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 항쟁의기관차〉 민주주의혁명단계의 문화·기술혁명

일제의 민족우매화책동으로 지난 시기 조선인민은 교육받지못한채 무지와 몽매속에 살아왔다. 해방직후 북에서만도 230여만명의 문맹자가 있었다. 북에서는 문맹퇴치사업을 새로운 민주주의적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선차적과업으로 규정하고 1945.11 문맹퇴치운동을 힘있게 벌릴데 대한 방침을 제시했다. 북자료는 문맹퇴치운동에 대해 광범한 인민대중을 문명에로 이끌어가기 위한 문화개조운동으로서 문화혁명의 시작이었다고 설명하고있다. 새로 들어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11 동기농촌문맹퇴치운동에 관한 결정을 채택해 1946.12~1947.3 4개월간 문맹퇴치사업을 집중적으로 진행하도록 했다. 1947.4.3 노동신문에서는 북당국에 의해 동기농촌문맹퇴치운동기간에 1만9000여곳의 성인학교에서 교원3만8300명이 동원돼 49만2122명의 문맹자들이 우리글을 읽을수 있게 됐다고 보도했다. 김일성주석은 1947.8 햇곡식을 선물로 가지고 온 강원도 평강군의 이계산여성농민에게 글을 배워 석달후 자필로 편지를 써보내도록 했다. 1947.12~1948.3 문맹퇴치돌격운동기간을 설정하고 이를 본보기로 온나라에 일반화했다. 김일성주석은 1948.5 중앙문맹퇴치전람관에 나와 일군들과 담화하면서 가까운 시일안에 문맹을 완전히 퇴치할 과업을 제시하고 1948.12~1949.3 돌격운동을 벌였다. 1949.3 북에서는 전국적으로 문맹을 완전히 퇴치했으며 <이것은동방에서처음으로되는또하나의특기할사변>이라고 평가했다. 북에서는 이와 함께 기술혁명인 증산경쟁운동도 벌였다. 증산경쟁운동에 대해 북자료는 근로대중의 적극성과 창조적발기, 상호방조와 동지적협조에 기초해 생산에서 앙양을 일으키기 위한 대중적운동이라고 설명하고있다. 북에서는 증산경쟁운동이 생산증대와 함께 근로자들의 사상·기술·문화수준을 높이는데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시작은 노동영웅운동으로, 이운동은 노동자·농민들의 개별적혁신을 위주로 하는 경쟁운동으로 전개됐다. 평양철도공장노동자들이 1946.2초 모두다 애국적노동영웅이 될것을 결의해나서자 김일성주석은 이를 일반화해 2.15 북조선공산당중앙조직위4차확대집행위에서 공장·광산·농촌에서 노동영웅운동을 널리 벌일것을 제시했다. 북에서는 이운동의 결과 1947.1.1 황해제철소를 비롯한 822개의 공장, 기업소들이 복구돼 조업을 하게 됐으며 알곡은 전해보다 340여만석 더많은 1450여만석을 생산했다고 평가했다. 노동영웅운동은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대중적증산경쟁운동으로 확대발전됐다고 밝히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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