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래는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래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아왔다고 하면서 고대사를 왜곡해서는 안된다고 엄히 지적했다. 모택동도 김일성주석을 비롯한 북대표단들을 만난 자리에서 <당신들의선조는당신들의영토가랴오허(요하)를경계로한다고했다.당신들은현재압록강변까지밀려쫓겨갔다.당신들이역사에이를써넣어야한다.>고 말했다. 랴오허문명이 우리민족의 역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것이다. 1962 북과 중국은 현재와 같은 북·중국사이의 국경을 확정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북과 중국은 압록강·두만강을 공동이용하며 백두산천지영유권을 분할하는 국경조약을 체결하고 비준서를 교환했다.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우리민족과의 관계에서 우리민족의 역사를 엄격히 인정하고 진심으로 존중했다. 공동주의자들의 역사인식의 객관적합리성과 도덕의식을 반영하고있다. 우리민족은 중국대륙에 수립된 국가에 의해 침략을 당하고 한때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후 <붕당>정치가 심화되면서 각종사화가 일어나고 성리학의 종주국에 대한 사대가 나타났다. 민비는 갑오농민전쟁의 농민반란이 일어났을때 청나라의 출병을 요청했다. 유럽봉건왕조들도 왕정유지를 위해 결탁했듯이 봉건통치배들은 피지배백성들의 반란에 공동대응했다. 민비의 출병요청은 청일전쟁으로 이어졌고 이후 일본은 민비를 살해하고 조선을 참혹하게 유린했다. 일본인들에 의해 왕궁을 유린당한 조선왕정은 당시 조선의 이권을 두고 다투던 또다른 제국주의국가 러시아에 기댔지만 이는 다시 러일전쟁을 야기했다. 일본은 영일동맹과 가쓰라·태프트밀약등 미·영을 같은 편으로 해서 러시아·프랑스·독일과 세력권쟁탈전을 벌였다. 청은 1·2차<아편전쟁>에 패배하면서 일부지역을 잃었고 청일전쟁이후에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부정당하며 배상금까지 물어야했다. 조선과 중국은 제국주의열강에 의해 자주권이 유린당하는 공동의 운명에 처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