명군사령관은 조국해방3대노선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의총공격·전인민적봉기·인민무장대및소부대의배후연합작전을 제시했다.

1942 국내반일지하조직은 일제가 발견한것만 180여개가 되고 조직적역량이 50만명이 넘었다. 투쟁단체들은 전민항쟁·일제봉기·무장폭동·인민혁명군최후공격작전합세등을 목적으로 했다. 조직명칭도 김일성대·백두산회와 같이 조선인민혁명군과 직접적으로 연결한 조직들이 등장했다. 특히 1942.3 제주도비행장에서 대규모 조선인노동자폭동이 전개돼 노동자들이 공군기지를 습격하고 무선소파괴·4개지하격납고방화·142명일본인비행사처단등을 단행하며 일제식민지배에 타격을 가했다. 그외 항쟁조직으로 평양일대조국해방단·일철비밀결사·경성지구무장봉기준비결사·무산광산청년노동자들조직등이 있었다. 반일지하조직이 강력하고 광범했기에 1945.8 전민항쟁을 통해 조선의 일본통치체제가 빠르고 철저하게 붕괴될수 있었다.

1945.5.9 독일이 무조건항복을 했으며 일본은 모든 전선에서 패전하고있었다. 이에 조선인민혁명군은 최후공격작전준비를 다그쳤다. 주력부대는 평안남북도·함경남북도·황해도·강원도등의 유리한 산악지대를 차지하고 무장대오를 확대해 해방작전을 벌이는 한편, 소부대들의 유격전과 전인민적봉기를 배합하는것으로 계획됐다. 다른 부대들은 조선북부로 진격하는 동시에 동해안에 상륙해 공세를 취하기로 했다. 8월부터 국경요새요충지에 대한 습격전투를 조직했으며 8.9 조국해방최후공격작전명령을 내렸다. 국경요새와 두만강조선북부일대를 비롯해 넓은 지역이 해방됐고 인민무장대·무장봉기조직은 조선인민혁명군과 결합했다. 이들은 적통치기구를 파괴하는 투쟁을 과감히 전개하기도 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조국해방작전이 개시된지 1주일도 안된 8.15 일제는 무조건항복했다. 조선민족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쟁취했다.

2차세계대전종전후 세계전역에서 혁명의 대고조기가 도래한것은 정의를 추구하는 민중들에 의한 역사적필연이었다. 민중을 배신한 제국주의는 약화되고 민중의 편에서 용감히 투쟁한 사회주의세력·민족해방투쟁세력은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민중과 한마음으로 단결한 혁명세력은 반드시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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