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동북아시아지역에서 자신의 지배권을 갖기 위해 일본에 2발의 원자탄을 투하하고 코리아38도선을 기준으로 소련의 남하를 저지했다. 이후 미국은 사회주의·민족해방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 전세계적범위에서 지역적집단안보체제, 군사블록을 조작했다. 동북아시아지역에서 큰 군사블록을 내오기에 앞서 그축이 될 3각군사동맹을 구상했다. 코리아전쟁이 벌어지고있던 1951.9.8 일본과 연합국사이에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48개국의 서명으로 체결하고 1952.4.28 조약의 발효로 연합군최고사령관에 의한 일본강점기를 종료하고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소련은 조약에 일본의군대창설을막을장치가없는것·일본을미군기지로삼은것·일본을소련에대항할미군의연합국으로한것·별개의평화조약이라는것·대만을비롯여러섬에대한중화인민공화국의권리침해·미국에일본의여러섬할양·초안에얄타회담에확인된남사할린과쿠릴열도에대한소련의주권을인정하지않은점등의 이유로 반대했다. 연합국과 일본의 강화조약은 아시아피해국들의 이해관계에도 배치됐다. 강화조약이 체결된 날 <미일안전보장조약>도 체결됐다. 미일양국은 일본의 주권회복후에도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극동의 안보환경을 유지하기로 했다. 미남은 1953.10 <미남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주남미군주둔과 군사지휘권에 대한 근거를 마련했다. 1951 이후 남일관계회복을 위한 협상도 진행했다. 이승만정권이 몰락하고 박정희군사쿠데타 한달뒤인 1961.6 케네디미대통령은 미국가안보회의(NSC)에서 남코리아발전에 가장 큰 장애물은 남일간의 지속적인 반목이라며 주남미대사지명자에게 남일관계개선에 집중해달라고 지시했다. 10월 남일회담이 재개됐으며 11월에는 박정희가 케네디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이케다일내각총리와 회담했다. 1964 남일협정을 반대하는 남민중의 투쟁이 거세게 일어나 협정체결을 성공하지못했으나 그1년뒤 1965 기어코 <기본관계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남경제는 미일에 2중적으로 예속되고 군사적유착은 더욱 강화됐다. 북코리아는 사회주의를 가장 철저히 고수하고있고 중·러는 미국이 견제해야할 주된 나라인 상황에서 미일남3각군사동맹은 동북아시아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기본적이며 유일한 군사동맹으로 됐다. 오바마정부의 아시아태평양재균형정책은 이지역의 동맹을 강화하고 그중심축으로 미일동맹을 강조했다. 이정책은 중일갈등과 북핵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트럼프는 미국우선주의정책으로 동맹을 강조하는 대신 지역의 <안보불안요소>를 제거하는데 집중했고 북미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후 집권한 바이든<정부>는 <호주·일본·남코리아·필리핀·태국의5개동맹과의관계를강화하고있다>며 이5개동맹국·파트너국가들을 <유일한비대칭적강점>으로 꼽았다. 미일남3각협력체계가 쿼드(Quad)나 오커스(AUKUS)에 못지않게 다뤄졌다는 평가다. 또 <모든인도태평양에서의도전은미국의동맹과파트너들간의협력을필요로하며,특히일본과남코리아가그렇다>라며 남일관계를 특히 우려·강조했다. 2022 남코리아대선에서 미남동맹강화와 남일관계회복에 강력한 의지를 가진 윤석열이 당선되면서 이지역에 대한 미국의 침략적군사동맹체제가 강화되는 흐름을 보이고있다. 이는 북·중·러의 우려를 심화시키고있으며 러시아의 대미국·나토전으로서의 우크라이나전과 같은 전쟁을 부추기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