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2 항쟁의기관차〉 〈대한민국〉을 반대한 남민중의 무장봉기

1945.9 코리아남측지역에 들어선 미군정은 8.15광복직후 각지에 수립된 인민위원회들을 불법화했다. 미군정의 목적은 코리아의 독립국가건설이 아니라 코리아에 대한 식민지배체제확립에 있었고 미군정은 일제의 식민통치체제를 그대로 이어받기를 원했다. 우리민중은 일제식민지잔재를 완전청산하고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투쟁했다. 이사이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1946 미군정을 반대해 8월 전남 광주화순탄광 노동자들의 투쟁과 전남 무안군 하의도농민투쟁, 청년학생들의 <국대안>반대투쟁이 벌어졌다. 9월 4만명이 넘는 철도노동자들의 대중적인 총파업이 일어났고 이에 호응해 모든 산업부문에서 16만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단행하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나섰다. 10.1 대구에서 있었던 시위에서 경찰들이 시민들에게 발포한것을 계기로 10월항쟁이 폭발했다. 10월항쟁은 각지역에 걸쳐 거의 2달간 지속됐다. 미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만명의 애국민중을 검거·투옥·학살했다. 제주지역은 당시 지역차원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을 조직하고있었다. 1년여간의 논의 끝에 1947.2.23 도내읍면대의원·각사회단체대표등315명, 방청객200여명의 참석하에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다. 대회에서는 긴급동의로 제주도남로당의 합법화를 촉구하고 미군정사령관 하지중장에게 10월항쟁당시 민중에 발포한 경관 처벌을 요구하는 항의문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도민전의 주관하에 1947.3.1 <통일독립전취>를 요구하는 3.1절기념대회가 북국민학교에서 개최됐다. 이어진 가두시위에서 경찰의 발포사건으로 6명이 숨지고 6~8명이 부상을 당했다. 경찰의 발포에 항의해 3.10 제주전역에서 민·관총파업이 진행됐다. 기록에 따르면 총파업에는 166개기관·단체의 4만1211명이 참가했다. 미군정은 <좌익척결>에 주력한다는 방침을 내세워 3.1발포사건이후 1948.4.3까지 2500여명을 투옥했다. 서북청년회가 제주에 들어와 경찰·행정기관·교육기관등을 장악하고 <빨갱이사냥>의 백색테러를 자행했다. 이런 폭압적상황속에 1948.4.3 02시를 기해 남로당 김달삼등 350여명이 제주지역24개경찰지서중 12개지서를 급습하며 무장봉기했다. 5.10선거를 앞두고 미군정과 무장대사이의 평화협상이 성사됐으나 협상사흘만인 5.1 우익청년단의 <오라리방화사건>과 5.3 미군정의 총공격명령에 따라 협상은 깨졌다. 제주도무장대진압은 <대한민국>정부의 첫과제가 됐다. <대한민국>정부는 10.11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해안에서 5㎞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대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군경토벌대는 중산간마을들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학살했다. 11.17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1949.3 <산에서내려와귀순하면과거행적을묻지않고살려주겠다>는 선무공작에 1만명의 주민들이 하산했으나 1600여명이 총살당하고 전국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졌다. 제주항쟁은 <대한민국>건국과 이승만정권수립의 반민중성을 증시하며 제주민중의 투쟁에는 통일독립국가건설을 향한 우리민중의 의지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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