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북은 각각 1946~49 중국내전, 1950~53 코리아전쟁 이후 전후복구와 그에 연이어 본격적인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과도기단계에 들어섰다. 북은 약3년의 전후복구건설을 마무리하고 연이어 사회주의적생산관계개조의 사회주의혁명을 매우 짧은 기간안에 완료했다. 김일성주석은 전쟁과 전후복구건설을 이뤄낸 북인민들의 힘을 굳게 믿고 빈터위에 시작함에도 경제건설에서 중공업을 우선하며 경공업·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노선을 제시했다. 연이은 생산관계개조의 사회주의혁명까지 이어지자 종파·사대·교조주의자들이 반발했다. 그들은 <인민생활이어려운데중공업건설에치우친다>고 비난했다. 김일성주석은 혁명무력과 노동자·민중의 힘에 의거하며 안정적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완수했다. 반면 중국공산당은 대약진운동에 실패하면서 알려진바에 의하면 약2000만인민이 대기근에 희생됐다. 중국공산당은 강청등4인방과 임표를 앞세워 <문화대혁명>을 벌였다. 경제건설의 추동력을 찾지못한채 인민들을 사회주의사회건설에로 추동하기 위해 <모순론>을 따라 계급투쟁일변도로 나아갔다. 그결과 중국공산당에게는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후과라는 심각한 오류를 극복해야할 과제가 놓이게 됐다. 이때 미국 닉슨정부는 베트남전쟁에서의 패퇴로 세계각국과 미국내의 정치적위기에 직면해있었다. 닉슨정부의 백악관안보보좌관 키신저가 1971.7 파키스탄에서 극비리에 비행기를 타고 방중해 주은래총리와 회담하고 베트남에서의 철군과 유엔에서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위를 회복할것등을 합의했다. 1971.10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에서의 권리회복은 중국에게는 정치외교적으로 큰 성과였다. 미국은 이를 통해 베트남전에서 참패한 위기를 해소하고 중소분쟁의 사회주의권분열을 촉진시키려했다. 북의 사회주의혁명당시 <8월종파사건>에 주로 연안파가 연루돼 중국공산당지도부와의 관계가 심각해졌는데 주은래총리가 방북해 사태를 수습하며 전쟁당시 파견됐던 중국인민지원군을 최종적으로 철군했다. 1961 김일성주석과 주은래총리사이에 북중우호조약도 체결됐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북중간의 왕래가 끊어졌다가 1970.4~1972.3 4차례 김일성주석과 주은래총리사이의 정상급회담이 활발히 이어졌다. 주은래총리는 1970.4 회담에서 김일성주석에게 북중관계에 대해 <강산이맞닿은이웃이며우리의전통우의는피로다져진관계(鮮血凝成)이고입술과이가서로의지하는(脣齒相依)걸구현하는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일성주석은 이에 대해 <우리양국간에일정기간부자연스러운시기가있었지만해결하지못할문제는없다>고 화답했다. 키신저가 베이징을 오가는 이기간 중국은 미국에 코리아남북관계의 완화를 요구했고 미국의 지시를 따라 남의 박정희정권은 북의 7.4남북공동성명제안에 일시나마 합의하지않을수 없었다. 1971.10 중국은 유엔안보리상임이사국으로 지위와 권리를 갖게 됐고 1972.7.4 북과 남은 조국통일3대원칙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