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 항쟁의기관차〉 나치는 나토의 뿌리

| 가브리엘 록힐(Gabriel Rockhill)

비판적이론워크샵 미국

부르주아역사가들은 나토의 탄생을 소위 소련의 위협을 억제하기 위해 북대서양방어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결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부르주아역사가들이 언급하지않는것은 서유럽과 미국간의 반공군사동맹이라는 아이디어가 독일정치의 주요인물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돼 나토가 그의 아이디어로 묘사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나치친위대지도자이자 나치홀로코스트의 주요설계자중 1명으로 유명한 하인리히히믈러가 바로 그인물이다.

2차세계대전의 중심은 동유럽이었고 히틀러는 서구주요자본가들의 재정적지원을 받아 1917이후 14개 자본주의국가가 근절하지못한 사회주의를 파괴하겠다고 맹세했다. 1943 스탈린그라드전투를 기점으로 이전쟁이 실패했다는것이 히믈러에게 분명해지자, 그는 나치와 일본파시스트가 혼자서는 할수 없었던 일을 함께 할수 있는 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서방에 비밀리에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서방엘리트계층의 관심을 끌었고 주요제국주의국가의 유력인사들도 히믈러의 의견에 동조했다. 미래의 CIA수장이 될 앨런덜레스는 나치는 친자본주의아리아기독교인인 반면, 진짜 적은 신을 섬기지않는 공산주의기에 조국이 엉뚱한 적과 싸우고있다고 불평했다.

당시 CIA의 전신인 OSS(전략서비스국)에서 일하던 덜레스는 히믈러가 계획한 반공북대서양동맹을 위한 대담자중 1명이었다. ⋯

1949 나토가 공식적으로 창설되었을때 포르투갈은 창설회원국중 하나였다. 당시 포르투갈은 파시스트독재국가였는데, 이는 나토가 창립초기부터 부르주아민주주의국가든 파시스트국가든 제국주의열강들의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군사동맹이었으며, 히믈러가 염두에 두었던것이 바로 나토였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는 나치로부터 그리스를 해방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공산주의자들이 새로운 반공점령국인 영국과 미국과의 잔인한 전쟁에서 패배한후 1953 나토에 가입했다. 먼저 파시스트국왕을 복권시키고 우익꼭두각시정부를 세운 서구제국주의열강은 그리스가 신뢰할수 있는 반공주의고객국가로 재탄생하자 나토에 가입하는것을 환영했다. 이러한 패턴은 나토의 오랜 역사를 통해 볼수 있으며 우크라이나는 파시즘적반공주의고객국가의 최신버전중 하나에 불과하다.

서독은 1955 파리협정을 통해 독일연방공화국의 재무장이 승인된 바로 그해에 나토에 가입했다. 서독정부는 지원자를 선별해 나치독일군 장군과 제독 61명을 새로운 군대에 입대시켰고, 그외에도 더 많은 하급장교들을 입대시켰다. 서독군대에 편입된 나치고위장교중에는 한스슈파이델과 아돌프호이징거가 있었는데, 두사람은 초대중장으로 취임했다. 스피델은 <국방부연합군부서장>이 돼 콘라트아데나워총리의 핵심군사고문중 1명으로 활동했다(훗날 호이징거가 그자리를 맡았다). 히틀러가 <나의진실하고충성스러운협력자>라고 불렀던 호이징거는 미국의 합참의장에 해당하는 서독의 고위군장교가 됐다. ⋯ 이두나치지도자는 모두 진급해 서독 최초의 4성장군이 됐다.

이나치지도자들이 서독전역에 구축한 배후군대는 CIA, MI6, 나토가 구축한 서유럽파시스트민병대네트워크의 일부였다. 이조직들은 나치, 파시스트, 기타극우반공주의자들을 모집하고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며 전쟁을 수행할수 있는 모든 장비를 갖추게 했다. 이들은 단속을 정당화하고 소위 법과 질서, 정부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민간인을 표적으로 삼아 공산주의자탓으로 돌리는 <가짜깃발>테러를 저질렀다. 이러한 반공주의적긴장조성전략은 수백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부상을 입는등 매우 치명적이었다. 나토는 이러한 <가짜깃발>테러공격의 배후에 있었고 나토의 나치는 최소한 테러를 저지른 조직을 설립하는데 관여했다.

나토가 실제로는 북대서양파시스트조직이라는 유명한 농담은 전혀 농담이 아니다. 이는 매우 심각한 현실이며 반드시 바뀌어야한다. 나토와의 싸움은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광범위한 투쟁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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