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2 항쟁의기관차〉 파시즘의 발호와 〈한국〉내전, 본격화되는 3차세계대전

전제군주제에 뿌리를 둔 파시즘 

1차세계대전이후 등장한 이탈리아파시즘, 독일나치즘, 일본군국주의는 모두 파시즘이다. 파시즘의 어원은 이탈리아의 <파쇼>다. <파쇼>는 고대로마 집정관이 시찰을 떠날때 휴대하던 의관을 칭하는것으로 막대다발속에 도끼1자루 꽂은것을 칭한다. 추후 묶음·단체·결사를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1919 이탈리아 베니토무솔리니는 극우반동군부세력과 지주·자본가의 자식들을 규합해 <이탈리아전투자단>을 조작하고 1921 <국민파시스트당>으로 개칭하면서 <파쇼>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파시즘은 대내적으로 소수파쇼세력의 수중에 국가권력을 집중시킨채 사회대다수구성원에 대해 정치적으로는 초보적인 민주적자유·권리를 말살하고 경제적으로는 착취·약탈을 강화하며 침략전쟁준비를 광란적으로 벌인다. 대외적으로는 인종주의·민족배타주의를 고취하면서 다른 나라들을 침략·지배한다. 

나치즘은 독일파쇼당인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반동적인 침략사상이다. 나치즘을 <민족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라고도 하는데, 이명칭들은 히틀러도당이 침략적이며 약탈적인 정체성을 가리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다. <나치즘>은 독일착취계급의 침략적, 민족배타적 극우사상을 배경으로 하고있으며 1차세계대전패망후 조성된 정치·경제적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독일제국주의의 복수주의야망과 파쇼적침략사상이 결합돼 형성됐다. 아돌프히틀러·나치당이 확산시킨 나치즘은 독일에 의한 세계지배를 주창하면서 극단적인 인종주의·민족배타주의를 내세웠다. 히틀러는 가장 <우월>한 게르만족이 세계를 지배·통치해야하며 이를 위해 다른 민족·종족을 <구축>·<멸살>시켜야한다고 강변했다. 더해 <반공주의>를 내세우고 히틀러나치독재에 대한 무조건적, 맹목적 순종과 복수주의적영토팽창·대외정복을 획책했다. <나치즘>은 2차세계대전도발의 사상적도구로 쓰였다. 

군국주의의 일반적개념은 국가사회생활의 모든 분야를 군사화·파쇼화하고 나라의 물질·정치적역량을 침략전쟁준비에 복종시키는 제국주의국가들의 반동적정책을 의미한다. 군국주의는 자본주의사회이전에 발생했으나 제국주의단계에 들어와서 제국주의나라들의 일반적경향성으로 나타났다. 특히 국가통치권을 군벌출신의 호전주의자들이 쥔채 침략·전쟁준비를 강화하고 경제의 군사화를 다그치는데서 그특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중 일본군국주의는 자본주의발전자체의 군사봉건적특성때문에 가장 배타적, 침략적, 호전적, 약탈적인것으로 평가된다. 

파시즘의 뿌리는 전제군주제다. 전제정치는 국가의 모든 권력을 개인이 독점하고 제한 없이 행사하며 자기단독의사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는것을 말한다.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민주정치와 대립되는 착취자국가의 정치제도를 특징짓는 말이다. 전제자의 요구가 곧 법적효력을 가지게 되는 전제정치이므로 노예소유제나 봉건제뿐만아니라 파쇼독재까지 모두 전제정치라고 볼수 있다. 한편 군주제는 왕·황제·천황등 군주가 나라의 최고통치자로서 민중에 대한 착취·억압을 실현하는 착취자국가의 한통치형태다. 국가최고권력기관을 선거방법으로 조직하는 국가정치제도인 공화제와 대치된다. 군주제는 노예제·봉건제사회에서의 지배적통치형태인 절대군주제와 군주권한이 헌법에 의해 제한되며 국가의 실제적권력이 국회·내각에 속하는 입헌군주제로 나뉜다. 입헌군주제는 자본주의초기 부르주아세력이 봉건세력을 청산할수 없거나 부르주아세력이 노동자·민중의 사회적진출을 두려워해 봉건세력과 타협한 결과 발생했다. 일본·영국이 대표적이다. 이들나라들은 지금도 대중의 <왕>에 대한 환상을 독점자본가들의 부르주아정치지배를 유지공고화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있다. 군주제는 모두 반동적, 반민중적 통치형태다.

무솔리니는 고대제국주의국가이자 전제국가였던 로마의 <파쇼>개념을 끌어다 쓰고, 히틀러는 1차세계대전패망후 독일전제군주제가 붕괴한뒤 독일혁명세력을 탄압하고 독일민중을 개량화시킨 사민주의권력을 전복하며 나치즘으로 사실상 전제정을 부활시켰다. 일본군국주의의 본질은 <천황>제군국주의다. 이같은 사실들은 파시즘이 전제군주제에 뿌리를 둔 극단적인 반동사상임을 보여준다.

독점자본의 2대통치방식은 사민주의와 파시즘이다. 국내중간층을 개량화시킬 물적토대가 있는 국가들, 가령 미국·영국·프랑스등은 사민주의를, 반대로 물적토대가 부족한 나라들, 가령 1차대전이후 독일·이탈리아·일본등은 파시즘을 통해 민중을 지배·착취했다. 독점자본주의의 국외적표현은 제국주의다. 식민지에서의 파시즘은 국외제국주의가 조종한다. 식민지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제국주의의 주구다. 1960~80년대 칠레·인도네시아·<한국>의 군사파쇼독재가 대표적이다. 한편 2022.2 시작된 3차세계대전에서 제국주의진영은 우크라이나·이스라엘·<한국>의 파쇼세력을 동유럽·서아시아·동아시아전장에서의 전쟁꼭두각시로 조종하고있다.

이탈리아의 <불구의승리>와 파시즘

이탈리아는 1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이지만 전쟁후과가 심각했다. 전체인구중 70만명이 사망했고 100만명이상이 불구가 됐다. 전시경제의 결과 농업국에서 공업·농업국으로 변모했으나 독점자본가들이 중간층을 개량화할수 있을만큼의 물적토대나 필요한 내수시장을 갖추지못한데다 1920 경제공황이 발생했다. 한편 1915.4.26 3국협상과 이탈리아왕국사이에 체결됐던 비밀조약인 런던조약에 따르면 현재 이탈리아북부지역에 위치한 트렌티노·남티롤·트리에스테등7개지역, 몇몇도서를 양도받기로 했으나 1919.9.10 연합국-오스트리아강화조약인 생제르망조약의 결과 이탈리아는 트리에스테·이스트라반도등 4개지역만 할양받았다. 전후 우드로윌슨미대통령도 런던조약이 이탈리아에 보장한 영토의 할양을 반대했다. 윌슨은 <14개조평화원칙>에 <이탈리아국경을재조종하는문제는확실히인정할수있는민족적경계에따라정해져야한다>고 명시하며 갈등지역을 배제했다. 이탈리아내 국수주의자들·<영토수복>주창자들을 중심으로 <불구의승리>가 확산됐고 이는 이탈리아의 극우화를 부추겼다. 

한편 1917 러시아10월혁명과 경제공황의 여파로 이탈리아내에서의 사회계급적모순이 격화됐다. 1919 약1800건, 1920 약2000건의 파업이 발생했고 1919 토리노노동자들은 공장에 소비에트를 건설했으며 공장점거투쟁을 전개했다. 반면 개량화된 사회당·노동운동지도부는 정치투쟁을 제대로 지도하지못했다. 공산주의세력은 1912.1.21 사회당에서 나와 공산당을 창당했다.

1919~22 내각이 5번 교체됐고 정치·경제적혼란이 가중되자 독점자본가·대지주들은 노동자·민중의 혁명적진출을 가로막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쇼독재체제수립에 골몰했다. 무솔리니는 1919.3 밀라노에서 예비역장교·지주·종교단체·우익청년들로 <이탈리아전투자단>을 결성했다. 최저임금제·군수공장폐지·종교단체재산몰수등 기만적구호를 내세워 중간층속에 자기세력을 확대하며 혁명역량을 분열시켰다. 1921.11 <이탈리아전투자단>에서 <국민파시스트당>으로 개칭하고 세력을 확대하면서 <파시스트강령>을 채택했다. 무장한 파쇼행동대<흑셔츠단>은 1920.11 사회당이 장악하고있던 보로냐시정부를 겨냥해 폭동을 일으켰고 공산당·사회당·노동조합·농민조합을 습격·파괴했으며 성원들을 학살했다. 

1922 파쇼대열이 100만명에 달하자 10월 무솔리니는 정권을 파쇼당에 이양할것을 강요하며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협박했다. 1922.10.28 3만파쇼당원들이 <로마진군>을 감행했다. 국왕 비토리오에마누엘레3세는 계엄령에 서명하지않음으로써 <로마진군>을 허용했다. 10.30 무솔리니는 총리가 된뒤 파쇼정책과 파쇼탄압을 심화하며 전쟁으로 나갔다. 1923 선거법개악, 1925 1당독재체제수립후 파업금지령·출판의자유박탈을 담은 법령을 제정, 1926.11 파쇼당외 모든 정당·단체를 금지했으며 <반파쇼분자진압을위한조직>비밀경찰을 창설했다. 국가최고기관으로 <파시즘대평의회>를 조직하고 <국가안전의용군>을 창설했다. 안토니오그람시를 비롯해 공산당·반파쇼단체지도자들을 체포·투옥하는 동시에 <계급협조>를 내세우며 파쇼국가를 <조합국가>로 윤색했다. 

파쇼이탈리아의 대외침략책동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1935.10 선전포고 없이 에티오피아를 침략하며 27만5000명을 대량학살했다. 미국·영국·프랑스제국주의국가는 <불간섭>정책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전략원료·무기를 원조했다. 무솔리니는 1936.5 에티오피아를 강점,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이탈리아령소말리아를 통합해 <이탈리아령동부아프리카>를 조작했다. 1936.10 이탈리아·독일은 <정치적협조>를 위한 협정을 체결하며 <로마·베를린추축>을 형성했다.

2차세계대전의 패망과 독일나치즘

1918.8 1차세계대전후반기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영국·프랑스군대가 <아미앵>작전으로 분쇄했고 9월말 영·프군이 총공격을 개시했으며 다른 전선들에서도 독일등<3국동맹>이 패배했다. 독일내에서는 1918 11월혁명으로 황제 빌헬름2세가 네덜란드로 도주하면서 군주제가 전복됐다. 1919.6.28 베르사유강화조약의 결과 독일은 알사스·로렌지방, 자르탄광지대를 프랑스에, 그외 일부지역을 인접국가들에 빼앗겼고 전승국들이 독일의 모든 식민지를 분할했다. 천문학적인 전쟁배상의무를 지게 됐고 산업은 사실상 붕괴됐다. 1918 공업총생산력은 1913대비 57%로 떨어졌고 알곡생산도 절반으로 줄었다. 군인 200만명이 전사했고 750만명이 부상을 입거나 포로가 되면서 산업인력이 부족했다. 

노동자·민중의 혁명투쟁이 갈수록 거세졌다. 11월혁명결과 여러소비에트가 건설됐다. 초국적자본·제국주의세력이 바이에른군주제를 전복한것은 노동자·민중의 혁명투쟁의 결과이면서도 독일민중을 개량화하기 위한것이기도 했다. 칼리프크네히트·로자룩셈부르크와 같은 혁명세력, 스파르타쿠스단과 같은 혁명조직의 역량이 부족했던탓에 11월혁명의 성과는 사민당(사회민주당)의 기회주의자들이 차지했다. 독일사민당 프리드리히에버트는 반혁명적인 임시정부 <인민정권소비에트>를 조직한뒤 1919.1 노동계급의 시위를 진압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5~11 베를린봉기에 일떠선 노동자·민중을 학살하고 1.15 리프크네히트·룩셈부르크를 살해했다. 이같은 유혈탄압은 5월까지 이어졌다. 

패전국독일은 1차세계대전의 배상금지불을 위해 증세정책을 심화했고 이는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화폐는 휴지조각이 됐고 사회계급적모순은 폭발했다. 대규모노동자파업이 계속됐고 1923.10 작센·튀링겐에서 각각 노동자정부가 조직됐으며 함부르크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위기를 느낀 초국적자본·제국주의세력은 <도스플랜>·<영플랜>으로 배상금을 축소하는 한편, 미국·영국·프랑스의 은행가·금융자본은 독일에 은행을 설치하며 금융자본을 침투시켰다.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중간층을 기반으로 한 사민주의세력은 약화됐고 공산당과 극우당이 부상했다. 

1920.2 뮌헨에서 극우당인 독일노동자당은 나치당(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으로 개칭하고 25개조강령을 발표했다. 강령의 기본내용은 <대독일>창설·식민지획득·국민평등·반공산주의·의회정치개혁등이다. 특히 국가독점자본주의를 강화하고 그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심이 반영됐다. 뮌헨·독일동남부는 나치당의 근거지였다. 이지역에서의 나치지지자는 1921초 30만명에 달했다. 1923.11 아돌프히틀러는 뮌헨폭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925 군사조직 <친위대>를 조직해 백색테러를 감행했다. 1929 세계공황때 히틀러는 <베르사유조약폐기>·<전쟁기간상실한독일영토회복>을 내세워 대중적지지를 얻는 한편, 인종주의·반유대인선전·민주조직과진보활동가테러로 민심을 호도하고 진보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나치당은 1930.9총선에서 107석, 1932.11총선에서 196석을 차지했고 1933.1 히틀러는 총리에 임명됐다. 

나치당은 공산당·진보세력을 제거하며 침략전쟁을 준비했다. 1933 공산당·사회주의정당해산, 노동조합금지와 함께 인프라건설·독일군재무장에 착수했다. 특히 1933.2.27 국회의사당방화사건을 조작하며 공산당지도자 에른스트텔만, 국제공산주의운동지도자 게오르기디미트로프등 1만여명의 공산당원을 체포·투옥·학살했고 3월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6월 사민당활동을 중지했고 7월까지 나치당외 모든 정당·사회단체를 해산했다. 1936 1만6000여공산당원과 1300여사민당원을 체포했고 1937 8000여공산당원과 700여사민당원을 또 체포했다. 1937.1 <독일관리법>을 제정해 나치당과 국가권력기구를 일체화했다. 비밀경찰 게슈타포는 독일인이 거주하는 모든곳을 감시하고 탄압했다. 

파쇼화에 이어 침략전쟁을 위해 민족배타주의·민족우월주의를 선동했고 <유럽재편성안>을 내세워 유럽지배를 계획했다. 1935 베르사유조약을 파기하고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해 유대인탄압을 제도화했다. 1936 영국과 해군협정, 일본과 방공협정을 체결했다. 1938.3 오스트리아, 1939.3 체코를 강점했으며 경제를 전시체제로 개편했다. 파쇼독일은 1939.9.1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세계대전을 시작했다.

일본의 <천황>제군국주의

일본은 근대화이후부터 내내 <천황>제군국주의를 실현하는데 매달렸다. 1868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다이묘(영주)·신흥부르주아세력이 <천황>을 중심으로 반막부(무신체제)세력을 형성해 도쿠가와막부를 꺾고 1869 <천황제절대주의정권> 메이지정부의 전국지배권을 확립했다. 메이지정부는 중앙집권제강화·중앙관제개편·군사관료로내각구성·징병제실시등의 군국주의기초를 마련했다. 메이지유신이 성공하면서 <정한론>이 대두됐다. 제국주의침략정책의 시작점이 되는 <정한론>은 말그대로 <일본의조선정벌>이념이다. 메이지정부는 봉권적특권을 빼앗긴 사무라이(무사)계층의 불만과 민중의 반정부투쟁을 해외침략으로 돌리고 일본자본주의의 시초축적을 조선침략에서 찾으려했다.

<정한론>에 기초해 운요호사건을 일으킨뒤 1876.2.27 강화도조약을 체결해 대조선내정간섭을 감행하면서 식민지약탈무역을 시작했고 1874.5 대만을 침략했으며 1879 류큐(오키나와)를 병합했다. 내부적으로 1893.10 참모본부를 전시체제로 개편확장했다. 청일전쟁직전 육군은 24만명에 달했다. 이를 바탕으로 1894.7 청일전쟁을 전개했다. 1894.11 중국 여순에서 일본군은 중국인6만명을 무참히 학살했다. 청은 패배했고 1895.4.17 시모노세키강화조약을 체결했다. 

1904.2.10 러일전쟁은 두나라모두에 막대한 인적·물적피해를 입히며 1905.9.5 포츠머스조약으로 종전됐다. 미국은 일본과 서로의 식민지를 인정하는 1905.7 가쓰라·태프트밀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조선과 1904 2.23·8.22 <한일의정서>·<한일협정서>를 체결, 1905.11.9 이토히로부미의 조선<특사>방문후 11.17 불법적으로 을사조약을 조작, 통감정치를 강행했다. 1907.7.24 정미7조약을 날조, 1910.8.22 한일병합조약을 강압적, 불법적으로 체결해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1차세계대전기간 일본내에서는 초보적인 민주주의와 생존권이 유린된것에 분노한 일본민중의 반정부·반자본주의투쟁이 거세게 전개됐다. 러시아10월혁명의 영향으로 1922.7 일본공산당이 창당됐다. 일본민중의 혁명적진출이 본격화됐고 1920~21 경제공황이 심화됐다. 일본제국주의세력은 정치·경제적위기를 군국주의강화를 통해 탈출하려했다.

1923.9 간토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민중을 기만하고 항일투쟁을 탄압하기 위해 재일조선인2만3000여명을 대량학살했다. 치안유지법을 조선에도 적용하면서 1930 3만8793명을, 1938 16만5300명을 검거투옥했다. 한편 군국주의조직 정우회의 총재이자 군벌 다나카기이치를 총리로 하는 새내각을 수립했다. <다나카상주문>은 조선을 시작으로 만주·몽골·중국을 강점하겠다는 목표와 그방도가 적시된, <대동아공영권>이 나오기전까지의 일제침략세력의 기본국책이었다. 

1929 세계공황으로 1930~32 실업자·이농민수가 300만명에 달했고 계급모순이 격화됐다. 일군국주의세력은 만주식민지화를 위해 1931.5 만보산사건등을 조작했고 1931.9.18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일전쟁을 개시했다. 1933~35 중국화북지방을 침략했다. 1936.5 화북지방2개성, 북경·천진2개시를 포함한 지역을 <특수구역>으로 만들어 지배했다. 1937 7월 노구교사건을 일으켰고 12월 난징에서 30만중국민중을 무참히 학살했다.

한편 1935 런던해군군축회의에서 탈퇴하면서 미국·영국제국주의에 맞선 해군력강화의지를 드러냈고 독일·이탈리아와 <추축국>을 형성했다. 1차고노에내각은 내부적으로는 1938 3월 <국가총동원법>을 선포, 11월 <동아신질서>성명을 발표했고 2차고노에내각은 1940.7 <황도의대정신에근거해우선일본·만주·중국을하나로하는대동아공영권확립을도모>하는것을 당면외교방침으로 제시했다. <대동아공영권>창설은 중핵권지대형성·소공영권창설단계·대공영권창설3단계를 거쳐 아시아태평양지역을 포괄하는 <대동아공영권>을 20년안에 건설하겠다는 제국주의야욕을 담고있다. 한편 같은 시기 모든 정당·사회단체를 해산했고 1941.10 군인신분으로 총리대신을 맡은 도조파쇼내각이 출범했다. 

2차세계대전과 반파쇼세력의 승리

1939.9.1 독일의 폴란드공격으로 2차세계대전이 시작됐다. 나치독일은 폴란드를 함락한뒤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덴마크·노르웨이·벨기에·룩셈부르크·네덜란드를 침략·점령했고 파쇼이탈리아와 협공해 프랑스를 정벌했다.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영토침략에 주력했다. 일본은 1940.9 인도차이나를 침공·점령했다. 1940.9.27 독·이·일은 3국동맹을 체결해 각각 <유럽신질서>·<대동아공영권>을 망상했다. 1941 독일은 유고슬라비아·그리스를 점령, 일본은 진주만을 습격했으며 동남아시아를 장악했다. 1941.6 독일은 소련을 기습공격하면서 소독불가침조약을 파탄냈다. 파쇼군대는 여러방면으로 소련을 침공했으나 1941.9 시작된 모스크바공방전이 시작됐고 1941.11말 독일이 소련유럽지역대부분을 점령하자 소련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2000개이상의 파르티잔부대가 조직돼 맹렬하게 싸웠다. 1941.12 모스크바공방전에서 소련이 승리했고 소련군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1942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소련군은 반격을 준비하며 11월말 33만명이상의 적부대를 포위, 섬멸작전으로 대승을 거뒀다. 스탈린그라드전투승리로 파쇼국가들의 소련침략계획은 분쇄됐다. 1943 쿠르스크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하면서 독일은 전략적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소련은 파죽지세로 반격하며 주변을 해방하기 시작했다. 1941.12 일본의 진주만습격을 계기로 이듬해 1.1 소련·미국·영국등26개국은 파시스트블록을 분쇄하기 위해 군사·경제자원을 동원한다는 내용의 선언을 체결했다. 반파쇼연합이 이념과 제도를 초월해 광범위하게 형성되는 흐름에 맞춰 1943.5 과감하게 코민테른을 해산했다. 

1937.7.7 노구교사건이후 반년동안 중국의 거의 모든 화북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은 1938까지 화동·화중·화남일부지역까지 점령했다. 장개석·국민당군대의 패배로 중영토대부분이 피점령지로 전락했다. 1938말 전선확대로 일본군후방이 약화되자 중공산당은 항일유격전쟁으로 계속 위협했고 1940.7 항전3주년을 기해 중공산당군대는 4만에서 50여만으로, 민병은 200만으로 증가했다. 1941.12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동시에 화북지구 치안강화운동을 추진하면서 식민통치를 강화했는데, 특히 모조리불지르고·죽이고·빼앗는다는 내용의 <3광정책>을 실시했다. 1941~42 일본군은 화북해방구소탕을 위해 1000명이상의 병력을 17차례나 동원하는등, 중공산당파괴와 민중학살에 열을 올렸으나 1943 2차세계대전이 반파쇼인민전선에 유리하게 변화하면서 중공산당과 혁명역량도 점차 강화됐다. 

1940.8.10 조선인민혁명군군정간부회의가 소할바령에서 진행됐다. 회의에서는 대부대작전에서 소부대작전으로 이행을 결정했다. 이는 우선 인민혁명군의 역량을 보존·축적하고 혁명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 소련이 독일·일본의 협공위험에서 벗어나 아시아에서의 정세완화정책을 실시하고 소련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국제주의적요구가 반영됐다. 1942.7 조선인민혁명군과 소련·중공산당은 국제연합군을 편성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자체역량을 강화하면서 국제반제역량과의 공동투쟁을 통해 일제를 타도하고 2차세계대전의 승리에 기여했다.  

2차세계대전에서 파쇼세력은 패배하고 반파쇼세력은 승리했다. 1943.7 무솔리니는 폐위·체포됐고 이탈리아는 9.8 연합군에게 항복했으며 1945.4.27 도망가던 무솔리니는 파르티잔에게 체포돼 다음날 총살됐고 4.29 시신은 과거 파쇼당에 의해 15명의 반파쇼운동가가 처형된곳인 밀라노 피아자로레토에 매달렸다. 1949.5.8 독일은 무조건항복을 했고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45.8.6·9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일제가 이미 패망하고있던 상황에서 전후 동북아패권장악을 의도로 제국주의미국이 원폭을 투하한것이다. 1945.8.9 조선인민혁명군이 조국해방최후공격작전명령을 내렸다. 1주일이 채 안된 8.15 일제는 무조건항복을 했다. 

칠레 피노체트군사파쇼권력

1973.9.11 아우구스토피노체트가 친미군사쿠데타로 민중정권인 아옌데정권을 전복했다. 1962~70 미CIA(중앙정보국)는 살바도르아옌데의 당선을 막기 위해 1100만달러를, 1970~73 칠레경제를 위협하는데 800만달러를 투입하는식으로 민중정권을 위협했고 1973 통상적군사원조를 2배 늘리며 군부를 장악했다. 미국의 배후조종하에 피노체트는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때 영국은 칠레대통령궁에 폭탄을 투하하는데 사용된 호커헌터전투기를 제공했고, 피노체트군부세력은 아옌데를 총살했다. 쿠데타성공이후 피노체트는 칠레사회의 <재건>을 내세우며 4인의 군사평의회를 통해 모든정당해산·시민권억압·의회해산·노조활동금지·파업과단체교섭금지·경제개혁무효화를 실시했다. 군사평의회는 수천명의 민중들을 투옥·고문·학살했다. 수천명이상이 대통령궁 지하방들에서 고문을 당했다. 수백명의 민중들은 산티아고의 축구경기장에 끌려가 고문당하거나 총살당했다. 그중 유명민중가수 빅토르하라는 손·손목이 부러진채 등뒤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학살을 지휘했던 전직나치 발터라우프대령이 칠레비밀경찰조직 DINA(국가정보원)를 지휘했다. DINA는 해외에서도 암살임무를 수행했다. 군사평의회는 6개이상의 강제수용소를 만들었고 칠레국민100명중 1명은 1번이상 체포됐다.

피노체트는 반아옌데전선에 있던 상류층·중간계층여성들을 결집해 <전통적가족의가치>·<자기희생과조국에대한충성>을 내세운 <여성의힘>을 조작했고 부인 루시아이리아르트를 중심으로 1만개가 넘는 그룹들을 만들면서 기만정책을 실시했다. 실제로는 <가족>자체가 정치테러의 첫번째희생자였고, 노동계급의 여성은 철저히 소외됐다. 

경제적으로는 미시카고대학 밀턴프리드먼교수밑에서 공부한 신자유주의자들이 중심이 돼 공공지출대폭삭감·공기업사영화·화폐가치하락·수입관세대폭축소등의 미국입맛에 맞는 시장경제정책들을 시행했다. 그결과 1975 GDP는 16.6% 감소했고 1970대비 1975 임금은 47.9% 감소했다. 실업률은 20%에 달했다. 수출중심, 대규모투기열풍에 의존한 경제회복이 1977~80 이어졌고 대규모 유입된 자본들은 생산분야가 아닌 칠레은행·거대재벌을 통해 부동산투기·국영기업사영화에 투입됐다. 1981 거품이 꺼지면서 파산사태가 줄줄이 일어났고 생산이 급격히 감소되면서 1982~86 실업률은 30%를 넘어섰고 실질임금은 20%까지 감소했다. 1991 1인당외채비율은 세계최고수준에 이르렀다.

반파쇼투쟁조직으로 가톨릭교회의 <연대교구>가 있었다. 이들은 사람들을 숨겨주고 저항운동비밀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반파쇼의 내용을 담은 <아르피예라스>민속예술을 창조했다. 특히 <아르피예라스>활동가들의 투쟁형태는 단식투쟁이나 주요기관에 자신들의 몸을 묶는 반파쇼투쟁인 <엔카데나미엔토>(사슬묶기)투쟁으로 발전했다.

1978.3.8 세계여성의날에 기해 여성노조활동가그룹<여성위원회>는 피노체트에 저항한 최초의 공개시위를 조직하면서 반파쇼·반봉건투쟁을 실시했다. 1980년대들어 광범위한 피노체트퇴진투쟁이 전개됐다. 칠레정부는 1980 신헌법으로 장기집권의 기반을 마련했고 민주화운동을 극악무도하게 탄압하면서 수백명을 학살했지만 민중의 반정부투쟁은 갈수록 거세졌다. 1988.10 국민투표결과 칠레민중들의 54.6%가 피노체트정권연장에 반대하며 43% 찬성표를 훨씬 능가했으나 피노체트는 1980 제정된 헌법에 근거해 후임대통령이 결정될때까지 1년을 연장해 집권했고 이후 종신상원의원이 됐다. 1981 야당이 승리했으나 야당지도층은 1980헌법을 받아들이는것으로 피노체트와 거래했다. 이는 중요한 사회·정치적변화에 대한 피노체트의 <거부권>을 인정하고 피노체트집권기의 경제모델을 유지하는것이었으며 파쇼탄압에 종사한 군관련자들에 대한 면책권을 연장하는것이었다.

1990초 군기지주변의 비밀묘지들과 살해되기전 고문흔적을 가진 희생자들의 주검들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1991 <진실과화해위원회>가 피노체트파쇼독재하에서의 끔찍한 인권침해사례들을 문서로 정리했다. 보고서는 2279건에 달하는 사망·실종사건과 군·법원의 책임을 지적하고있다. 피노체트통치기간동안 공식적으로는 4000명이 살해됐다지만, 실종된 이들까지 합치면 3~4만명이 학살된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 공동주의자·사회주의자·노동자였다. 

칠레민중은 1993.12 집권중도좌파연합 에두아르도프레이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이후 칠레공산당이 이끄는 교원노조를 비롯한 여러세력들의 파업·투쟁·연대를 거세게 일으키면서 반파쇼·반제·반신자유주의를 위한 투쟁·항쟁을 완강하게 이어갔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군사파쇼권력

1965.9.30 인도네시아 수하르토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며 수카르노민중정권을 전복했다. 수하르토군사쿠데타는 미국의 배후조종에 의해 감행됐다. 드와이트아이젠하워미대통령은 1957.9.25 미CIA에 수카르노정부를 전복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CIA는 쿠데타를 계획하면서 필리핀에 작전기지를 세웠다. 수마트라섬과 술라웨시섬에 있는 인도네시아군부를 포섭하고 미국방부와 협력해 이두지역의 반군에 지원한 무기를 준비했으며 반수카르노라디오방송국을 통해 반군에 자금을 투입했다. 1958 반군의 친미군사쿠데타가 실패했음에도 미CIA는 공작을 계속 심화했다.

1965.9.30~10.1 사회주의계열의 젊은 영관급장교들이 친미육군장성들을 공격해 6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10.1 07시10분 대통령경호처 운뚱빈샴수리중령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미CIA에매수돼수카르노정권을전복시키려고음모하고있는매국적장성군벌집단을좌절시키기위해혁명을일으켰다>고 발표했다. 군수뇌부장성들이 살해당하는동안 가장 강력한 군지휘관중 1명인 수하르토는 어떠한 위해를 입지않았고 오히려 사전에 이사건을 알고있었다. <9.30거사>에 대한 <역쿠데타설>이 나오는 이유다.

<9.30거사>는 공산당에 의해 조직적으로 일어난것이 아니었음에도 서방언론은 <공산당쿠데타>라고 음해모략했다. 수하르토는 미국의 배후조종하에 인도네시아의 전군부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우익군벌세력을 총동원했으며 반정부군중시위를 조작했다. 한편 수카르노가 피신한 자카르타소재 대통령별장에 수하르토수하들이 찾아와 <수뻐르스마르> 즉, <국가권력이양서>를 받아냈다. 주내용은 치안유지를 위해 수하르토에게 대통령이 모든 권한을 부여한다는것이었다. 이문서를 바탕으로 수하르토세력은 친미군사쿠데타를 <정당화>했다. 일각에서는 이문서가 거짓이라고 주장하고있다. 

수하르토는 <수뻐르스마르>를 근거로 공산당을 해산했고 국회·정부·군에서 수카르노세력을 몰아냈으며 수하르토지지자들로 이뤄진 새내각을 구성하면서 공산당세력·진보세력들을 대대적으로 살육하는 광범위한 숙청작업을 감행했다. 수하르토는 대학살을 총지휘했지만, 배후조종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국가들이었다. 미국·영국·호주의 대사관들은 수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인도네시아내부 진보진영의 동태를 파악하고 수하르토계엄사령부가 분쇄작전을 빠르게 전개할수 있게 긴밀히 연락·지원했다.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등의 주변국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는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이3국은 <인도네시아사건>을 통해 공산당의 뿌리를 완전히 소탕할수 있게, 무자비한 작전이 수행되도록 수하르토를 설득하고 압박했다. 학살이 시작된뒤 3국대사관들은 성공적<멸공>작전으로 수백·수천의 공산당원이 살해됐다고 본국정부에 중간보고를 했다. 그내용중 일부는 <1965.12.23중간보고:공산당원1500명집단살해성공>·<또다른지역보고:1000-2000사살>·<서독대사관보고:7만명사망설이있다.현재까지종합된수는적어도15만이상이살해됐다.>등이다. 수하르토는 1965~66 대량학살사건에 관여하며 <공>을 세운 외교관대다수를 상급외교관으로 진급시켰다. 

1990.8 미언론 뉴욕타임스의 한기자가 대학살당시 인도네시아대사관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외교관을 만나 대담을 했는데, 50만~100만의 공산주의자들이 살해를 당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직답을 피하면서도 <우리미국대사관은인도네시아에공산주의자5000명이있으며그들의명단을확보하고있었다.우리는그5000명의명단을인도네시아계엄령군부에게넘겨줬다.>고 답변했다. 

대학살을 완료한뒤 수하르토는 국회에서 맑스레닌주의금지·<수뻐르스마르>인준·수카르노종신대통령지위박탈등을 포함한 24개안건을 처리했다. 말레이시아와 대결정책을 끝내고 1965 탈퇴한 유엔에 복귀하면서 수카르노의 반미자주정책을 뒤엎었다. 1967.1 수카르노탄핵안건이 상정됐고 1967.2.22 수카르노는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3.12 수카르노는 모든 권력이 박탈된채 연금됐다. 1968.3 수하르토는 5년임기의 정식대통령으로 지명됐다. 수하르토는 1978 대통령연임제한을 철폐하면서 파쇼적종신집권을 본격화했다. 

대학살의 대가로 미국은 수하르토에 <반공주의정권>의 필요한 모든 자원을 제공했다. 군사고문·군인훈련·각종무기·침략자산등이 군부의 수중으로 몇십년간 들어갔다. 대신 32년간의 수하르토군사파쇼독재에 의해 인도네시아내에는 서방제국주의의 자본이 활개를 쳤다.

1998까지 파푸아·아체·동티모르등 여러지방섬에서 군부에 의해 수백만명이 학살당하는 와중에도 완강하고 격렬하게 반정부투쟁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반수하르토민심은 갈수록 격화됐다. 미국은 수하르토를 통해 32년간 인도네시아를 동남아시아의 반공보루로 이용했지만 수하르토의 파쇼독재·부정부패·살인폭정으로 인해 민중의 반파쇼·반미의식이 고양되고있었다. 클린턴미행정부는 매들린올브라이트국무장관을 통해 수하르토의 전격사임을 압박했다. 미CIA는 수하르토의 자진사퇴를 공작했고 1998.5.20 올브라이트는 미해안경비대사관학교 졸업식연설에서 수하르토는 즉각 사임해야한다고 발언했다. 수하르토는 다음날인 5.21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한다.

미제국주의에 의해 이식된 파시즘

미국은 1961.5.16 박정희군사쿠데타와 1979.12.12·1980.5.17 전두환군사쿠데타를 배후조종하면서 <한국>에 친미군사파시즘을 이식했다. 1960.4.21 앨런덜레스미CIA국장에게 보고된 비망록에는 <우리결론은이승만을권력에서제거해야한다는것>·<우리는거의확실히한국군의협력을구해야할것이다.정치적재건은기존야당구성원에의해달성될수없을것>·<한국의군고위지휘관들은우리쪽군사·정치대표자들과밀접한연계를가져왔고,대체로유능하고고도로동기가충만해있는집단>이라고 정리됐다. 박정희는 1960.2부터 쿠데타를 준비했고 4.19항쟁이후 수차례 쿠데타를 기도했다. 미CIA는 1961.4 2개의 쿠데타음모를 파악하고있었는데 하나는 박정희, 다른 하나는 이범석·민족청년단이 주도하고있었다. 덜레스는 <내가재임중CIA해외활동에서가장성공한것은이혁명(5.16쿠데타)>이라고 언급하며 미정부가 5.16쿠데타를 배후조종한 사실을 드러냈다.

1979.12.12 전두환<신군부>쿠데타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박정희총살관련 의혹조사를 이유로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의 연행을 재가하라고 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을 압박했다. 최규하가 노재현국방장관의 의견을 들어보고 승인하겠다고 답했다. 미CIA<한국>지부장 로버트브루스터는 피신한 노재현의 행방을 전두환에게 알려주며 전두환<신군부>를 밀어줬다. 주<한>미군사령관 존위컴은 1·5공수와 9사단등의 부대이동을 승인하며 전두환을 비호·지지했다. 1980.5.18 광주민중항쟁때도 미국은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가면서 <최소한의무력으로광주질서회복>을 결정했고 5.25 미7함대항공모함 코럴시호의 부산입항과 관련해 2일전 워싱턴포스트는 <<한국>사태를이용한북괴의도발가능성에대비한예비조치>라고 보도했다. 1980.8.27 위컴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피살이후가장성공한미국의한국정책중하나는전두환정권의수립이다.우리의노력은결코헛되지않았고그보람도크다.>라고 언급했다. 

박정희·전두환은 집권과 동시에 이른바<간첩단사건>을 조작하고 진보·민주세력을 폭행·고문·학살하며 파쇼적으로 탄압했다. 박정희는 쿠데타성공직후 민족일보를 탄압, 조용수사장을 교수형에 처했다. 1964.8 <한>일회담반대시위를 무마하기 위해 1차인민혁명당사건을, 1974.4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배후로 2차인혁당사건(인혁당재건위원회사건)을 조작했다. 1차인혁당사건에 구속기소된 도예종등 26명피고인대부분은 중앙정보부에서 발가벗긴채 물고문·전기고문을 당했다고 1964.9.12 한국인권옹호협회장 박한상의원이 폭로했다. 2차인혁당사건이 있기전 박정희는 1969 <3선개헌안>날치기통과, 1971 3번째연임시작, 1972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제정을 했고 이에 민주화운동세력은 <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등으로 유신체제에 저항했다. 1974.4.3 대통령긴급조치4호<이조치를위반한자는법관의영장없이체포,구속,압수,수색하여비상군법회의에서심판,처단한다>고 규정했고 4.25 2차인혁당사건을 조작했다. 1974.7 서도원·도예종·송상진·우홍선·하재완·이수병·김용원·여정남등8인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렸고 1975.4.8 대법확정된 다음날인 4.9 형집행했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암흑의날>로 선포했다. 

1980 전두환군사파쇼권력출범직후 <국가보안법>을 적용한 공안사건들이 연달아 조작됐다. 대표적으로 1980.12 무림사건, 1981 학림사건·아람회사건·부림사건, 1982 횃불회사건·오송회사건등이 있다. 이사건들은 서울·대전·충남·부산·광주·전남·전북등, 전국에서 진보·민주세력을 압살하기 위한 용공조작사건이었다. 사건조작과정에서 가혹한 고문과 불법수사가 잇달았다. 일례로 무림사건은 12.12쿠데타 1년에 기해 일어난 학내시위에서 유인물<반파쇼학우투쟁선언>이 뿌려지자 당국은 시위주동자에 대한 야수적고문과 대대적조사를 실시했고 이내 서울대학생운동전체조직사건으로 전변시켰다. 250명이 연행돼 80여명이 강제징집됐고 9명이 구속된, 전두환군사파쇼권력이 조작한 대규모공안사건이었다.

항쟁과 계엄, 파시스트의 최후

박정희·전두환은 권력탈취·정권연장의 도구로 계엄을 발동했다. 박정희는 1960.5 군사쿠데타, 1964.6.3 <한>일협정반대투쟁, 1972.10.17 <10월유신>, 1979 10월항쟁에 기해 계엄령을 선포했고 10월항쟁때는 위수령도 선포했다. 1979.10.26 박정희가 죽자 10.27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계엄정국하에 전두환은 1979.12.12 1차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했고, 1980.5.17 2차군사쿠데타와 함께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계엄을 확대했다. 이에 저항해 광주민중들은 5.18 항쟁에 궐기했다.

박정희·전두환군사파쇼권력은 미국에 버림받으면서 비참하게 종결됐다. CIA<한>지부장출신 도널드그레그는 1976 텍사스주립대의 강연에서 <박정희가바라는대로추가6년의임기를더할경우그는아마도살아서임기를마치지못할것>·<CIA는박정희에게쿠데타시도에관한정보를제공하고있으나앞으로도계속그렇게할것인지는불분명하다>라고 말하며 박정희의 최후를 예고했다. 미대통령 지미카터의 대선캠프에 참가했던 리처드홀브록은 뉴욕타임스기고문을 통해 <박정희제거>의견을 냈고 이후 동아시아태평양차관보로 임명됐으며 박정희암살과 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체제에 간섭했다. 미국은 전두환을 차기 파쇼독재자로 내정한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여러차례 접촉했다. 김재규는 박정희암살전 육군본부벙커에서 각료들에게 <내뒤에는미국이있다>고 언급했고 암살후 심문중에 <전임미대사가자신에게박대통령이<너무오랫동안집권>했다고말했다>라고 진술했다. 10.26사태당시 공개된것만 미CIA요원250여명이 <한국>에 있었다. 웬트워스공대 인문사회학부교수 조지카치아피카스는 박정희암살에 대한 CIA정보공개를 촉구하면서 미CIA가 1950~60년대 여러국가의 정치수반들을 암살·제거한것과 박정희암살의 <패턴>이 일치하다고 분석했다. 

1980년대 전두환파쇼권력에 대한 전민중적저항은 갈수록 거세지고있었는데 1987.4.13 <호헌조치>는 민심폭발의 기폭제가 됐다. 진보·민주세력은 반파쇼항쟁을 주도했고, 민심은 전두환타도를 촉구했다. 전두환은 민중항쟁을 가로막기 위해 민정당대표 노태우를 통해 6.29선언을 발표했다. 6.29선언은 5년단임직선제개헌을 골자로 했다. 1987.7.2 동아일보는 <몇몇한국인은지난주한국을방문했던개스턴시거미국무성동아시아태평양담당차관보가메시지를가져왔다고확신하고있다>고 보도했다. 시거는 6.29선언발표직전 방<한>해 <1987에대선이있을것>이라고 말했다. 이때는 개헌도 시작되지않은 시점이었다. 미국의 일부인사들은 6.29선언을 미국이 주도한 사실을 대놓고 선전했다. 친미군사파쇼권력의 배후조종자 미국은 민중의 항쟁·투쟁이 반파쇼항쟁에서 반미항쟁으로 전화발전하기전에 파쇼권력자들을 제거하면서 <한국>의 식민지상태를 계속 유지하고있다. 

전쟁꼭두각시, 우크라이나신나치세력

우크라이나파시즘은 반데라리즘이다. 반데라를 중심으로 한 OUN(우크라이나국수주의자단)은 1940년대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침략·학살을 저질렀다. 1941.6.30 <우크라이나민족혁명>을 선포하며 나치치하에 부역한 소속조직원을 중심으로 UPA(우크라이나봉기군)를 조직했고 이를 바탕으로 1943~44 보윈지역에서 폴란드인대학살을 벌였다. OUN을 핵심으로 한 우크라이나인들로 구성된 나이팅게일대대·롤랑드대대는 나치독일의 소련침공당시 독일군의 일원으로서 <바르바로사>작전을 수행했다. 

2차세계대전종전후 미국은 우크라이나파시스트들을 구제해 반소침략정책에 이용했다. OUN은 뉘른베르크전범재판에서 제외됐고 1949 <베를린위기>때 미국편에서 대소련스파이로 준동했다. 미국은 <마샬계획>의 자금중 10%를 비밀첩보활동자금으로 사용했는데 그중 일부는 OUN이 창설한 무장테러단체<나이팅게일>에 투입됐다. UPA방첩부대지휘관 미콜라레베드는 미군방첩대의 도움을 받아 1947 뮌헨으로 피신, 1949.6 미국에 들어갔고 1957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전범자이자 파시스트인 레베드를 미법무부가 추방하려고 하자 당시미CIA요원이자 후에 CIA국장이 되는 덜레스가 <CIA에서엄청난가치가있는인물>·<핵심적인작전>을 돕고있다고 말했다. 레베드는 죽을때까지 반소련선전에 몰두했다.

미국·서방제국주의에 의해 비호·육성된 반데라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신나치세력으로서 2004 <오렌지혁명>과 2014 <유로마이단>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탈취했다. 2010.1 빅토르유셴코는 반데라에게 <영웅>직위를 수여했고 미국은 천문학적인액수를 우크라이나신나치세력에게 투입하면서 <색깔혁명>·쿠데타를 배후조종했다. 2014.2 키예프도심에서 내전을 방불케하는 충돌이 발생했고, 이후 국회대통령탄핵의결에서 탄핵이 국회의원450명중 328명찬성으로 최소인원 338명찬성을 넘지못해 부결됐음에도 빅토르야누코비치대통령은 불법적으로 대통령직에서 쫓겨났다. 한편 주우크라이나미대사관은 국가부패방지청·국가반부패국·반부패특별검찰청·반부패고등법원을 직접통제하면서 <꼭두각시체제의식민지>로 우크라이나를 전락시켰다. 우크라이나신나치세력은 우크라이나에서의 러시아어사용을 금지하고 러시아계주민들을 위협하면서 파쇼책동을 심화했다. 2014.5 오데사에서의 반<마이단>평화시위를 악랄하게 탄압하고 민중들이 피신한 노조건물을 불태우면서 116명을 학살했다. 2014~22 돈바스침략으로 공개된것만 1만4000명, 현지증언에 따르면 5만명이상의 돈바스민중들이 대량학살됐고 학교·공원·놀이터등 민간공공시설들이 폭격을 당했다. 미국·서방은 2014부터 우크라이나정부에 수십억달러규모의 무기·장비를 공급하고 <전문가>훈련비용을 투입하면서 돈바스전쟁을 우크라이나전으로 전변시키는데 집중했다. 

2022.1.1 젤렌스키는 <돈바스지역전쟁종식목표>를 말했는데, 언론은 서방과의 <협력>을 통해 돈바스지역을 장악하고있는 <친러시아>군대를 진압하고 이지역을 <수복>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보도했다. 2022.2.24 러시아는 나토동진금지·주민보호와 함께 신나치청산을 목표로 <특수군사>작전을 실시했다.

젤렌스키는 2024.5 대통령임기가 끝났음에도 계엄령하에서 대통령직을 유지하고있다. 2022 전쟁시작과 동시에 계엄령과 총동원령을 발동해 계속 연장하고있고, 계엄령하에서 대선·총선은 금지됐다. 러시아와의 단독종전협상에 나선 도널드트럼프미대통령은 2025.2 우크라이나가 전쟁으로 처참하게 파괴됐다, <우크라이나에서는선거가치뤄지지않았고,사실상계엄령이선포된상태>·<우크라이나지도자는지지율이4%에불과하다>며 젤렌스키의 퇴진을 압박했다.

대량학살기계, 이스라엘시오니스트

1948.5.14 팔레스타인인의 땅위에 이스라엘이 수립됐다. 이스라엘은 시오니즘을 국시로 내세웠다. 발굴작업들을 통해 거짓으로 판명된 히브리성경을 팔레스타인점령의 역사적정통성으로 삼았고 기독교의 성부·성자·성령에 성서·민족·땅을 대응해 <3위1체론>을 국가이념으로 내세웠다. 1947봄 시오니즘공세로 팔레스타인인의 <나크바(이산)>가 정점에 달해 1947~48봄 <나크바>1단계에서 30만명, 2단계에서 40만명이 추방됐다. 이스라엘은 <신>에게 선택받은 <유대인국가>라고 자부하면서 주변국들을 침략하며 영토확장을 하고 팔레스타인인·아랍민중을 학살하고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통해 서아시아패권을 장악했다. 1951 이스라엘일간지 하레츠는 <이스라엘은경비견이돼야한다>·<아랍국가가미국·영국의희망을분명히거스른다면이스라엘은그런아랍국가에대한공세정책을도맡게될것>·<이스라엘을이용해그런국가들을혼내줄수있을것>이라며 미제국주의의 <개>를 자처했다. 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이스라엘은 유프라테스강과 나일강사이의 모든땅을 차지하기 위한 <대이스라엘>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침략을 내내 감행했고, 민중을 학살·이산했다. 

1987 인티파다의 성과를 딛고 1987.10 하마스가 공식창립됐고 2007.6 가자지구에서 독점적권력을 확보했다. 한편 2006이후 크게 4차례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루면서 17년동안 가자지구에서는 5000여명이 학살되고 1만5000명이 부상당했다. 

2022.12 베냐민네타냐후는 극단주의자들과 결탁해 재집권에 성공하며 이스라엘최장기총리에 등극했다. 유엔에 따르면 2024초부터 9월까지 이스라엘군대·정착민에 의해 학살된 팔레스타인인숫자가 227명이고 그중 189명이 서안지구에서 살해됐다. 1월부터 군사작전이 계속 있었고, 여름부터는 무력대치수준이 더 심각해졌으며 7.3 이스라엘병력1000여명은 20년만에 최대규모의 작전을 개시하며 팔레스타인인90여명을 학살했다. 또 2023.1 이스라엘국가안보장관 벤그비르가 이슬람성지 성전산에 난입했고 4월 유월절을 앞두고 성전산 알아크사사원내부에서 이스라엘경찰과 무슬림간 유혈충돌이 발생하면서 알아크사사원파괴공작이 심화됐다.

내부적으로는 사법개악등 파쇼정책을 심화했다. 네타냐후는 <알아크사홍수>작전이 있기전까지 파쇼부패로 실각위기에 놓여있었다. 2019.11 이스라엘검찰은 1000·2000·4000사건으로 알려진 3건에 대해 뇌물수수·사기·배임혐의로 네타냐후를 공식기소했다. 네타냐후는 2023초 대법원이 입법부·행정부에 반하는 판결을 내리는 권한을 제한, 대법의 이스라엘기본법에 대한 합법성검토권한을 박탈하는 내용의 파쇼적사법개악을 추진했고 이에 맞서 이스라엘민중들은 대규모반정부시위를 계속 전개했다. 2024.1 이스라엘대법원은 <법안이분명개인적이유로만들어졌다>며 <사법개혁>반대판결을 내렸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전을 시작으로 서안지구·레바논을 침략·학살하고 예멘·이란을 폭격했다. 2024.12.8 미국·튀르키예침략세력들과 협력해 시리아정권을 전복한뒤 골란고원의 가장 높은 헤르몬산의 시리아군기지를 점령했다.

2025.1.9 가자보건부는 팔레스타인전기간 4만6006명이 숨지고 10만9378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다. 의학저널 랜싯의 논문에 따르면 2023.10~2024.6 9개월간 사망자수를 추산한 결과 공식집계보다 41%나 많은 6만4260명으로 나왔다. 한편 2025.1.16 하마스·이스라엘휴전합의에 대해 이란최고지도자 알리하메네이는 <팔레스타인에는승리고이스라엘에는패배>·<가자지구주민들의인내와팔레스타인의확고한저항이시오니스트정권을후퇴하게했다>고 평가했다.

내란에서 내전으로

윤석열의 12.3비상계엄의 본질은 친미친위쿠데타다. 윤석열은 2024.8.30 극우파쇼당을 제외한 가장 오른쪽의 민주당측·문재인가족과 가장 왼쪽의 민중민주당을 동시에 압수수색하면서 파쇼광풍을 본격화하고 비상계엄의 신호탄을 올렸다. 하반기내내 반윤석열정당·시민사회단체·반일단체·대학생조직·언론매체의 대표·구성원에 대한 압수수색·공안탄압과 반윤석열집회에 대한 폭력진압을 심화했다. 동시에 2024.9 김용현이 국방장관이 된뒤 계엄준비를 더욱 본격화하고 10~11월 무인기평양공격·중화기사격·천무동해상발사·백령도드론작전·K9자주포서해상발사등, <대북국지전>을 도발하면서 <전시계엄>을 획책했으나 조선의 <전략적인내>로 분쇄됐다. 12.3 비상계엄선포후 <대남자작극>을 통해 <선계엄·후전시>상황을 조작하려고했으나 <한국>민중의 12월항쟁으로 무산됐다. 2024.12.31~2025.1.15 윤석열내란·반란세력은 경호처를 동원한 유혈충돌·발포를 시도했으나 경호처의 동요로 실패했다. <1.19서울서부지법폭동>을 시작으로 충돌·폭동·발포·계엄의 사태를 조장하고있다. <1.19폭동>은 윤석열·국민의힘·극우유튜브·극우언론등이 계획적, 조직적으로 준비해 터트린 사건이다. 충돌·폭동은 발생했고 이후 헌법재판소의 판결불복을 예고하면서 다음폭동을 획책하고있다. 극우커뮤니티에 헌법재판소의 도면도·주변현황과 함께 무법천지·아비규환을 담은 영화<더퍼지>포스터가 게재됐다. 극우반동<스피커> 전한길은 <헌재를휩쓸것>발언에 이어 <시간이흐를수록탄핵심판이기각될확률이더높아지고있는만큼조기대선은윤석열을암살하는방법말고는없다>는 끔찍한 망언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게재했다. 

한편 최근 드러난 70쪽짜리 <노상원수첩>은 윤석열내란·반란무리들이 사상최악의 파쇼집단이자 학살무리라는것을 보여준다. <노상원수첩>에는 정당·노조·언론계·종교계·체육계·방송계·시민사회단체등에서 1차로 1만명이상의 인원을 연행해 <막사폭탄>·<화학약품>등으로 <처단>·<수거>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방법과 1·2차는 <기무사>, 3~10차는 경찰을 활용하겠다고 적혀있다.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10만명이상학살을 계획한것이다. 국민의힘측은 <공상>으로 매도하지만 수첩내용중 <여의도봉쇄>·<경계병은수방사인력활용>·<수거대상명부작성>·<사복근무>·<경찰들활용방안>등은 이미 실행됐다. 계엄에 성공했다면 이수첩에 적힌대로 대량학살과 <대남자작극>이 감행돼 <한국>은 <피의난장판>이 됐을것이다.

윤석열내란·반란세력의 조종자는 미제침략세력이고, 3차세계대전의 정세하에 내전·<한국>전위기는 더욱 격화되고있다. 미CIA가 2017~21 특정국가를 겨냥한 별도의 미션센터를 최초로 <한국>에 설립한 사실은 모종의 공작이 이뤄졌다는것을 추정하게 한다. 실제 미CIA·윤석열접촉설이 유력하게 제기됐다. 2019 미CIA국장이 방<한>해 윤석열당시검찰총장과 접촉했다는것이 주내용이다. 유튜브시사채널 더탐사는 2023.6 2019당시 윤석열의 <검찰쿠데타>배후에 미국이 있다며 2019.9 미FBI국장 크리스토퍼레이와 윤석열간의 만남을 짚었다. 

한편 2022 윤석열집권후 미<한>대조선침략연습은 2023 123회, 2024 130회이상 감행됐고, 2025 전반기군사훈련·연습은 작년동기간대비 10회나 더 많은 113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한마디로 2022.2 3차세계대전이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코리아는 <저강도전쟁>중이다. 첨예한 전쟁정세하에서 윤석열은 2024.3 <프리덤실드>연습기간에 맞춰 이례적으로 2주간이나 <충성8000>계엄훈련을 실시했고, <한국>전의 뇌관이 될 <대북국지전>을 2024.10~11 집중적으로 감행했다. 이같은 국내정세는 제국주의진영이 2024 7월 트럼프암살시도, 8월 러쿠르스크침공, 9월 헤즈볼라무선호출기·무전기테러, 10월 <조선러시아파병설>유포, 11월 장거리미사일러본토공격허용과 이에 대응한 러의 중거리미사일오레쉬니크발사, 12월 <한국>계엄해제 4일뒤인 12.8 시리아반미정권전복등 3차세계대전하에서의 반제진영대 제국주의진영간 대결전과 매우 밀접히 연결돼있다.

윤석열내란·반란무리들은 내란에서 내전으로 가기 위해 다음폭동으로 <소요>사태를 조장해 2차계엄을 선포하고 발포를 반드시 감행할것이다. 내전에 국지전이 결합되면 동아시아전·3차세계대전의 뇌관인 <한국>전이 시작된다. <한국>전은 죽기직전의 내란무리들의 유일한 살길이고 3차세계대전·동아시아전에 사활적인 제국주의진영의 최고노림수다. 

3차세계대전의 본격화가 임박한 지금은 반제반파쇼기치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투쟁해야할때다. 3차세계대전의 결과 반제전선이 승리하며 세계자주화와 진정한 평화, 참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그날은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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