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조국건설을 시작한 우리민족은 나라가 분단됨에 따라 하나의 단일한 정권건설에 커다란 도전과 난관에 처해있었다. 2차대전종전이후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코리아의 임시정부수립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소미공동위원회가 조직돼 1946.3.20 서울에서 첫모임이 개최됐다. 김일성주석은 이를 기해 3.23 방송연설로 소미공동위는 조선인민이 절실히 요구하는 통일적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하면서 임시정부가 실현해야할 <20개조정강>을 발표했다. 정강은 일제식민지통치잔재를 철저히 청산하고 인민들의 진정한 자유와 정치적권리를 보장하며 제반민주주의적개혁과 시책을 실시할데 대한 기본요구들을 전면적으로 반영했다. 하나의 정권수립을 위한 노력과 열망에 미군정은 1945.12 모스크바3상회의결정을 왜곡하는 오보조작과 1946.5 <정판사위조지폐사건>을 조작하며 공산당을 비법화하고 인민위원회등 민중들의 진출을 탄압하고 막으려했으며 나아가 저들의 예속체제를 수립하려고 획책했다. 여운형은 1946.2 미군정이 조직한 <민주의원>을 거부하고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결성대회에 참여하는등 미군정의 엄중한 탄압정세속에서 남민중들의 자주독립국가건설을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김원봉·홍명희·허헌·이극로등도 남에서 활동하다 1948.4 남북연석회의를 계기로 평양에 남아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김구는 연석회의후 남으로 내려와 활동을 이어갔지만 CIC(미군방첩대)요원에 의해 암살당했다. 1946.8 전남화순탄광노동자투쟁·전남무안군하의도농민투쟁·<국대안>반대투쟁등 미군정의 반민중적시책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투쟁이 전개됐다. 1946.9 철도노동자들은 식량보장·임금인상·미군정의폭압중지·민주주의적노동법령실시등을 요구하는 대중적인 총파업을 벌였고 3만명의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나섰다. 1946.10 전민중적인 반미구국항쟁으로 이어졌다. 대구를 시작으로 폭발한 항쟁에는 <정권은인민위원회로!>·<북조선과같은민주개혁을실시하라!>등의 구호들이 터져나왔다. 박헌영은 농민들의 추수투쟁보다 앞당겨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벌이도록 해 노동자·농민의 공동투쟁을 훼방하고 무모한 폭동으로 내몰아 막대한 희생을 초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