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아프리카종단정책>의 시작점이었던 이집트는 2차세계대전이후 제국주의자들이 중동에 시오니스트국가 이스라엘을 건국하려는데 반대하고 아랍국가의 단결을 위해 투쟁했다. 이집트는 1882 이후 영국식민지에 가까운 상태로 됐으며 1914 영국<보호령>이 됐다. 영국은 이집트에서 수에즈운하에 제국주의적이권이 걸려있었다. 1922.2 영국은 형식적으로 이집트가 독립된 주권국가라고 선포하는 조치를 취했다. 실제로는 영국은 수에즈운하와 이집트의 중요경제명맥을 장악하고 착취와 약탈을 강화했다. 영국은 1923 이집트에 헌법을 채택하고 양원제국회의 입헌군주국으로 나라를 세우도록 했다. 국회선거에서 민족주의정당인 와프드당이 1당으로 되면서 친영정부와 결탁하는 결과를 낳았다. 1936.8.26 20년기한의 영국·이집트조약을 체결하고 수에즈운하와 인접한 이집트영토에 영국군의 주둔을 인정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조약의 폐기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단행했다. 2차대전후에도 이집트에서는 1936조약폐기·영국군철수·내각사퇴등을 요구하며 반영반정부집회와 시위투쟁들이 이어졌다. 1948~49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한 1차중동전쟁에서 이집트가 패배하자 정권에 대한 불만은 더욱 고조됐다. 1951.10.15 드디어 1936조약을 무효화하는 법령이 채택됐다. 영국제국주의자들은 수에즈운하지대에 군대를 더 투입하고 함대들을 이집트항구에 침입시켰다. 이집트의 반영투쟁은 무장투쟁으로 나아갔으며 1952.1 유격투쟁이 더욱 확대됐다. 가혹한 탄압이 가해졌지만 정치적위기는 극에 달했으며 나쎄르의 <자유장교단>은 봉기를 결정했다. 1952.7 친영정부를 전복하고 1953.6.18 군주제를 정식 폐지, 이집트공화국을 선포했다. 나쎄르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2차중동전쟁에서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의 침략을 막아냈다. 또 아랍연합공화국수립으로 아랍의 단결을 도모했다. 3차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의 무력침공을 반대해 이집트의 반제반이스라엘투쟁을 불러일으켰고 아랍의 행동통일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국주의자들은 중동지역에서 자본주의생산의 명맥이라 할 석유자원을 약탈해갔다. 영국은 일찍부터 이란의 석유산업을 장악했다. 1952 이란의 민족주의자 모사데크총리는 석유산업국유화로 자원주권을 실현하려했다가 미CIA(중앙정보부)의 타격대상이 됐고 군부에 의해 체포당했다. 당시 친미팔레비왕조는 1978~79 이란이슬람혁명으로 붕괴됐고 반제반미노선의 이란이슬람공화국이 수립됐다. 팔레비가 미국에 입국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학생들이 테헤란의 미대사관을 점거하고 직원들을 억류했다. 미국은 미국내 동결된 팔레비왕정의 자산을 이란에 반환하기로 하고 대사관직원들 전원이 미국으로 돌아갈수 있었다. 1980.9 인질협상에 돌파구를 마련할 즈음 이라크가 이란을 공격했다. 이라크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이란은 현재까지 미국의 중동지배전략과 이스라엘시오니즘을 반대해 핵·미사일무장력을 강화하며 대항하고있다. 이란은 민족적, 종교적으로 아랍민족과 다른 뿌리를 갖고있지만 이차이를 떠나 시리아정부군과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이라크민병대등의 중동지역 반미반시오니즘무장투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