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이후,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의 힘이 미치지않는 곳으로, 주인 없는 땅을 찾아 간도·만주에 모여들었다. 조선말 반일의병투쟁은 일제치하 독립군운동으로 발전했다. 독립운동가들은 군사간부양성에 관심을 갖고 중국의 동북지방과 러시아연해주지방에 군사학교와 양성소들을 설치하고 군사지휘성원들을 키워냈다. 1931 9.18사변을 일으키며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자 김일성주석은 조선과 중국이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할것을 제기했다. 상비적인 혁명무력에 의한 유격전을 항일무장투쟁의 기본형식으로 규정했다. 국가적후방이나 정규군의 지원 없이 인민대중의 적극적인 지지성원과 유리한 자연지리적조건에 의거해 혁명을 하지않으면 안되는 조건에 맞는 창조적인 투쟁방식이다. 김일성주석은 일제에 의해 자주권을 침해당하고있는 공통된 처지라며 조중반일통일전선방침은 반제공동전선을 국제적으로 확대할 세계혁명의 요구에도 부합된다고 강조했다. 김일성주석은 조선인들이 중국땅에서 활동하는 조건과 만주성위산하의 당조직들에 조선사람이 많다는 사정과 관련해 중국공산당과 공산주의자들의 연계를 강화하는데 깊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며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이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김일성주석은 당시 동만에서의 당조직건설과 항일무장투쟁이 중국동북항일혁명과 공산주의운동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또 중국공산주의자들의 무장부대들뿐아니라 중국인반일부대들과의 연합전선을 위해 노력했다. 1933.9 중국인반일부대와 연합해 동녕현성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반일연합전선노선의 위력을 시위했다. 일제는 반일투쟁을 막기 위해 교활한 분열이간책동을 벌였고 이기만선전에 넘어간 구국군상층부는 조선인을 공산당이자 파쟁군, 일제앞잡이라는 논리로 박해하고 살해했다. 김일성주석은 반일부대들과 공동투쟁을 벌이면서 일제의 기만선전을 분쇄했다. 김일성주석은 1935.2 다홍왜회의에서 반<민 생단>투쟁에 대해 좌경배타주의의 궤변을 폭로, 비판했다. 또 조선혁명가들의 민족해방은 <민생단>이 주장한 <조선인에의한간도자치>주장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것을 밝히면서 혁명가들은 어디서 활동하든지 자기나라혁명의 구호를 들고 싸워야하며 그것으로 그나라혁명도 도와주고 세계혁명에도 이바지해야한다고 밝혔다. 이런 입장은 국제당 코민테른으로부터 전적인 지지를 받았다. 김일성주석은 나라를 잃고 타향에서 조국을 찾기 위한 투쟁을 전개할수밖에 없는 우리민족의 현실, 조선혁명가들의 실정에서 조선혁명을 개척해나가야했으며 중국혁명, 세계혁명과의 관계도 과학적이고 혁명적으로 해결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