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 항쟁의기관차〉 내란·내전세력을 배후조종해온 미제침략세력

제국주의미국의 침략과 조종

20세기부터 현재까지 세계에서 벌어지는 정권전복의 대부분은 미국의 배후조종하에 발생했다. 미보스턴대학부교수 린지오루케의 <은폐된정권교체:미국의비밀냉전>에 따르면 미국은 1947~89 42년동안 64번의 은폐된 정권교체공작과 6번의 공개적인 공작을 벌였다. 정권교체대상도 적국·<동맹>국·정치체제를 가리지않았다. 오루케는 전백악관국가안보보좌관 존볼턴이 2022 다른 나라에서의 정변계획에 협조한적이 있다며 2019 베네수엘라우익쿠데타미수를 간접적으로 언급한 사실을 짚었다.

또다른 자료에 따르면 2차세계대전이 종식된때로부터 2001까지 세계153개지역에서 일어난 248번의 무장충돌중 미국이 일으킨것은 201차례다. 미국은 대리전쟁을 지원하고 다른 나라의 내전을 부추기며 무기·탄약을 제공하는식의 직접·간접적방식으로 곳곳에서 무력충돌·대결을 조장했다. 뿐만아니라 <반테러전>을 내세우며 2001부터 최근년까지 세계80여개나라에서 전쟁·군사행동을 전개하면서 38만7000명의 민간인을 포함해 92만9000명의 사망자를 직접 초래하기도 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정권전복방식이 <색깔혁명>이다. <색깔혁명>의 본질은 내부와해책동이다. 이는 주권국가를 외부에서 침략하는것이 아니라 분열과 갈등을 조장해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책략이다. 미국은 <냉전>종식후 지금까지 <민주주의수출>·<인권보장>을 내세우며 다른 나라들의 내부를 분열·와해시켰다. 그결과 지금까지도 유럽·서아시아(중동)·북아프리카등 여러나라에서 사회적무질서·혼란이 심화되고 소요사태·내란·내전이 끊임없이 발생하고있다. 중동부유럽·중앙아시아·서아시아·북아프리카등에서의 연속적인 <색깔혁명>은 친미사대적인 사상문화적침투, 친미반정부세력에 대한 자금투입등으로 주권국가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미국의 모략행위였다.

이에 대해 미국의 한역사학자는 <냉전종식후10년간미국은세계각지에서군사적개입을통해초대국의힘을확대했다.파나마·페르시아만·소말리아·아이티·콜롬비아·세르비아에서말이다.그리고동아시아에서는냉전시대와같은무력전개가유지됐다.>고 평가했다. 외신은 튀니지·이집트·리비아등 나라들에서 벌어진 <색깔혁명>에서 미국은 불순세력이 <민주주의>와 <자유>의 간판밑에 정권을 뒤집어엎고 <자유파인사>들을 올려앉히도록 지원했다, <자유파인사>들과 청년들에 대한 미국의 영향은 미국이 <색깔혁명>을 추동할수 있는 주요한 도구였다, <색깔혁명>이후 미국은 친미적인 인사들이 미국의 지역적이익에 부합되는 정책을 추진하도록 보다 손쉽게 인도할수 있었다며 미국의 내부와해책동의 목적을 폭로했다.

미제침략적분견대, NEDUSAID

미제침략세력은 NED(미민주주의기금)·USAID(미국제개발기구)등을 이용해 친미세력을 육성하고 친미우익쿠데타를 기획·조종한다. 중외교부는 2024.8 보고서를 통해 NED의 실체를 공개했다. NED활동을 크게 <타국의국가권력전복을위한색깔혁명선동>·<모든종류의요소들과공모해내정간섭>·<타국의안정을훼손하기위한분열과저항선동>·<여론왜곡을위한허위정보날조>·<간섭과침투은폐수단으로학문활동활용>등으로 구분했다.

2022.11기준 NED는 매년100개국이상에서 활동하는 비정부단체들에 2000건이상의 보조금을 투입한다. 연간 미국무부를 통해 미의회로부터 수억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받고있으며 우익단체 스미스리처드슨재단·존올린재단등으로부터 받은 기부금을 재원으로 하는데, 2023회계연도에는 미정부로부터 3억1500만달러를 받았다. 이돈의 절반은 미국노총산하 미국국제노동연대센터, 미국상공회의소산하 국제사기업센터, 민주당산하 국제정세연구소, 공화당산하 국제공화연구소 4개기관에 들어가고, 미국무부·USIA(미해외정보국)·USAID등으로부터 자문을 받으며 세계각국의 친미단체들에 투입된다.

NED는 소련·동구의 내부붕괴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1960년대 미CIA(중앙정보국)는 <소련내부에서자유화와진화적변화에대한압력을자극하고유지하기위한미디어및접촉활동을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실질적으로는 친사회주의국가내 반사회주의세력을 훈련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82 로널드레이건미대통령은 영국을 방문해서 <민주주의의하부구조인자유언론·노조·정당·대학의체제를강화할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금을 만들어야한다고 강변했고 다음해인 1983 NED가 창설됐다. 1986 미언론은 NED프로그램이 1950~70년대 CIA가 전세계적으로 친미정치조직들에게 제공한 프로그램과 유사하다고 인정했다.

NED는 1989 소련붕괴와 동구반정부시위에 관여했고 필리핀·파나마·니카라과에서 반미정권전복을 위해 선거에 개입했으며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폴란드의원들과 접촉, 이나라들의 헌법초안작성자들을 조종했다. 1991 NED창립자 앨런와인스타인은 <우리가오늘날하는일의대부분은25년전CIA가비밀리에한것이다>라고 언급했다.

NED는 USAID와 소련·동구붕괴후 전세계여러국가들을 대상으로 친미극우쿠데타를 배후조종했다. 동유럽에서는 2000 세르비아<벨벳혁명>, 2003 그루지야<장미혁명>, 2004·2014 우크라이나<오렌지혁명>·<유로마이단>쿠데타를 조종했고, 2013~14 러시아내 비정부조직과 활동가네트워크에 수백만달러를 투입해 러시아선거를 방해·모함했다. 서아시아·북아프리카지역에서는 <아랍의봄>을 부추겼는데, 이집트<청년운동>·바레인<인권센터>·예멘활동가들은 NED가 지원하는 단체들에게 훈련과 자금을 받았다. 이슬람반군은 2008 뉴욕<기술회의>에 참석했다. 2011 이집트·예멘·요르단·알제리·시리아·리비아등에서 <색깔혁명>이 확산됐다. 이란에서는 2015~22 NED등에서 62만8000달러를 받은 VOA기자가 <히잡착용반대>시위를 선동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2010과 2015 에콰도르의 라파엘코레아정부전복시도에 수천만달러를 투입했다. 2013 볼리비아정부관료에 따르면 미국은 수년간 에보모랄레스정부를 약화·붕괴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는데 2019에는 <미디어재단>·<FIDES통신사>에 자금을 지원해 모랄레스축출을 획책했다. 2002와 2019 베네수엘라 우고차베스·니콜라스마두로를 대상으로 한 우익쿠데타를 지원했다. 2010년대부터 NED·USAID는 쿠바의 <탈사회화되고소외된청소년>을 무기화하기 위해 <산이시드로운동>을 조작하면서 2021.7 대규모반정부시위를 촉발시켰다. 동아시아에서 NED는 중국을 분열·와해시키기 위해 <대만독립>분리주의세력·홍콩·위구르·티베트반정부세력을 지원했다. 뿐만아니라 미얀마·말레이시아등에 대한 내정간섭을 감행했다. 조선을 겨냥한 내부와해책동은 <한국>탈북자단체에 대한 지원으로 드러난다. 중외교부보고서에 따르면 NED는 조선정권전복을 위해 <많은비정부기구를통한활동을수행하고북관련여론을흔드는작업>을 하고있으며 <탈북자들>의 92개프로젝트에 1741만달러(약240억원)를 투입했다.

우크라이나 <오렌지혁명><유로마이단>쿠데타

우크라이나의 2004 <오렌지혁명>과 2014 <유로마이단>쿠데타는 제국주의미국의 공작하에 오랫동안 준비돼온 대표적인 정권전복책동이다. 2차세계대전당시 우크라이나파쇼조직 OUN(우크라이나국수주의자단)산하 UPA(우크라이나봉기군)방첩부대지휘관·UHVR(최고우크라이나해방위원회)외무장관 미콜라레베드는 1949.6 미국에 정착해 반소련선전활동을 감행했다. 1990년대 대러시아세력이 우크라이나안팎에서 조직됐고, 이들이 중심이 돼 2004 <오렌지혁명>이 전개됐다. 2004.9 대선을 앞두고 빅토르유셴코는 다이옥신중독에 의한 안면손상을 드러내며 반대파에 대한 거짓선동을 심화했다. 대선결과 유셴코가 친러성향의 빅토르야누코비치에게 패배하자 11.22 대규모 선거불복종시위가 벌어지면서 <오렌지혁명>이 시작됐다. EU이사회·서유럽연합등 서방세력의 간섭·압력으로 인해 선거가 다시 치러지면서 유셴코가 당선됐다. 미·서방은 <오렌지혁명>이 있기전 약2년간 6500만~1억달러를 극우단체들에 투입했다. 그중 미국무부는 2003·04회계연도에서 <지원프로그램>비용으로 각각 1억8850만달러·1억4347만달러를 할당했다. 2004대선직전 우크라이나<민주주의프로그램>에 2003·04각각 5470만달러·3411만달러가 특별히 사용됐다. 이자금들은 USAID·유라시아재단·NED·미대사관·기타기관을 통해 극우세력에 투입됐다. 한편 유셴코부인 카테리나유셴코는 미국무부인도주의·인권담당출신으로 반미국가의 체제전복추진을 주업무로 했던 사람이다.

2014 <유로마이단>쿠데타가 발생했다. 2010 대선결과 야누코비치친러정권이 수립됐다. 이후 악명높은 파시스트 스테판반데라의 영웅칭호를 박탈하고 경제위기극복을 위해 친러시아정책들을 실행했다. 미·서방으로부터 훈련·재정지원등을 받은 신나치우익단체들이 중심이 돼 <마이단>시위가 확산됐다. 미대사관·네덜란드대사관·조지소로스재단을 자금줄로 하는 친미·반정부성격의 신생뉴스매체들은 여론을 조작했다. 신나치세력들은 2023.11말부터 경찰·보안요원들을 공격했고 11.30에는 우크라이나보안국의 방조아래 신나치민병대들이 경찰에 대한 무력공격을 대대적으로 감행하며 내란을 일으켰다. 이시기 미국무부유럽담당차관보와 우크라이나미대사간 우크라이나차기정부수립에 대한 통화내용이 유출되며 폭동의 배후에 미제침략세력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14.2.20 수도 키예프도심에서 내전에 가까운 충돌이 발생했다. 정부와 극우간 협상이 결렬됐고 국회에서는 대통령탄핵절차가 진행됐는데, 국회의원450명중 3/4인 338명찬성이 탄핵요건이었으나 328명이 찬성하며 탄핵은 부결됐다. 그럼에도 야누코비치는 불법적으로 대통령직에서 쫓겨났고 결국 러시아로 망명하면서 <유로마이단>친미극우쿠데타가 성공했다. 모스크바아메리칸대학총장 에드워드로잔스키는 버락오바마미정부가 2014.2 <색깔혁명>을 추진하면서 쿠데타를 촉진했는데, 이것이 <나토가입을위한빠른길이어서>라고 분석했다.

그루지야 <내정간섭반대>법안을 둘러싼 반정부시위

그루지야에서도 <색깔혁명>이 현재진행중이다. 2023.3 수도 트빌리시에서 수천명이 반정부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는 그루지야의회가 1차검토회때 채택한 <외국영향력의투명성>법안에 의해 촉발됐다. 법안의 핵심내용은 전체예산중 20%이상을 외국지원으로 확보하는 언론·비정부기구를 <외국권력의이익을추구하는기관>으로 간주해 <외국대리인>으로 정부등록을 의무화하는것이다. 여당<그루지야의꿈>이 주도해 채택한 이법안의 요지는 <외국의영향력있는요원들>의 국가등록이다. 친서방야당은 <외국인요원들과싸우는> 러시아를 모방하려고한다며, <러시아법>이라고 모략했다. 그러면서 <유럽통합노선>대 <친러시아노선>간 대립으로 호도했다.

2022여름에 처음 이법안이 거론되자 비정부기구들은 즉시 <기술적임시정부>구성을 발표하고 당국이 거부할경우 <색깔혁명>의 변종인 <평화혁명>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비정부기구들은 미·서방의 <지원금>을 받고있었다. 2013 NED자체보고서에 따르면 비정부기구30개프로젝트에 120만달러의 보조금을 분배했는데, 주업무분야는 <시민교육프로그램>·<탐사저널리즘>·<선거감시>·<행정·입법부활동에대한시민통제>등의 언론지원이었다. 당연히 그본질은 친미·친서방정책강화다. 2020 미국무부·USAID는 그루지야에 1억2000만달러를 지원했다. 그중 USAID는 그루지야에서 진행중인 29개프로젝트에 자금을 투입하고있는데 연간예산이 7000만달러가 넘으며 야당미디어들에 2021 1000만달러를 할당했다. 2022 그루지야민간부분에 대한 ADB(아시아개발은행)보고서는 2019초기준 비영리·비정부조직1만2800개가 일반기업등록부에 등재돼있음에도 관련한 특별한 법률은 따로 없다고 지적했다.

법안폐기를 위해 63개대중매체단체·비정부기구가 야당과 연합해 법안을 <반민주적,위헌적>이라고 매도했다. 미국·EU는 그루지야당국이 이법을 채택할경우, 그루지야가 EU후보지위를 획득하고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할 기회를 박탈할것이라고 압박했다. 그루지야대통령 살로메주라비슈빌리는 법안을 반대한다며 친미·친서방시위대의 편에 섰다. 이에 러시아당국은 <그루지야대통령은미국출신의그루지야인들에게연설하는것이다.누군가의눈에보이는손이그루지야에반러시아적요소를주입하려고진지하게노력하고있다.>고 지적했다.

2024.2 그루지야국회의장 샬바파푸아슈빌리는 EU가 설립한 EED(유럽민주주의기금)가 자금지원방식으로 의회선거에 개입하고있다, 외국자금지원을 중단하지않으면 10.26 치러질 선거에서 그루지야인들의 선택이 방해받을것이라고 경고했다. 2024.5 그루지야총리 이라클리코바키제는 소셜미디어에 <전미대사가지원한2020~23,2차례혁명시도와외부자금지원을받는NGO를통해수행된시도에대해진심으로실망감을표했다>며 <외국영향력의투명성>법안초안에 대한 미·EU의 <거짓된진술>을 비판했다.

2024.4 법안은 다시 상정됐고 5월 국회의 최종승인을 얻었으나 5.18 주라비슈빌리대통령이 법안을 의회에 반송했다. 6.3 국회의장 파푸아슈빌리의 서명으로 법안의 최종승인이 완료됐다. 과정에서 친미시위대의 폭력시위가 있었고 미·서방의 내정간섭이 노골적으로 이뤄졌다. 미·EU·나토는 법안을 비난했다. 미국무부는 5.14 그루지야의원들이 <민주주의를훼손>했다는 이유로 제재를 받을수 있다고 압박했다.

2024.10.26 총선결과 <그루지야의꿈>89석·기타정당들61석을 차지했다. 친미야당세력들은 의회선거가 <조작>됐다며 반정부시위를 재차 감행했다. 미국은 <올해그루지야정부에반민주주의적행동을철회하고유럽·대서양의길로돌아갈것을지속적으로촉구>했다며 압박했다. 우크라이나에서 훈련받은 용병들은 그루지야내부정치상황을 흔들고 <색깔혁명>을 도발하기 위해 그루지야에 투입됐다. 친미세력의 시위와 쿠데타시도는 미국의 배후조종하에 계속 벌어지고있다.

칠레민중정권을 붕괴시킨 친미파시스트

칠레의 1953·58대선사이에 진보·개혁정당들은 사회당·공산당을 포함한 인민연합(인민행동전선)을 결성했다. 1958선거때 보수당·기민당(기독교민주당)·인민연합·급진당에서 주요대통령후보가 나왔다. 결과는 보수당 호르헤알레산드리가 당선됐으나, 인민연합 살바도르아옌데가 1위와 비교해 3만3500표차의 의미 있는 득표를 했다. 외국자본유입, 외국차관에 따른 이자·부채상환등으로 사회적재부가 대거 유출되면서 경제위기·민생파탄은 심각했다. 민중권력에 대한 민심의 요구는 갈수록 높아졌으나 미국의 개입하에 1964 기민당이 집권했다. 15개거대경제그룹이 경제를 좌우하며 빈부격차는 심화됐다. 1966 구리광산노동자들의 파업이 전개됐고 노동자들은 공산당계열노조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1970 아옌데가 36% 득표하며 당선됐다. 문제는 인민연합이 의회다수파가 아니었고, 사법부·감사원까지 나서서 아옌데정책을 반대했으며 미국의 조종하에 반인민연합이 광범위하게 조직됐다는것이다. 미정부는 아옌데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조직했고 경제제재를 강화했다. 인민연합내부에는 노동계급·중간층간 분열도 있었다.

아옌데집권첫해는 경제적으로 괄목할 성과들이 있었고 이에 1971지방선거에서 인민연합이 50%이상을 차지했다. 집권2년차부터 미국이 칠레의 차관·수입·수출을 봉쇄하면서 외환보유고가 고갈됐다. 1962~70 미CIA는 아옌데당선을 막기 위해 1100만달러를 투입했고, 1970~73 칠레경제를 위협하는데 800만달러를 사용했다. 급등하는 인플레이션으로 중산층의 경제적지위를 약화시키며 친미군사쿠데타의 대중적기반을 마련했다. 반인민연합세력은 반정부파업·시위를 조작했다.

1973.6 군사쿠데타가 발생했으나 <충성파>에게 진압돼 실패했다. 이미 칠레장교들은 반혁명교육을 받고있었고 1973 미국은 통상적군사원조를 2배 늘리며 칠레군부를 장악했다. 반면 쿠데타이후 노동자들은 공장점거·무기분배를 요구했으나 아옌데는 군에 의존하면서 기민당과 <타협>을 모색했다. 그사이 군은 <불법무기>를 색출하겠다며 공장들을 습격하며 노동자·민중을 타격했다. 많은 지역의 실질적통제권이 군부로 넘어갔다. 1973.9.11 친미파쇼쿠데타로 아옌데정권을 전복시킨 아우구스토피노체트는 4인의 군사평의회를 통해 칠레사회를 <재건>하겠다며 모든정당해산·시민권억압·의회해산·노조활동금지·파업과단체교섭금지·경제개혁무효화를 실시했다. 수천명을 잡아 가두고 고문·살해했다. 비밀경찰조직 <국가정보원>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군사평의회는 최소6개의 강제수용소를 만들고 국민100명당 1명은 최소1번이상 체포됐다. 경제위기·민생파탄도 심화됐다. 1975 GDP는 16.6% 감소했고 1970대비 1975 임금은 47.9% 감소했으며 실업률은 28%에 달했다. 고율이자의 해외자본이 대규모로 투입됐다. 이돈을 이용해 거대재벌들은 부동산투기를 심화하고 국영기업들을 인수했다. 1980 거품이 터지며 파산사태가 줄줄이 일어났다. 그결과 1982~86 실업률은 30%이상 치솟았다. 1991 170억달러외채를 지게 되면서 1인당외채비율은 세계최고수준이었다.

미제침략세력에게 위협받는 쿠바·베네수엘라

미제침략세력이 쿠바를 겨냥한 내부와해책동을 심화하고있다. 2021.7 쿠바에서 일어난 대규모반정부시위의 바탕에는 미국이 훈련·육성한 <산이스드로운동>이 있다. 오바마정부당시 쿠바·미국간 <국교정상화>이후 인터넷접속이 확대된 반면 미국의 대쿠바제재·경제전쟁의 심화로 경제상황이 악화됐다. 그로인해 미국의 반사회주의사상적침투가 심화됐고, 젊은층을 대상으로 한 공작이 본격화됐다. 2010년대부터 미정부는 반정부래퍼·록음악가·예술가·언론인양성을 위해 수백만달러를 투입했다. <산이스드로운동>의 주회원들은 OAS(미주기구)·남미쿠데타세력과 접촉하고 NED·USAID로부터 자금을 받았다. 2021.7시위가 있은지 며칠뒤 <산이스드로운동>은 미공화당싱크탱크<공산주의에의한우익희생자추모재단>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이같은 공작은 2000년대부터 시작됐다. NED산하 <민주주의저널> 2009논문에는 냉전이후 쿠바하층계급을 <반정부전위>로 육성하기 위한 계획이 정리됐다. <쿠바민주이사회>국가비서관을 역임하고있는, NED성원 올랜도구티에레즈는 쿠바하층청년들이 쿠바혁명기관에 비협조하게 만드는 전략을 세웠다. 2009 USAID는 지역힙합아티스트를 양성·홍보하며 반정부청년운동촉발을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미CIA의 지원을 받는, <수많은<색깔혁명>의씨앗을뿌린<혁명수출>그룹>으로 불리는 <작전그룹>의 라지코보직이 나서서 쿠바랩그룹과 접촉했다. 쿠바정보부가 보직·USAID간계약을 발견하고 작전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USAID는 2018 3G인터넷네트워크가 쿠바에 들어오게 돼 쿠바청년들이 소셜미디어에 접촉하게 되자 반정부미디어장치를 구축했고 2018 <쿠바소울재단>에 8만달러, <도시카르텔재단>에 7만달러를 투입하며 힙합등을 중심으로 사상문화적침투를 가속화했다.

코비드19팬데믹으로 인한 위기를 기화로 미국무부·OAS등은 <산이시드로운동>을 배후조종하고 쿠바의 코비드대응을 비난했다. 일례로 쿠바매체 <엘에스토르누도>는 쿠바를 <공산주의지옥>으로 매도했다. <엘에스토르누도>는 2020 NED로부터 14만5230달러를 받은 <전쟁및평화보고연구소>가 조종하는 여러매체중 하나다.

이같은 배경하에 2021.7.11 대규모반정부시위가 전개됐다. 시위는 빠르게 정리됐지만 미정부는 쿠바추가제재를 공언했다. 7.20 미하원외교위원회 쿠바관련의회청문회에서는 <산이시드로운동>이 쿠바정부전복시도에 중추적역할을 했음을 강조했다.

2024.7.11 미국무부는 2021.7.11쿠바반정부시위를 <기념>하면서 <3년후인지금도,거의700명의개인이이역사적이고압도적으로평화적인시위에참여했다는이유로쿠바에서부당하게구금돼있다>·<더밝고자유로운미래를추구하는그들의편에서겠다는우리의헌신도침묵하지않을것>이라며 반사회주의정권전복시도를 정당화했다.

베네수엘라는 1989 카라카스항쟁이후 1992 우고차베스프리아스중령이 전군의 약10%를 동원해 봉기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1998 대선에서 승리한뒤 볼리바르혁명을 통해 사회전분야에 걸친 근본적변혁을 이뤄냈고 꼬무나·볼리바르써클등 민중자치·대중조직을 강화했다. 2002.4 친미반차베스세력이 우익쿠데타를 일으켰다. 무력충돌로 인해 친차베스세력50여명이 사망했고 차베스는 유배됐다. 특전단·친차베스군부가 빠르게 쿠데타를 진압하고 주모자들을 체포했으며 여기에 더해 민중봉기가 일어나면서 위기가 정리됐다.

지금도 니콜라스마두로대통령을 겨냥한 미국·친미파쇼의 암살시도·정권전복시도가 계속되고있다. 특히 2019 친미극우 후안과이도가 <임시대통령>을 선언하고 미국이 이를 공개지지했으며 미출신용병들은 마두로암살을 목적으로 베네수엘라에 잠입했다가 적발됐다.

미제침략세력·친미파쇼세력들은 마두로가 당선된 2024.7.28 대선을 <부정선거>로 모략하면서 폭동을 일으키고있다. 2024.8 <과림바(극우폭력시위)>에 연루돼 체포된 2000명이상의 사람들중 80%이상이 미정부에 의해 텍사스에서 훈련을 받았고 콜롬비아마약밀매준군사조직·페루파시스트정부등과 공모한 사실이 드러났다. 한유명해커는 극우야당승리로 선거조작을 하기 위해 대선직후 선관위에 사이버공격을 한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친미파쇼세력은 2023~2024.1 최소5회이상 반정부쿠데타를 시도했으나 당국에 의해 저지·분쇄됐다. 한편 4월 미제침략세력과 파시스트간 결탁한 사실이 음성파일로 확인됐는데, 친미파쇼야당 마리아코리나마차도가 미당국에게 <완전한재정적질식>이 될때까지 베네수엘라제재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베네수엘라당국이 마차도의 피선거권을 박탈하자 미·서방은 곧바로 <정치탄압>이라고 모략했다.

베네수엘라당국은 친미극우들의 불법·폭력적인 쿠데타시도를 분쇄하면서 세계에 2024.9 <파시즘에반대하는국제기구>창설을 제안했고 2024.11 <2024.7파시즘희생자를위한정의위원회>를 창설했다. 법무장관 타렉윌리엄사브는 정의위원회와 관련해 <우리는사망자28명,경찰·군인97명,민간인98명,공공건물486채가파손된사건에대한정의를실현할것>이라고 강조했다.

친미파쇼세력들은 2025.1.10 마두로취임에 맞춰 자작극을 벌이며 반정부쿠데타를 시도했다. 서방이 주도하는 세계언론을 통해 베네수엘라당국이 마차도를 <불법체포>했다는 거짓선전이 확산됐다. 내무장관 디오스다도카베요는 <거짓말이다.파시즘은패배했다.>며 친미파쇼야당이 마차도에 대한 <구금>작전을 세웠다고 확인했다. 마두로는 극우폭동에 대해 <우리가사회주의를건설하는동안파시스트들은<색깔혁명>을일으키려고한다>고 피력했다.

미제국주의에게 변화된 이용가치

1989.12 조시부시미정부는 파나마 마누엘노리에가정권전복을 위한 일명<정당한명분(Just Cause)>작전을 개시했다. 군2만6000명을 투입한 이작전의 목표는 노리에가를 체포하는것이었다. 노리에가는 페루의 초릴로스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뒤 파나마로 돌아와 방위군 중위로 입대했는데, 오마르토리호스장군의 신뢰를 받으며 코스타리카접경지역 치리키의 전략지휘권을 획득했다. 1968 토리호스 주도하에 아르눌포아리아스대통령타도를 위한 쿠데타가 성공했다. 토리호스는 군사위원회지도자가 됐는데, 일방적인 친미노선과 거리를 뒀고 쿠바지도자 피델카스트로와 가까이 하면서 파나마의 고질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미국과의 파나마운하반환협정을 타결했다. 운하를 둘러싼 민중들의 반미정서는 매우 높아서 특히 1931·47·59·64 미군반대시위가 심각했는데 미국·파나마는 협정을 통해 운하통제권을 2000까지 점진적으로 파나마에 이양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운하작동유지를 위해 미국이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토리호스를 따라 승승장구하던 노리에가에게 미CIA의 공작이 들어갔다. 노리에가는 1986까지 32만달러이상을 받으며 미CIA요원으로 암약했다. 1981 토리호스는 비행기폭발사고로 사망했다. 미비밀기관에서 일한 존퍼킨스는 토리호스가 미국에게 암살당한것이라고 주장했다.

토리호스사후 노리에가는 1983.8.12 경비사령관이 된후 국가를 완전 장악해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1983선거를 조작했다. 1988 노리에가의 해임을 제안했던 에릭아르투로델바예대통령을 탄핵했고 1989 선거를 무효화했다. 노리에가는 파나마운하운영권을 갖고 미국도 위협했다. 미국은 노리에가와 단절하고 아르투로를 지원했다. 1988 미대선에 당선된 부시는 지미카터전정부에서 체결한 협정을 파기하기 위해 파나마를 침략했다. 부시는 자국민보호·<민주주의수호>·노리에가체포·운하보호를 구실로 파나마침공을 정당화했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미국의 침공이 UN헌장·OAS·파나마운하조약을 위반한것이라고 비난했다. 1988 미공화당선거운동과정에서 공개된 <산타페2:90년대미국의라틴아메리카전략>에서는 노리에가를 <민주정권>으로 대체해야할 필요성을 강변하면서 침공을 위한 계획을 드러냈다.

침략결과 미군24명이 사망한 반면, 파나마측은 미국측추산516명, 독립적인 조사위원회추산 3000~4000명이 사망했다. 사망자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수천명은 집을 잃고 난민수용소에 수용됐으며 20억달러의 재산피해를 입으며 경제는 마비됐다. 한편 미군남부사령부군사기지에서 대통령선서를 한 새대통령 기예르모엔다라는 백인부유층의 전통적과두계급을 대표했다. 이소수자본가들은 파나마의 150개주요기업을 지배하고있었다.

이라크에서는 1968 아흐마드하산알바크르가 주도한 <라마단혁명>이후 알바크르가 총리, 사담후세인이 부통령에 임명됐다. 권력교체후 <방위군>을 통해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진보·개혁세력을 대규모 숙청했다. 한편 비밀해제된 미기밀문서에 따르면 1970년대 제럴드포드정권시기부터 미·이라크간 유착이 있었다. 특히 미국가안보보좌관 헨리키신저를 중심으로 미국은 이란을 견제·압박하고 서아시아분열책동을 심화하는데 이라크를 이용했다.

1979 이란이슬람혁명이 성공해 친미팔라비왕조가 붕괴되자 같은해 대통령이 된 후세인은 1980 이란을 침공했다. 미국은 페르시아만일대 석유이권을 보호하고 반미로 돌아선 이란을 견제·압박하기 위해 1983.11.26 <국가안보결정지침>114문건으로 서아시아(중동)정책을 새로 다듬었다. 1983.12.19 이라크에 특사로 파견된 도널드럼즈펠드는 후세인과 회담을 했는데 이는 서아시아지역에서 미국이권을 지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레이건은 럼즈펠드에게 <미국은이란의승리를막기위해필요한모든자원을아끼지않겠다>는점을 후세인에게 분명히 밝히라는 지침을 내렸다. 1984 이라크와 국교를 회복했으며 1988 거액의 무기공급·CIA정보제공을 실시했다. 이란·이라크전쟁은 1988 종결됐다.

미정부는 1985~90 이라크에 대한 첨단기술수출에 대해 771건의 허가를 승인하며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개발을 부추겼고 이란에 대한 화학무기사용, 쿠르드족·시아파봉기진압, 정치적탄압등의 후세인국내정책을 용인했다. 1990~92 이라크주재소련·러시아연방대사 빅터포슈발류크는 미국의 이같은 입장이 후세인의 쿠웨이트침공을 부추겼다고 분석했다.

후세인은 1990.8.2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쿠웨이트는 풍부한 석유자원을 가진 나라이자 이라크민족주의자들이 이라크영토라고 주장해왔던곳이다. 미국은 서아시아역내개입을 의도로 1990.10.10 미의회인권위에서 15세소녀 나이라의 증언을 조작했고 부시는 이를 <쿠웨이트지원>의 근거로 악용했다. 쿠웨이트국왕은 거짓증언을 조작한 대가로 1150만달러를 받았다. 미국은 이를 계기로 걸프전을 개시했고 이라크는 패배했다. 후세인은 이라크내부적으로 독재를 강화하는 한편 친미에서 반미로 돌아섰다. 특히 후세인이 석유거래화폐를 유로로 전환한것은 미국에게 큰 타격이었다. 수십년째 쌍둥이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에게 석유달러패권이 무너지는것은 치명적이었는데, 후세인의 결정은 아랍전체에 영향을 줄수 있었다. 부시는 2001 9.11테러이후 <대량살상무기>를 내세워 2002.1 이라크를 조선·이란과 함께 <악의축>으로 모략했다. 2003.3.20 미국은 유엔안보리결의1441호를 근거로 이라크전쟁을 개시했고 40여일만인 5.1 후세인정권을 붕괴시켰다. 후세인은 2003.12.13 체포돼 2006.11.5 사형당했다.

인도네시아, 사건조작과 친미파쇼쿠데타

인도네시아 수카르노정권은 미CIA가 배후조종한 군사쿠데타로 인해 전복됐다.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공산당과 연대하고 제국주의의 내정간섭·주권침해에 맞서 <비동맹노선>을 견지해온 인도네시아독립운동지도자·초대대통령이다. 이당시 인도네시아공산당은 중국·소련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당으로서 당원수가 300만명이상이었다.

미제침략세력은 수카르노정권이 동남아역내패권장악의 걸림돌이 되자 정권전복을 위한 작전을 개시했다. 드와이트아이젠하워대통령은 1957.9.25 미CIA에 수카르노정권전복명령을 내렸고, 미CIA는 군부와 접촉하면서 반수카르노방송을 하는 방송국에 자금을 지원했다. 1958 1차군사쿠데타는 실패했으나 1965.9.30 수하르토의 친미군사쿠데타는 성공해 수카르노정권이 전복됐다. 쿠데타성공3주뒤 인도네시아주재미대사는 <(수하르토군부는)인도네시아공산당파괴를위해열심히노력해왔으며,나는이중요한임무를수행하는육군의결단력과조직에대해존경심을갖고있다>고 언급했다.

수하르토는 사건조작·대량학살을 우익쿠데타와 파쇼독재강화의 동력으로 삼았다. 군부내에는 미CIA에 매수된 우익군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영관급장교그룹이 있었는데, 이들은 1965.9.30 친미육군장성6명과 중위1명을 살해했고, 라디오방송으로 <미CIA에매수돼수카르노정권을전복시키려고음모하고있는매국적장성군벌집단을좌절시키기위해혁명을일으켰다>고 발표했다. 이장교중1명은 수하르토에게 <9.30거사>를 미리 알렸는데, 수하르토는 이를 쿠데타의 계기로 삼았다. 미·서방언론은 <9.30거사>를 <공산당쿠데타>로 대대적으로 왜곡선전했고 수하르토는 쿠데타성공이후 <1955~56인도네시아대학살사건>을 총지휘하면서 적게는 50만, 많게는 300만명으로 추산되는 공산당원을 포함한 민중들을 학살했다. 그과정에서 미CIA는 공산당원명단을 수하르토에 넘기면서 내전·학살을 부추겼다.

수하르토는 32년간 친미군사파쇼통치를 하다가 1998.5.21 하야했다. 인도네시아민중들의 반수하르토시위와 재야세력들의 하야압력이 계속되던 와중이었다. 쫓겨날 위기에 있던 수하르토를 공작한것은 미CIA였다. 1998.5.20 미국무장관 매들린울브라이트가 미해안경비대사관학교졸업식연설에서 <수하르토대통령은즉각사임해야한다>고 발언했고 그다음날 수하르토는 사임을 발표했다. 미국은 수하르토를 동남아 <반공보루>로 잘 이용한뒤 쓸모가 없어지자 동남아패권유지를 위해 버렸다.

미국의 대중국분열책동

2014 홍콩<우산혁명>은 미국의 배후조종하에 감행된 <색깔혁명>·대중국분열책동중 하나다. 2014.10 중인민일보해외판은 <우산혁명>전에 NED책임자와 폭동주모자들이 모의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중동·아프리카등에서발발한<색깔혁명>에서보여진미국의그림자를떠올리지않을수없다>고 분석했다. 영BBC는 <우산혁명>이 2년전(2012)부터 준비됐고 1000명이상의 시위참가자들이 특수훈련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시위를 주도한 중문대홍콩미국센터는 NED지원을 받고있었고 2013.11 미정보요원출신이 센터장에 취임했다.

2019 홍콩폭동도 미국의 조종하에 벌어졌다. NED는 홍콩지부중 하나인 <연대센터>에 15만5000달러, <전국민주주의연구소>에 20만달러, 협력단체<홍콩인권모니터>에 9만달러를 지급했다. 2019.8 중인민일보해외판은 <NED가홍콩의인권조사를위해1995~2015,1500만홍콩달러를지원했다>고 폭로했다.

미제국주의의 오래된 세계지배전략인 즈비그니에프브레진스키의 <거대한체스판>전략에 따라 감행되는 중국에 대한 분열·와해책동은 홍콩뿐만아니라 대만·신장·내몽고·티베트등을 대상으로도 감행되고있다. 대만전위기는 중국이 2024.5·6 2차례 전개된 대만포위연습인 <연합리젠(예리한검)>연습을 통해 확인된다. 조바이든미<대통령>은 퇴임1달여를 앞둔 2024.12.21 대만에 5억7130만달러규모의 군사원조를 승인했다. 바이든은 2024.9말에도 의회허가없이 미군보유군물자를 이전할수 있는 <대통령사용권한>에 따라 5억6700만달러규모의 대만방위지원을 승인했다. 한편 2024.12.20 미국방부산하 국방안보협력국은 보도자료를 통해 <미국무부가대만에대한2억6500만달러상당의지휘·통제·통신·컴퓨터현대화장비판매를승인>·<3000만달러상당의<MK75>76㎜함포와관련장비판매를승인>했다고 밝혔다. 미국·일본·필리핀등 제국주의·친미세력은 공공연히 대만인근에서 대중침략연습을 전개하고 미국은 필리핀에 이어 일본에도 중거리미사일시스템배치를 추진하고있다.

미국은 1970년대부터 티베트<망명정부>에 재정을 투입했다. 2002 NED·USAID는 티베트망명인을 위한 펀드를 책정했고 2016 미정부는 600만달러를 투입으며 2018 미의회는 티베트<망명정부>에 연간2200만달러예산을 투입했다. 2024.6.12 미의회는 <티베트·중국분쟁법>을 통과시켰다. 티베트가 중국영토임을 부정하는것이 핵심내용이다. 신장에서는 반중테러리스트를 동원하고있다. ETIM(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은 2014 우루무치기차역폭탄테러에 이어 우루무치시도심인민공원인근 폭탄테러를 감행해 수십명이 죽고 다쳤다. 2021.7 중공안부는 2014부터 1900개이상테러조직소탕·관련자1만4000여명체포·폭발물2000개를 압수했다고 밝혔다.

동투르키스탄분리주의자들인 ETIM·세계위구르회의(WUC)·동투르키스탄교육연대(ETESA)등은 튀르키예·서아시아등지에서 활동하는 테러리스트들과 연계돼있다. 이들의 배후조종자는 영국·미국이다. 미국은 신장등에서 중국이 인권유린을 하고있다며 중국이 <인권유린국>이라고 거짓선전을 하고있다. 한편 미CIA는 2021 대중국첩보공작·비밀공작전담 중국임무센터를 설립했는데, 그위치가 CIA비밀요원들이 제집처럼 드나들수 있는 중국인근해외미군기지인 평택으로 추정된다.

이승만하야와 5.16군사쿠데타

미국은 1945.9 코리아반도남단을 점령하고 1948 <대한민국>건국으로 친미대리정권을 세운뒤, 1950 코리아전, 1960 이승만하야, 1961 5.16군사쿠데타까지 <한국>역사의 중요변곡점마다 친미정권을 배후조종하면서 <한국>식민지정책을 강화했다.

코리아전당시 <에버레디>계획은 이승만의 돌발행동을 대비해 만든 미국의 군사작전안이다. 이승만은 코리아전을 통해 <북진통일>을 하거나, 미<한>상호방위조약체결을 하고싶었고, 반면 미국은 휴전선부근에서 교착상태가 이어지고있었기때문에 전쟁을 빨리 마무리하고싶었다. 이승만은 2대총선에서 무소속이 2/3를 차지하며 간선제로는 대통령당선이 불가능해지자 직선제로 바꾸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 1952.5.24 교도소죄수들을 <무장공비>로 위장시킨 <금정산공비사건>을 조작했고, 이를 기화로 1952.5.25 부산·경남·전남·전북의 23개시·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5.26 전시중 조선과 내통했다며 야당의원50여명을 연행했고 직선제개헌·국회해산을 위한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다. 이승만자유당은 정치깡패<백골단>을 조직해 국회해산·내각책임제개헌추진파의원공격등의 백색테러를 벌였다. 한편 주<한>미대사 존무초는 같은해 2월 <한국>정치상황을 미국무성에 보고했고, <부산정치파동>이 발생하자 주<한>미대리대사 프란츠라이트너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성명을 통해 이승만을 통제하고 <무력사용>까지 고려해야한다고 건의했다. 6.3 라이트너가 해리트루먼미대통령의 메시지를 이승만에게 전달했고, 국회를 해산하지않기로 결정했다. 7.4 이승만의 의도대로 발췌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승만은 1953 전국곳곳에서 <휴전반대>시위, 4월 국회에서 <북진통일>결의안발표, 6월 <반공포로석방사건>등을 일으켰다. 이에 미국은 <에버레디>계획으로 이승만이 단독으로 <한국>군에 북진명령을 내릴 가능성을 가정해 이승만연금·계엄령선포등의 계획을 세웠다.

민중의 반정부시위가 격화되고 항쟁으로 전화되자 제국주의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고 군부내 친미세력으로 친미파쇼정권을 수립할것을 계획했다. 1960.4.21 미CIA비망록을 보면 <우리결론은이승만을권력에서제거해야한다는것>·<우리는거의확실히한국군의협력을구해야할것이다.정치적재건은기존야당구성원에의해달성될수없을것>이라고 명시됐다. 또 <한국의군고위지휘관들은우리쪽군사,정치대표들과밀접한연계를가져왔고,대체로유능하고고도로동기가충만해있는집단>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1960.4.20 주<한>미대사 월터매카나기가 미국무부에 올린 보고서에는 4.19시위진압·계엄령시행을 위해 <한국>정부가 요청한 <한국>군15사단동원에 대해 유엔군사령관대행이 동의했다고 돼있다.

이승만은 미국의 압력에 의해 하야했다. 이승만은 1960.4.26 <국민이원한다면>이라는 <조건부하야>성명을 발표했다. 성명발표전날인 4.25 매카노기와 미CIA<한국>지부장 필실바가 이승만에게 전화해 <하야>를 압박했다. 성명발표직후 매카노기와 주<한>미군사령관 카터매그루더는 이승만에게 <미국의근본적이익>에 위험을 끼친다며 즉각 하야할것을 회유·압박했다. 이승만은 4.27 대통령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승만퇴진후 미국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미국무부는 허정과도정부에게 일본과 관계개선할것을 압박했다. 4.28 허정은 대통령대행으로서 매카노기를 초청해 미국의 내정간섭을 자처하면서 자신은 미국의 <충고>를 전적으로 받아들일것이라고 굴복했다. 허정은 미국의 조종대로 <반공주의정책더욱견실히추진>·<부정선거처벌대상자를책임자등으로제한>·<혁명적정치개혁을비혁명적방법으로단행>·<4월혁명과정에서미국역할을내정간섭으로보는것은이적행위로간주>·<한일관계정상화를위해노력>을 내용으로 하는 <5대시책>을 발표했다. 1960.5 진보세력의 집권가능성이 높아지자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했고, 내각책임제개헌안이 6.10 국회본회의에 상정됐다. 미국무부는 온건지향적인 민주당이 다수파가 되고 보수그룹이 소수파, 공산주의자를 제외한 진보그룹이 제3세력을 구성하는것으로 판을 짰다. 민주당은 민의원233석중 177석을 장악했다.

1961 5.16쿠데타는 미CIA가 기획·조종했다. 이승만때부터 군부내친미세력을 육성해온 미국은 1961.4 박정희쿠데타음모를 정확히 알고있었다. 박정희는 1960.2부터 쿠데타를 준비했고, 4.19항쟁이후 수차례나 쿠데타를 기도했다. 미국은 박정희를 주목하고 쿠데타준비·시도를 묵인·방조했다. 미CIA국장이었던 앨렌덜레스는 <내가재임중CIA의해외활동에서가장성공한것은이혁명(5.16쿠데타)>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1961.5.16 03시경 장도영육군참모총장은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있다며 미군헌병들이 <한국>해병대를 막아줄것을 요청했으나 주<한>미군사령관 카터매그루더는 이를 거절했다. 미국무부는 워싱턴시간 15일 05시21분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발했으며 매그루더가 쿠데타진압을 위해 미군을 동원하지않을것이라는 결정에 미대사대리가 동의했다는것을 미대사관으로부터 보고받았다. 장면총리는 1년도 안돼 미국에 외면당했다. 한편 미정부외교문서집 <미국의외교관계(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1961-63제22권>에는 5.16군사쿠데타를 앞두고 1달넘는 기간의 기록이 통째로 빠져있다. 미기밀외교문서는 30여년이 지나면 공개여부를 검토하는데, 국익을 해칠수 있거나 관련자의 신변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부분은 제외한다. 그당시 <한국>에서 급박한 정치상황이 전개되면 미대사관·CIA<한국>지부가 미국무부·CIA본부에 하루에도 몇번씩 전문을 보내는데, 34일간의 문서를 모두 비밀해제하지않은것이다. 한편 일제시대 일본군정보장교에서 해방직후 남로당으로 들어온 박정희는 1948 여순항쟁당시 사형을 선고받자 변절했고, 미군대위 제임스하우스만에 의해 1948.8.2 구제됐다. 박정희는 남로당동지들을 밀고하고 이승만의 좌익숙군작업에 부역하며 반역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하우스만은 여순항쟁진압의 <계획·실행>에서의 <효율성>으로 미공로훈장을 받았다. 이는 5.16쿠데타에서 미국이 적극적,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것을 확신하게 한다. 5.16쿠데타직후 미CIA·국무성·백악관은 박정희군사독재를 승인했다.

미국에게 버림받은 박정희

박정희가 집권하자 미국은 <한>일회담체결을 재촉했다. 1961.6.13 미NSC(국가안보회의)에서 존케네디미대통령은 <한국발전의가장큰장애물은한일간의지속적반목>이라고 강변했다. 케네디는 일수상 이케다하야토에게도 <한>일관계개선을 촉구했다.

1962.3 2차<한>일회담이 <대일청구권>문제로 중단되자 미국은 <한>일양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1962.10 방미길에 일본에 들러 오히라마사요시외무상과 이케다를 접견했고 딘러스크미국무장관에게 접견결과를 보고한뒤 귀국길에 다시 일본에 들러 오히라와 2번째 협상을 했는데, 그결과가 <김종필·오히라메모>다. 주요내용은 무상3억달러·유상2억달러·차관1억달러로 청구권을 해결한다는것이다. 자금명목을 명시하지않음으로써 일본은 <독립축하금>을 건네고 <한국>은

<보상금>을 받았다고 주장할수 있도록 했다. 야당·대학생들은 <민족반역적한일회담의즉각중지>를 촉구하는 대규모시위를 벌였다. 이에 박정희는 1964.6.3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해 일체의 집회·시위를 금지하고 모든대학을 강제휴교했다.

박정희는 1964.11 미국방문을 추진했는데, 이를 기화로 미국은 <한>일협정서명을 더욱 강박했다. 박정희는 미국에게 협정을 1965.6까지 체결하겠다고 밝힌뒤 5월 미국에 방문했다. 계엄상태에서 1965.6 외무장관 이동원이 방일해 <한>일협정에 서명했다. 이동원은 5개월뒤 방미해서 <미국은한국과일본의큰형이다>라는 매국적이며 굴욕적인 망언을 내뱉었다.

박정희암살의 배후는 미국이다. 1978.6 미CIA는 <현재정부는평양을위협할수있는무기체계를획득하는데집착하고있다>고 보고했다. 1978.10 미CIA국장 로버트브루스터, 주<한>미대사 윌리엄글라이스틴은 <한>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접촉했다. 1979.9.26 브루스터·글라이스틴은 김재규를 재차 만났다. 1979.10중순에 터진 10월항쟁으로 10.18·20 부산·마산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10.18 글라이스틴·해럴드브라운미국방장관이 박정희를 만나서 <정치적억압의대가에대해경고>했다. 10.26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암살당했고, 10.27 미군사령관 존위컴과 글라이스틴이 미대사관에서 회동했다. 위컴에 따르면 전두환은 브루스터의 <오랜친구>였다. 전두환은 박정희암살사건의 수사를 맡았는데 위컴은 <브루스터가미국이그지역에서영향력을확대할것이라고말했다>라고 언급했다. 김재규는 심문중에 <전임미대사가자신에게박대통령이<너무오랫동안집권>했다고말했다>라고 언급했고, 이내용은 1979.11말 글라이스틴에게 보고됐다. 1979.12.12 전두환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웬트워스공대 인문사회학부교수 조지카치아피카스는 CIA가 외국정보지도자제거를 위해 노력한 명확한 패턴, 예컨대 1953 이란, 1954 과테말라, 1964 브라질 지도자들을 강제로 제거하는데 CIA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한국>사건(1979.10.26박정희암살)은 이패턴과 일치한다고 언급했다.

CIA의 기획·조종으로 집권한 전두환파쇼독재

미국은 전두환군사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배후조종했다. 1979 12.12쿠데타당시 미CIA<한국>지부장 브루스터는 전두환에게 국방장관 노재현의 소재를 파악해줬다. 전두환은 정승화육군참모총장에게 <김재규내란방조>혐의를 씌우며 연행하려고했다. 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은 노재현의 의견을 듣고 정승화연행을 재가하겠다는 입장이었다. 12.13 03시경 전두환은 브루스터에게 노재현의 위치확인을 요청했고 총리공관으로 가던 노재현을 보안사에 강제연행했다. 12.12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1·5공수, 9사단등의 부대이동을 승인했다.

미국을 등에 업고 권력을 탈취한 전두환에 맞서 궐기한 1980 5.18광주민중항쟁에도 미국은 깊이 개입해 전두환을 비호·방조했다. 1980.5.22 백악관<한국관련정책검토위원회>회의록에 따르면 미정부주요결정권자들은 <최소한의무력으로광주질서회복>을 결정했다. 미국방정보국은 광주민중들을 <폭도>로 몰아갔다. 5.23 미워싱턴포스트는 <미국은한국사태를이용한북괴의도발가능성에대비한예비조치로22일미항모코럴시호를한국수역으로출동시켰다>고 보도했다. 5.25 코럴시호는 <한국>군사파쇼강화를 위해 부산항에 입항했다. 1980.8.27 위컴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피살후가장성공적인미국의한국정책중하나는전두환정권의수립>·<우리의노력은결코헛되지않았고그보람도크다>라고 언급했다.

전두환군사파쇼하의 2건의 대표적인 자작극의 배후에도 미국이 있다. 1983.10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결과 장관·차관·기자·경호원등 <한국>측만 17명폭사·10여명중경상을 입었다. 전두환은 수행원들만 미리 보내고 자신은 맨마지막에 차를 타고가다가 테러가 발생하자 차를 돌렸고 폭발을 <북괴소행>으로 규정했다. 이사건은 미얀마정부가 단독수사한것이 아닌 레이건·전두환의 공작에 의해 수사가 조작됐다. 일례로 미얀마정부가 중간수사발표때 조선을 배후로 특정하기 주저하자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대공수사관련자들이 급히 미얀마로 날라가 <서울에서왔다>고 주장하는 범인을 설득해 진술을 번복하게 만들었다. 테러증거는 사건발생다음날 미얀마로 날라간 <안기부진상조사단>이 준비해간것이었다.

1987 직선제대통령선거가 있기 약보름전 KAL기사건이 터졌다. 미CIA는 폭파범 김현희를 조사하는데 깊이 개입했다. 1988.1 레이건정부는 김현희의 거짓진술과 안기부수사발표문을 바탕으로, KAL기폭파가 조선이 저지른 테러라고 모략했다. 유엔주재조선대사가 <한·미·일모략극>임을 폭로하고 안보리참가국들이 유엔이나 독립된 국제기구에서 독자적, 심층적 조사가 이뤄져야한다고 하자, 미국은 서둘러 회의를 종결했다. 2건의 사건으로 미국과 전두환은 조선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고 1980 광주민중항쟁이후 확산된 <한국>내에서의 반미투쟁을 억압했으며 반북의식을 부추겨 평화통일요구를 억눌렀다.

1987 6월항쟁당시 진보세력은 민주화운동세력과 함께 반파쇼항쟁을 주도하고있었고 민심은 전두환타도를 촉구하고있었다. 미국무부동아시아태평양담당차관보 개스턴시거는 <한국>에 방문해 6.29선언발표직전 <1987대선이있을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때는 개헌조차 착수하지못한 시점이었다. 미일부인사들은 6.29선언을 주도한 사실을 숨지기않았다.

미국은 군사파쇼독재를 전적으로 밀어주면서도 친미개혁세력을 관리했다. 이는 반미자주·반파쇼민주의식이 갈수록 높아지는 <한국>민중을 개량화시키기 위한 계책이자 <군부정권을비호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방도로써 <한국>민주화세력을 지원한다고 과시하기 위한것이었다.

일례로 <김대중구하기>가 있다. 김대중은 1980.5.17 계엄확대와 동시에 체포돼 <사형>선고가 예정된 재판을 기다리고있었다. 미국은 <김대중구명>을 위해 여러차례 전두환을 압박하는 한편, 일본을 통해서도 김대중의 사형이 집행될경우 일<한>협력이 크게 제약될것이라고 압력을 넣었다. 1981.1.23 대법원에서 김대중사형이 확정됐고 같은날 전두환은 국무회의에서 무기로 감형했다. 1982.3 무기에서 20년으로 감형된 김대중은 같은해 12.23 형집행정지로 미국에 강제망명됐다. 미국무부는 김대중석방에 환영논평을 발표하고 일총리는 <바람직한일>이라고 논평했다. 26년에 걸친 박정희·전두환친미파쇼군사독재와 김대중의 <구명>은 미국이 <한국>의 친미파쇼세력과 친미개혁세력을 99대1로 밀어주고있다는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국지전·쿠데타·자작극·내전획책의 배후조종세력

2024.12.3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비상계엄은 <전시·사변과그에준하는국가비상사태>를 조건으로 하고 헌법·계엄법상 국회등헌법기관은 보호대상이다. 윤석열내란·반란세력은 평시에 계엄을 선포했고 군·경4700여명을 국회·중선관위(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투입했다.

12.3내란·반란을 둘러싼 국지전·자작극·내전을 기획·조종한 세력은 미제침략세력이다. 미국의 한인기시사유튜브방송은 12.4 미육군대령출신 더글러스애벗맥그리거와 대담했다. 맥그리거는 미정보기관·주<한>미대사·주<한>미군사령관이 사전에 윤석열의 음모전과정을 파악하고있었고, 쿠데타성공을 위해 <가능한모든방법으로지원>했을것이라고 언급했다. 맥그리거는 미국이 본질적으로 <한국>을 군사식민지로 취급하며 미CIA가 윤석열대선당선을 돕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추정했다. 이재명이 근소한 차로 낙선하자 CIA<한국>선거개입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었으며 <한국>정보기관·군사력은 미정보기관·미군권력의 부속기관이라고 해설했다. 2021 도널드트럼프가 퇴임하고 2022 윤석열이 선출됐는데 윤석열은 <한국>에서 <식민지풍하인>으로 널리 간주되는 사람으로서 CIA에 의해 선택될수 있다고 덧붙였다. 더해 <조선군러시아파병>은 대담한 거짓말인데도 <거의CIA부속기관>인 정보원(<국가정보원>)이 이파병설을 유포하고있다고 언급했다. 덧붙여 윤석열은 우크라이나친미신나치 블로지미르젤렌스키와 동일하다고 했다. 국민당(국민의힘)은 항상 워싱턴에 동조해온 정당이며 그맨위에 있는 사람들을 미제국주의추종자들이라고 평가했다.

2022 <대한신보>사이트 조원홍과 2023 다른백년명예이사장 이래경은 <미CIA·윤석열접촉>을 주장했다. 조원홍은 <2019.9.28문재인대통령이미국순방길에오르던그순간에미정보국장지나해스펠이소리소문없이대한민국에나타났다.곧바로윤석열검찰총장을만나임인년대통령선거를거론하며윤석열에게출마해줄것을권한다.>라고 적시했다. 이래경도 <2019윤석열의검찰총장취임직후당시CIA수장인지나해스펠이극비리에방한해윤총장을면담했다.…CIA면담이후윤총장은정치·안보이슈등을포함해과감해지고문재인대통령도무시하는안하무인의행보를보였다.>라고 정리했다. 윤석열대통령실은 공식이 아니라 언론사개별인터뷰를 통해 소극적으로 반박하면서 이래경을 고발하지못했다. 2023.6.11 더탐사는 <검찰쿠데타>배후에 미국이 있을것이라고 분석했다. 2019.9 미FBI국장 크리스토퍼레이는 윤석열검찰총장과 접촉했는데, 극우매체들은 이만남을 <미국네오콘등보수세력이윤석열을차기로밀기로한신호>로 받아들였다. 한동훈은 윤석열집권직후 법무장관으로서 방미를 해 뜬금없이 레이와 접촉했다. 2022.2.13 대조선강경론자·전부통령 마이크펜스는 방<한>해 대선주자들중 오직 윤석열만 만나면서 미정가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편 2021.10 CIA중국미션센터가 설립된데 반해 <한국>미션센터는 2017.5설립돼 2021 CIA동아시아전체를 담당하는 부문으로 흡수되면서 사실상 폐지됐다. CIA가 특정국가를 집중해 별도미션센터를 만든것은 <한국>이 최초다. <한국>미션센터가 문재인정권때 설립·폐지된 이유는 이기간에 특별한 공작이 필요해서인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한국>전, 동아시아전·서태평양전책동은 노골적이었다. <동북아판나토>는 2023.8 캠프데이비드선언으로 완성, 12월 미일<한>조선미사일발사경보실시간공유체계가동으로 심화, 2024.6 <프리덤에지>연습으로 실전화됐다. <나토의태평양화>는 2024.7 나토워싱턴정상회의로 완성됐고, 2024.6~8 림팩등 태평양에서의 동아시아친미국가·나토가입국의 다국적합동군사연습들로 실전화됐다. 2024.7 <아이언메이드>합동군사연습으로 미핵전력·<한>재래식전력의 통합운용이 전력화됐고 2024.8 <을지프리덤실드>합동군사연습은 다영역전으로 전개됐다. 2024.1~10 미<한>합동군사연습은 총130회 실시됐는데, 이는 2003~22 132회에 버금간다.

윤석열은 <동북아판나토>가 완성된뒤 2023.12 비상계엄준비를 본격화했고, 12월말 전방부대에 가서 <선조치·후보고>를 주문했다. 2023.12.28 시작한 미<한>합동군사연습기간에 맞춰 2024.1.1~5 육·해·공접경지역에서 북침연습이 살벌하게 전개됐다. 2024.3 <프리덤실드>합동군사연습기간에 맞춰 계엄연습<충성8000>을 전개했다. 6월 윤석열은 9.19남북군사분야합의서를 완전 파기하면서 접경지역에서의 군사연습을 <합법화>했는데, 이같은 조치에 미국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9월 김용현이 국방장관이 된뒤 9월 백령도K9자주포·천무다연장로케트포390여발발사, 10월 무인기평양공격·중화기사격·천무동해상발사·백령도<드론>작전, 11월 백령도자주포190발발사·오물풍선원점타격지시를 통해 <대북국지전>을 광란적으로 도발했다. 조선이 <전략적인내>를 견지하지않았다면 국지전은 터졌을것이고, 10월 <전시계엄>이 선포됐을것이다. 한편 10월중순 우크라이나발<조선군러시아파병설>을 받아 정보원1차장 홍장원이 우크라이나안보당국과 연계해 모종의 작전을 준비했다. 홍장원은 12.4 우크라이나출장을 예정하고있었다.

12.4~14 계엄해제에서 탄핵가결사이에 미국은 <몰랐다>에서 <계엄준비와자작극을알고있었다>로 말을 바꿨다. 2024.12.12 미하원의원 브래드셔먼은 <미국은분명히정교한정보시스템을갖추고있고한국에상당한병력도배치하고있다>·<미국역시미국만의정보수집능력이있다>·<대한민국국군이남한내한장소를공격해사건이발생했다해도미국은북한의공격이아니라는걸알고있었을것>이라고 언급했다. 이후 공개된 <대남자작극>을 종합해보면 전정보사령관 노상원을 중심으로 <북파특수부대>HID를 움직여 선관위서버탈취, 선관위직원불법체포·고문으로 지난 총선을 <불법선거>로 호도해 국회를 해산하려고했다. 유력인사를 사살하고 남북간교전을 조작하려고했다. 한국은행강남본부·청주공항·성주사드기지·대구공항을 대상으로 모종의 <작전>을 준비했다. 백령도인근에서 16명유력인사<사살>·<북한군소행>으로조작·시체<수거>의 <백령도>작전을 계획했다. HID전·현직요원들이 오직 직상급의 명령하에서만 <점조직>으로 움직이며, 전직요원들이 모종의 장소에서 무기를 반납해도 그무기는 다른 요원이 사용할수 있다는 사실은 자작극이 언제든 벌어질수 있다는것을 보여준다. 한편 미CIA와 미육군정보사예하501군사정보여단내 <휴민트(HUMINT 인간정보)>수집전담524정보대대가 있다. 최근 정보활동진행·요원포섭관련 체포·암살제보가 있었는데 전문가들은 <2중간첩> 즉, 501여단과 연결돼있다고 보고있다. HID는 정보사가 아닌 미CIA·미정보사의 명령하에 준동할수 있다.

야당이 1차탄핵소추안을 통해 윤석열의 <미일편향외교>를 지적하자 미국은 <미국의강력한권고·지원속에서추진된외교정책성과를탄핵사유로삼는것은결코정당화될수없다>며 윤석열이 미제의 하수인임을 드러냈다. 더해 내란공범 한덕수·최상목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며 내란·반란세력의 편임을 노골화했다. 야당이 2025.1.9 발의한 내란특검에 윤석열의 <대북국지전>에 따른 <외환>혐의추가에 대해서도 미제국주의<코리아반도전문가>들은 <계엄령만큼이나민주주의에위협이되는발상>이라고 막말했다. 미공화당하원의원·<한국>계 영김은 <한국에서대통령탄핵을주도한이들을포함한정파들은(한미)동맹과한·미·일3자파트너십을약화하려노력해왔다>며 극우반동세력입장을 노골적으로 대변했다. 윤석열내란·반란수괴의 체포·구속·파면을 앞두고 친미극우반동의 국민당·언론·유튜브·단체들이 총집결하고 급기야 <1.19폭동>·유혈충돌을 일으키면서 내전을 획책하는 상황도 미국의 조종없이는 불가능하다.

내전에 국지전이 더하면 <한국>전이며, 이는 동아시아전·서태평양전을 불러온다. <한국>전은 막판에 몰린 윤석열내란·반란무리의 유일한 살길이며, 명실상부한 3차세계대전을 일으켜 <신냉전>체제를 조작하려는 제국주의진영의 최고노림수다. 조선은 2024.1.15 시정연설에서 <전쟁이일어나는경우에는대한민국을완전히점령·평정·수복하고공화국영역에편입>을 언급하며 <평정>선언을 했다. 제국주의진영에게 있어 <한국>전은 조선에게 있어 평정전이다. 2024.12 8기11차당중앙전원회의에서는 <대한민국이미국의철저한반공전초기지로전락>·<최강경대미대응전략>을 선포했다. 2025.1.6 발사한 신형극초음속중거리탄도미사일은 미국의 태평양거점을 타격할수 있는 <조선의오레쉬니크>로 평가된다. 계엄·국지전은 평정전을 불러온다. 평정이 되면 자주·민주·통일로 나아간다. 윤석열의 친미친위쿠데타를 계기로 시작되는, <한국>반역역사의 종지부를 찍는 <한국>혁명, 코리아반도의 대변혁은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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