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 항쟁의기관차〉 해방후 인민정권수립을 위한 노력

일제가 패망하고 코리아와 중국 양국은 모두 새로운 국가를 수립해야할 과제를 갖고있었다. 코리아에는 연합군측 미국의 제안에 따라 일제의 무력과 공권력을 해체하고 새로운 정권수립을 보장하기 위해, 위도38도를 기준으로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하여 부득이하게 남과 북이 나뉘어져 새사회건설의 과업이 수행될수밖에 없었다. 북에서는 북인민들이 자체적으로 건설한 각지의 인민위원회들이 주체가 돼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건설을 위한 투쟁이 전개됐다. 남에서는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불법화하고 그활동을 탄압했으며 반제반봉건민주주의개혁은 추진될수 없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일제침략이전에 전개됐던 국공내전, 국내혁명전쟁이 재개됐다. 장개석일파는 미국의 지원으로 막강한 무기들로 무장하고 중국공산당과 내전에 들어갔다. 김일성주석은 항일시기 만주지역에서 활동했던 경험과 항일시기 마련해온 동북지역과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의 역량을 총동원해 막대한 군사·정치·경제적 부담을 무릅쓰고 진심으로 중국혁명을 지원했다. 코리아에서의 건설은 소미공동위가 파탄되기까지 남과 북이 분단된 조건에서 진행될수밖에 없었다. 1947말 소미공동위가 파탄나고 미국은 자신의 거수기나 다름없는 유엔으로 코리아문제를 넘겼다. 1948 코리아에는 유엔감독하에 이승만정권의 <대한민국>과 남북연석회의에 기초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개의 국가가 수립됐다. 1949말 중국에서는 장개석일파가 결정적으로 패퇴해 대만으로 쫓겨나고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는 1949.9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결정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1949.10 진먼(금문)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장개석일파의 대만지배를 저지하지못했다. 1950.5 하이난섬(해남도)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대만을 제외한 중국전역을 모두 장악했다. 대만만을 남겨놓은채 1950.6.25 코리아전쟁이 발발하고 1950.10 중국인민지원군의 투입이 결정되면서 중국인민들은 코리아전장으로 이동했다. 중국공산당에 의해 장개석일파가 완전히 제거될것을 우려한 미국이 코리아전쟁을 통해 장개석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려했다는 견해가 있다. 코리아전쟁의 발발로 장개석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코리아와 양안은 밀접한 하나의 전선이 됐다. 소련은 미국이 일본에 떨어뜨린 원자탄의 위력을 확인한 이후 미국의 원자탄공격가능성을 늘 염려했다. 그럼에도 참전을 결정한 중국공산당지도자들의 의지는 확고했다. 설사 원자탄이 터지는 처참한 결과가 뒤따를지라도 그것을 이겨낼 힘 역시 전적으로 인민대중에게 있다는것이 중국공동주의자들의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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