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을 수립한 이승만정부는 제주무장봉기를 수습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하고있던 국군14연대에 제주무장봉기진압명령을 내렸다. 이에 14연대군인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군사봉기에 나섰다. 10.19 07시 육군본부로부터 제주사건진압을 위한 출항명령이 하달되자 이날 저녁 상사 지창수가 연병장에 부대원들을 소집하고 <경찰을타도하고,동족상잔의제주도출동을반대하자>고 호소했다. 지창수를 연대장으로 추대한후 1000~2000명의 인원이 여수로 진격했고 이어 열차를 이용해 순천으로 진격했다. 10.20 오후 순천도 함락됐다. 이때 순천에 파견나와있던 홍순석의 2개중대와 광주4연대소속진압군이 14연대에 합류했다. 이들은 10.22 전남동부지역의 6개군을 장악했다. 14연대의 점령에 호응해 여수·순천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설치됐으며 일부학생들이 14연대에 참가했다. 10.22 여수·순천지역에 계엄령이 발효되고 14연대와 진압군간의 첫교전이 순천시에서 벌어졌다. 진압군은 10.23 순천을 장악했다. 잔여병력과 무장한 시민들이 항전했으나 진압군은 인근 광양과 보성까지 수복했다. 10.24 14연대의 주력은 백운산과 벌교방면으로 도주하고 10.25 진압군의 탈환작전이 시작됐으나 주력이 빠져나간 조건에서 10.27 진압군에 의해 여수가 장악되면서 여순사건은 종결됐다. 진압과정에서 민간인희생이 발생했으며 진압이후에도 비공개군법회의를 통한 처벌이 계속됐다. 한편 여수를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입산한 14연대는 11월경부터 인민유격대로 활동했다. 1948.10.20 주<한>미군사고문단은 회의를 열어 진압작전을 위해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할것을 결정했다. 육군본부는 1948.10.30 호남방면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1달간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1949.3.1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와 호남지구전투사령부로 개편하고 <토벌작전>을 강화했다. 1949.4 <토벌작전>에서 김지회·홍순석이 사살됐고 지창수는 코리아전발발후 처형됐다. 1946 미군정을 반대하는 남민중의 항쟁은 남지역전역에 걸친 인민유격대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남조선노동당은 1947.2 각도별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1947.3 경남군사위원회가 조직됐으며 1947.8말까지 초모한 연대병력은 830명, 공작대원은 763명, 참가군중은 3만6000명이었다. 1948.1.4 미군정경무부장 조병옥은 부산7관구경찰청에서 400여명을 검거했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1949.7 조선인민유격대가 창설돼 오대산지구의 1병단, 지리산지구의 2병단, 태백산지구의 3병단으로 편성됐다. 1949.9.28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를 남원에 설치하고 1949.10.30~1950.2.28 민심수습·사상선도·농촌재건촉진·원호사업을 병행한 소탕작전을 실시했다. 군경토벌대는 1950.3말까지 <토벌>을 완료하려했지만 그시기를 지나서도 남조선인민유격대는 전투를 계속하고있었다. 1950.2.23 주<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가 <토벌>지구를 직접 시찰했다. 주<한>미군사고문단은 미군철수전과 마찬가지로 <토벌>작전현장에 미군장교들을 파견해 <토벌>작전과 대량학살을 지휘·통제하고있었다. 이승만정부는 <토벌>작전과정에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을 <공비>에 의한 학살사건으로 조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